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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영성 11장 몸을 길들이다 - 기독교 영성과 몸의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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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595 회
작성일 24-07-1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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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부산대 모임
2007년 2월 20일 화요일 / 부대 앞 오이코스

로드니 클랩, “사람을 위한 영성”, IVP, 2006

11. 몸을 길들이다 - 기독교 영성과 몸의 훈련 

운동과 식이요법
  
  기독교 영성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이 지탱하는 사회적 유기체인 교회에 참여하고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영성은 운동 감각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몸으로, 운동 감각으로 배운다. 예컨대, 기도에 관한 이론을 배우기 전에 기도의 자세와 언어를 익힌다. 우리는 몸으로, 몸을 통하여 배운다. 또 몸을 반복적으로 움직여서 배운 것을 생생히 간직한다. 기독교 영성은 하나의 운동, 특히 몸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이런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잦은 기도, 성경 읽기, 자선 행위, 그 밖의 영성 훈련은 상당히 별난 것으로 보는 분위기가 있다. 사실 성경의 인물과 기독교 전통을 들여다보면, 영적 훈련 및 죄와의 싸움에 대한 태도가 너무 극단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꼼꼼한 태도를 버렸을지 모르지만,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아주 꼼꼼한 강박관념까지 갖고 있다. 다이어트와 규칙적인 운동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식생활과 운동을 생사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유명한 뉴스 잡지들이 요즈음에는 종교란을 없애고 건강 코너를 신설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건강과 관련하여 사소한 잘못된 습관들이 결국 건강을 악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영성의 전통이 우려하는 바는 사소하게 보이는 죄를 하나씩 짓게 되어 그것이 습관화되고 마침내 영(그와 더불어 영적인 몸도)이 뚱뚱해져서 둔해지는 것이다. 영적 선배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것들을 바라보라고 한다. 현재의 신체적 몸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영적인 상태와 장차 부활한 다음에 입을 영적인 몸에 주목하라고 한다. 우리 현대인은 디모데전서 4:7-8의 말씀을 거꾸로 뒤집곤 한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우리가 점차적으로 개발하는 습관과 성품이 결국에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하나님과의 교통)이나 영원한 죽음(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에 걸맞는 존재로 만들 것이다.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일은 지속적인 운동과 비슷하다. 의사들은 2주에 한번씩 하는 운동은 전혀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우리에게 일러 준다. 자주 규칙적인 운동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한 달에 한 번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영적 운동과 다이어트를 소홀히 하면 영적 건강이 나빠지고, 교회 참여와 성품 개발에도 지장이 많을 것이다. 몸의 동맥과도 같은 하나님과의 관계 및 동료 피조물과의 관계도 막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극단에 도달하면 결국 죽음과 파멸을 당할 것이다.

인내와 몸으로 드리는 ‘영적 예배’

  기독교 영성은 운동 감각의 영성이다. 기독교 영성과 성품을 배우고 유지하는 일은 몸의 습성과 태도에 많이 달려 있다. 훈련된 몸이 정신 상태를 좌우하고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각도에서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인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내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정통 기독교를 따르는 우리의 선배들이 우리를 고통당하는 놀라운 존재, 곧 두 세계에 낀 중간적 피조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숭이와 천사 사이에 있으며, 또한 두 시기 사이에 끼어 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완성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때에는 만물이 온전한 모습을 되찾고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빌 2:9-11). 한 평론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초대 교회는 우리가 중간기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일을 포기해야 한다든가, 일찍이 기권해서 두 손을 들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해다. 오히려 그들은 폭력의 힘 이외에 다른 힘이 있다고 믿는 믿음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런 확신은 하나님을 그 힘의 원천으로 보고 장차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서 그것이 완성될 것을 바라보는 포괄적인 비전에 근거하고 있다. 신자의 마땅한 본분은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하시도록 허용하고 그 능력을 신뢰하는 일이다. 거기에는 현재의 악을 견디면서 장차 그 악을 이기고 승리할 것을 확신하는 일도 포함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은 통제하려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 통제를 포기한다는 것은 자기 훈련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조작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는 분은 삼위 하나님 뿐이다. 신자의 일차적 관심사는 성실함이고, 유능함은 이차적인 관심사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현재 살아계셔서 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시다고 믿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완전히 다스리실 것임을 신뢰한다. 그 중간에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하나님 나라와 그 선한 통치를 무시할지라도 인내하는 법, 고난받는 법, 성실함을 지키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19세기에 블룸하르트 부자는 교회와 기독교 영성의 실천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가리키는 증언이라고 생각했다.
  “죄가 완전히 저지되기까지, 오랜 세월 쌓여 왔던 어두움이 사람들 가운데서 해체되고 사라지기까지는,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고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버틸 힘을 주는 도움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인내하지 못하고 자기 힘과 재주로 처신하려고 하면, 이 세상에서 또 이 세상을 위하여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돕기보다 오히려 가릴 때가 많다. 우리가 저항과 한계에 부딪힐 때, 위대하신 창조주요 구속자이신 하나님, 곧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엡 3:20) 이상으로 행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분께 돌아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논리적 개념과 인간의 재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상치 못한 것을 통해 온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것이 오리라고 고대하는 삶은 곧 기쁨과 소망이 충만한 삶이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런 놀라운 것을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이처럼 상처투성이인 깨어진 세상에서는 우리가 자주 고통을 받을 것이고, 자신만을 위해서 고통받을 뿐만 아니라 이웃과 원수의 상처까지 감싸 주도록 부름을 받았다. “구주를 믿는 우리는 우리가 고난을 받음으로써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안으로 들어가도록 그리고 그것을 통해 어두움을 이기도록 돕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우리의 고난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땅에서 그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돕는 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블룸하르트 부자는 고난을 견디는 인내에 공동체적 성격이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온 세상을 구속하기로 결심하셨다. 그리고 이 깨어진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한 개인의 생애 동안 구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속 사역이 시작된 지 이미 여러 세기가 흘렀고, 앞으로도 몇 세기가 더 지나야 할지 모르므로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열매를 후세대가 처음으로 맛볼지도 모른다. 그 때 우리는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릴 것이다. 그런데,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튼튼한 성벽을 돌파하려면 얼마나 많은 공격을 해야 하겠는가? 우리의 기도는 어두움의 왕의 요새를 망치로 치는 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자주 반복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돌파구가 열릴 때까지 여러 해가, 아니 여러 세대가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번의 타격도 낭비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을 계속한다면, 가장 든든한 벽이라도 결국에는 무너질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황무지에 치유와 복을 선사하면서 뻗어갈 것이다.”

