사람을 위한 영성 5장 기독교 영성과 성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다윗 작성일 08-01-19 00:24본문
사람을 위한 영성 5장<?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PNU
2006년 9월 25일 월요일 7시반 부산대 법학연구소
로드니 클랩의 「사람을 위한 영성」(IVP, 2006)
5. 그리스도를 보고 만지다 - 기독교 영성과 성찬
말씀을 더듬어 찾기
그리스도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시면서 가시적이고 공개적으로 성찬을 제정하셨다.
루터는 성찬을 삼위일체에 비추어, 성찬이 집행될 때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 역사하신다고 보았다.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임재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과 피를 가리키는 독특한 표지로서 빵과 포도주를 주신 것이다. 루터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말씀을 떠나 피조물 가운데 자기를 찾느라고 헤매길 원하지 않는다. 그분은 어디에나 계시지만, 당신이 도처에서 그분을 더듬어 찾기를 원치 않으신다. 말씀이 있는 곳에서 더듬으라. 그러면 그분을 제대로 만질 수 있으리라.”
성례가 우리에게 극적으로 보여 주고 상기시켜 주는 것은, 우리의 실천적 영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하나님의 행동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찾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이 먼저 우리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는 하나님의 행동이 세례를 ‘든든하고 확실한 토대’로 만들어 준다는 말이다. 우리는 세례를 우리의 변덕스러운 믿음과 같이 불안정하고 덧없고 혼란스러운 기반 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 “말씀과 성례와 관계없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 마귀들 가운데 있을지라도 내가 구원받을 것임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세례를 받았고, 죄사함을 얻었고, 성찬에서 주님의 몸과 피를 구원의 보증으로 받았기 때문이다.”(루터)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성찬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정규적으로 만지고 붙들 수 있는 방법이며, 우리 인생과 세계를 올바르게 읽어 내는 데 필요한 열쇠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객관적 통로이다.
그리스도는 진짜 살아있는 친구처럼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분이다. 어떤 친구보다 뛰어난 진정한 친구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찬 때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성찬 때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가?
성찬시에 임재하시는 분은 부활하셔서 높이 올려진 그리스도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내적 에너지와 생명(그분의 피)을 붉은 포도주와 동일시하고, 관찰 가능한 외적, 사회적, 관계적 자아(그분의 몸)를 빵과 동일시했다.
베드로나 안드레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보고 만졌던 그 예수님을 성찬 때 보고 만진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그리스도, 곧 다시 살아나서 승천한 인간이요 하나님이신 그분을 보고 만지는 것이다. “성찬에서 우리는 완전히 영화된 인격이신 살아계신 구주와 교통하는데, 그분은 성령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에게 나타나는 분이다(존 윌리엄슨 네빈).”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빵과 포도주를 통해 보고 만진다는 사실만큼 중요한 사실은, 이 경험을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점이다.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편입되어 그리스도 안에 살고 장차 그분 안에서 죽을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다. 성찬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인은 부활해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력에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몸을 기억하다
성찬 때에 그리스도께서 실재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성경의 언어는 ‘기억’이다. 이 기억한다는 말을 희석시켜서 성찬 참여자 개인의 기억과 묵상으로 축소하고,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를 부정하는 모습이 많다.
그러면 성경에서 기억하기란 이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헬라어 ‘아남네시스’는 과거의 사건을 하나님 앞에 ‘다시 불러오기(recalling)’ 혹은 ‘재현하기(re-presenting)’라는 의미로서, 그 결과 그 사건이 현재 여기서 살아 작동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성찬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아들을 기억하고, 과거의 구원 사건이 성령에 의해 우리의 모임 가운데 재현됨으로써 살아있고 유효한 현재의 사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부재할 때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찬을 통해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성찬은 순전히 기념의 성격을 담고 있거나, 우리의 기억과 명상을 돕는 보조 도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에서 객관적으로 자기 몸과 피를 주시지만, 그것을 받으려면 믿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믿음은 성례의 위장(胃腸)이다.
성찬에 임하는 것이 좋고 유익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으로 인해 은혜가 나의 연약함을 압도한다. 내가 부재한 상태에 있어도 하나님은 완전히 임재하신다는 말이다. 내가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분이 만나겠다고 다짐하신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 때에 주의가 집중되지 않거나 마음에 분을 품고 있거나 엉뚱한 곳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하기보다 내가 그곳에 있는 데 실패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다.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 몸
성찬은 감각이 개입된 의식이요 공동체적(그리고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의) 축하 의식으로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재하는 것이다. 성찬이야말로 실로 가장 성대하고 가장 거창한 식사의식이다. 그것의 목적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먼저 세상을 변화시키게 될 것이다.
첨부파일
- 사람을 위한 영성 5장 기독교 영성과 성찬.rtf (171.2K)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