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연구소 ELBiS Club 갈라디아서 4장 21절- 5장 1절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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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작성일 16-11-16 01:23본문
ELBiS Club 갈라디아서 4장 21절 31절 요약 161115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급기야 생뚱맞고 극단적인 양자택일 방식의 논지를 내어 놓는 것 같습니다. 특히 바울을 고리타분하게 교리적인 범주 안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으려는 인물일 것이라는 혐의를 지니고 보면 오늘 본문은 첫 눈에 보기에 매우 불편한 논리 전개에다가 구약의 인용까지 그 의도가 모호하여 마음에 들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런 방식을 사용한 것은 어떤 점에 있어서 반전의 방식을 사용하여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갈라디아 사람들을 설득하려하기 위함인 듯합니다. 그릇된 열심을 내어 이간시키던 이들은 아마도 바울이 사용한 것과 유사한 알레고리(비유) 방식으로 갈라디아 사람을 설득하였던 모양입니다. 즉 이방인인 갈라디아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 족속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옛 언약인 율법아래 들어와 있어야 그 후에 유대인이 누리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개연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를 본문에서 완전히 전복적으로 뒤집어 놓습니다.
바울은 24절에서 비유 즉 풍유(알레고리)를 통해 논지를 펼칩니다. 이 풍유의 방식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른 사건에 빗대어 이야기하므로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채택하는 방식으로 그 하고 싶은 이야기인 선 관념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풍유를 이해하는 데 관건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24절)”라는 말속에서 선관념을 잡아내는 것이 본문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두 언약은 곧 옛언약과 그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은 하갈, 여종(종) 대(vs.) 자유 있는 여자(자유자)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아마도 옛 언약의 출처로 이해되는 시내산(24,25)과 그 근거지인 “지금 있는 예루살렘(cf.1:18,2:1)”이 옛언약과 연결되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26절)과 대조되는 것으로 보아 바울은 의도적으로 유대교와 그에 연결되는 유대교적 잔재를 털어내지 못하는 유대적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격적으로 맹폭하고 있는 셈입니다. 아마 갈라디아 사람들은 거짓 선생들에게 이와 정반대의 가르침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미혹되고 위축되어 유대교적 잔재들에 기웃거려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들이 새언약의 자녀들이라는 정체성에 굳게 서기를 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절).” 아마 갈라디아 사람들은 이 메시지와 정 반대의 메시지를 들었기 때문에 흔들렸을 것입니다.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29절)”은 이런 정황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사야 54장의 인용인 27절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인 갈라디아 사람들이 새언약의 적자이며 복의 수혜자라는 것을 확고히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방 모든 족속이 복의 수혜자가 되는 것이었기에 이런 하나님의 선교의 전망을 잃어버린 “여종과 그 아들”인 옛언약의 패러다임은 “자유있는 여자의 아들”인 새언약의 패러다임과 더불어 함께 하지 못합니다. 그 유업은 새언약의 자녀들이 누리는 것입니다(30절). 이런 변화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자유자가 종의 멍에를 메는 어리석은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5장 1절)
본문에서 갈라디아 사람들이 설득당했던 논리를 전복적으로 뒤집는 방식으로 바울은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셈입니다. 복음으로 자유를 얻은 자가 다시 율법의 종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랫동안 성서를 억압과 차별, 배제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해석해온 전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억압 받은 사람, 차별 당한 사람, 배제된 사람을 위로하고 그들이 자신의 삶에 자긍심을 갖도록 성서를 다시 해석했습니다. 그는 전통에서 이탈한 전복적 성서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으로, 정통의 해석을 훈련 받은 바울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유대 중심적 협소한 세계를 벗어나, 선교적 상황에 처한 바울이 예수께서 온 민족에게 하신 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선교적 상황에서 얻은 관점, 그 새로운 관점이 열쇠가 아닐까요?’ 하나님의 선교, 즉 미션얼 관점으로 전복적인 성서 읽기를 통해 자유의 복음을 견인해 낼 수 있는가 우리 스스에게 묻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자유의 복음을 끊임없이 콘스탄틴적 종의 논리, 억압의 논리로 왜곡시키는 가르침을 주의해야할 것입니다.
일,삶,구원 지성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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