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위한 영성 6장 기독교 영성과 성찬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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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윗 작성일 08-01-19 00:2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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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PNU
2006년 9월 25일 월요일 7시반 부산대 법학연구소
로드니 클랩의 「사람을 위한 영성」(IVP, 2006)
6. 사랑의 제사 - 기독교 영성과 성찬의 유익
우리가 일차적으로 유익을 얻으려고 성찬에 나아가면 그런 유익을 얻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성찬이 세상에서 그리고 우리 삶 속에서 담당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성찬의 시민권
성찬 의식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세상에 세워진다. 그리스도의 식탁을 둘러싸고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는 개인들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이다.
“빵과 포도주로 이 성례를 받는 것은, 그리스도 및 모든 성도와의 교제와 연합을 나타내는 분명한 표시를 받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한 시민에게 한 도시의 시민이요 그 특정한 공동체의 일원임을 확증해 주는 표시를 주는 것과 같다(루터).”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완전한 인간성이 회복되고 시민으로 인정된다는 증명서가 성찬 참여이다.
미국인은 독립기념일 축제를 통해 미국인이 누구인지를 배운다. 성찬에 의해 제대로 훈련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가난한 자를 돕고, 죄인을 참으며, 슬퍼하는 자를 돌보고,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고난당하고, 타인을 위해 중보하고, 진리를 지키고, 자신의 생명과 재산과 명예를 걸고서라도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의 진보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찬은 진리, 정의, 평화의 공동체 안에서의 삶을 새롭게 하고 그 삶을 형성하는 것이다. 주님께 충실한 교회는 내향적으로 되지 않는다. 성찬은 세상을 위해 희생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그 희생을 통해 교회는 생명력을 얻는다.
희생의 진정한 의미
고전적 기독교 영성에서 희생이라는 말은 결핍보다는 풍성함을 가리킨다. 그 풍성함은 하나님의 삶에서 흘러나온다. 성경의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필요가 없다. 따라서 희생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고 희생하는 사람과 인간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것,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공의를 실천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행하는 삶이다.
성찬은 문자적으로 ‘커다란 감사’라는 뜻이다. 성찬에서 우리는 소중한 것(빵과 포도주, 돈, 수고의 열매)을 바친다. 성찬상에서는 계급과 인종과 성 등이 무관하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몸과 영을 모두 동원하여 풍성하고 관대하게 사는 법을 연습한다. 이것은 “산 제물”로 드려지는 삶이다. 즉 살아있는 영혼과 몸을 모두의 유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찬 의식은 일종의 사랑연습이다. 성찬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세상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그것은 함께 나눔으로써 모두가 풍성하고 충만한 삶을 배로 누리는 그런 세계이다.
성찬은 하나님의 관대함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성찬은 ‘과거에 멋지게 창조되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더 멋지게 회복된’ 세계로 우리를 편입시킨다는 것이다. 예배당에서 한 성찬 ‘훈련’이 세상 속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나무와 동물이 교회로 올 때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만큼이나 창조세계가 지닌 아름다움과 풍성함과 잠재력을 상징한다. 창조 세계는 인간의 경작과 개발 없이는 그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창조 세계의 제사장이다. 모든 창조세계는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싶어한다. 인간의 창의성과 기술은 자연의 선물들을 펼치고 그것들이 본연의 모습을 갖게 하고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개발된 자연의 요소들을 가지고 성찬을 축하하는데, 이 의식은 인간뿐 아니라 피조물 전체가 참여한다.
성찬과 격려
성찬은 우주적 구속을 공동체적으로 연습하고 재현하는 것이다. 그로부터 우리는 죄 용서의 확신을 얻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 나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고, 현재나 미래에 버림받을 존재가 아님을 안다.
성찬은 나의 신념과 행동을 공동체적으로 격려해 주는 표시이다. 성찬을 통해 나는 같은 신념을 가진 자들의 얼굴을 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몸을 보게 된다.
더 나아가 성례는 그것이 상징하는 실재에 관여하는 표시이다. 즉 그리스도의 임재와 삼위의 교통이라는 실재에 관여하는 표지이다. 이 표지를 먹고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임재 속에 들어가는 일이며,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인격적 교통을 즐거워하는 일이다.
물론 우리는 내면의 비가시적 신앙을 붙들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다. 신앙과 확신은 내면적이거나 심리적이고 ‘영적인’ 것이므로 몸으로 구현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성찬을 통해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걱정과 두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돕는다. 뿐만 아ㅇ니라 그리스도께서는 그분 몸의 다른 지체들과 함께 있도록 하신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 공동체에 우리의 문제를 내어놓을 수 있고 이를 통해 위안과 기쁨과 힘을 얻게 된다.
부활의 음식
우리는 한 몸으로서 또 한 몸 안에서 성찬에 참여한다. 그리고 궁극적 의미에서 우리의 몸은 성찬으로 중개되는 은혜와 자비에 참여한다. 성찬은 오늘의 여정에 필요한 힘을 주는 현재의 식사일 뿐 아니라 예비적인 식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장래의 몸의 부활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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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을 위한 영성 6장 기독교 영성과 성찬의 유익.rtf (165.0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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