  이런 유의 인내가 우리 시대에는 얼마나 환영받지 못하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때로는 느릿느릿하고 고집스러운 우리의 몸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조바심을 극복하고 즉각적인 결과가 없더라도 오랜 시간 계속할 수만 있다면, 아주 힘겨운 과업과 운동과 연습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 고난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성품을 낳고, 성품은 소망을 낳으며, 이 소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롬 5:3-5). 사도 바울이 가리키는 소망은 구원의 소망, 곧 “썩어짐의 종노릇”(롬 8:21)에서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의 구속적 치유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비교적 작은 인내를 발휘하는 가운데 더 큰 인내를 배울 수 있고, 마침내 하나님의 시온이 이 갈급한 세계에 내려오는 길을 예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는데’ 거기에는 지극히 작은 나도 들어 있다. 만일 내가 이미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주신’ 대상인 그 세상이 구원을 받았다면 나는 또한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몸의 습성과 태도를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과 ‘영적 예배’와 서로 연계시키는 방식이다. 몸의 ‘산 제물’이 ‘영적 예배’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한마디로 그것이 곧 ‘영적 예배’다. 바울이 여기서 사회적 몸(교회)과 관계지어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런 맥락에서 그는 교회 지체들의 구체적인 몸을 언급하면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일, 낯선 자를 대접하는 일, 기뻐하고 우는 일, 비천한 자와 사귀는 일,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일 등 여러 가지 가시적이고 신체적인 실천 사항을 인용한다. 바울은 몸과 마음을 적대 관계에 놓기는커녕, 그 둘을 분리시키지도 않는다. 손님을 대접하고 원수를 먹이는 일 등 몸으로 해야 할 여러 행위가 ‘영적 예배’의 실례들이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을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도 이와 비슷하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 여기서 우리는 좋은 의도와 인사와 신체적 필요의 공급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작용을 볼 수 있다. 행함없이 의도뿐인 믿음은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며 ‘죽은’ 것이다. 몸의 습성과 태도(여기서는, 음식을 주고 옷을 입히는 일)가 믿음을 온전케 하고 살아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몸의 행위를 떠나서는 진정한 의도도 있을 수 없다. 몸으로 그런 행위를 하겠다는 결심이 없으면, 그런 소리는 쓸데없는 빈말에 불과한 것이다. 자신이 한 말을 몸으로 뒷받침하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진정한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을 새롭게 하고 예배와 믿음을 참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기도와 몸

  기독교 영성은 기도할 때의 몸가짐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왔다.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도의 자세는 서서 팔을 위로 뻗은 모습이다. 그것은 진정한 기도를 몸으로 구현하는 자세다. 존경의 표시로 서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팔을 벌리면 가슴이 무방비 상태가 되어 하나님과 타인에게 취약한 자세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세를 형성한다. 끝으로, 이런 자세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손과 팔로 아무것도 잡지 않고 우리의 짐을 모두 풀어 놓는다. 서서 팔을 열어젖힌 모습은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린 자세다. 이런 몸짓은 우리의 영이 예수님의 뜻과 모범을 따를 준비를 갖추게 한다.
  이 외에도 기독교 영성이 지닌 다른 중요한 차원을 부각시키는 기도의 자세들이 있다. 무릎을 꿇거나 엎드린 자세는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움직이는 형태의 찬양의 기도도 있다.
  이처럼 기도하는 자세가 무척 다양할 수 있지만, 몸가짐이 언제나 중요하다는 점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마음의 훈련뿐 아니라 몸의 운동을 통하여 신앙 생활을 영위하고 성숙해 간다. 기독교 영성은 운동 감각의 영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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