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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8장 1절-22절 기다리는 하나님의 백성, 권념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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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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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8-12-11 14:17

본문

 

홍수이후 어떻게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본문은 통상적으로 노아가 주도면밀하게 까마귀와 비둘기를 통해서 땅의 물이 말랐는지를 잘 확인하고 방주에서 나왔다 이렇게 쉽게 이해하고는 그렇게 중요시 하지 않는 그런 본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본문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본문은 1절과 마지막 21절 22절이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이루어지고 그 테두리 안에 땅의 물이 마른 것과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말하자면 땅의 물이 마르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이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본문을 이해하는 데 있어 1절의 하나님의 “권념(기억)”하심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 들었고” 여기 하나님의 권념하심이란 표현은 심한 곤경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상황을 돌아보시는 장면에서 성경에서 여러 군데 유사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애굽에서 고통받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권념하셨다고 출애굽기 2장 25절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의 찬가를 보면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48)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54)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홍수와 그 결과로 인한 물의 창궐함속에서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모든 생물들의 상황을 마치 출애굽 이전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곤고한 상황,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의 하나님 백성들의 곤고한 상황과 비슷하게 보시고 있다는 암시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보면 홍수 이후 물이 줄어드는 상황에 대한 진술과 노아가 4번 이상이나 물이 얼마나 줄어 들었는지를 알아 보려고 했던 것들을 통해서 방주에서의 삶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홍수의 진멸에서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에 마냥 좋은 삶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물이 줄어든 것을 본문은 이렇게 점진적이었다고 말합니다. 3절에서 40일의 위 아래로 물이 터진 것 같은 홍수 이후 약5개월 후에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6개월 17일만에 방주가 아라랏 산 꼭대기에 정박했고 9개월 하루째 되는 날 이런 저런 봉우리들이 겨우 보이기 시작했고 이 이후로 노아가 창문을 통해서 물이 마른 것을 확인하기 시작했고 1년이 되어서야 노아가 보니 지면에서 물이 다 걷혔고 젖은 땅이 하나님이 불게 하신 바람으로 다 마른 것은 1년 1개월하고도 22일이 지나서였습니다.

 

노아에게 있어서 이 세월은 마냥 방주를 통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희희낙락 좋은 세월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노아에게 어떤 고통이 있었을지는 다만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 제한된 식량과 물자를 지니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8명의 가족들이 각종 동물들을 돌보며 지내야 했던 1년 이상의 삶은 아마 상식적으로 생각하여도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방주안에서의 생활의 한계와 답답함, 그 곤고함을 잘 묘사해 주는 것이 6절에서 12절까지 노아가 방주에 낸 창문을 통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어 놓아 물이 마른 것을 확인하려는 장면입니다. 전통적으로 어릴 때부터 우리는 여기 까마귀와 비둘기에 대한 묵상으로 점철된 해석들을 많이 접해 왔습니다. 예를 들면 까마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시체들을 먹느라고 바빴기 때문이다라든지 까마귀는 안 돌아오고 비둘기는 두 번이나 다시 돌아 온 것을 보고 부정한 새와 정결한 새 이야기로 연결하여 까마귀와 같은 신자가 되어서는 안되고 비둘기와 같은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알레고리 해석들을 많이 접해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해석은 노아가 방주에서 어떻게 하든지 나오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주의 삶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구원받은 삶이기 때문에 너무 좋은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는 홍수에서 구원받기는 했지만 너무나도 처참하리만큼 곤고하여서 거기서 빠져 나오고 싶은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대해 빛을 비추어 줍니다. 한마디로 창세기 8장은 하나님나라의 이미와 아직사이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유익한 알레고리를 제공해 줍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고, 구원의 방주인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에 있기만 하면 다 좋을 것 같이 생각하지만 실상 이런 삶이 하루 이틀 길어지기 시작하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에 모든 것이 확 달라지고 변하고 깔끔하게 멋있는 삶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오랫동안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들을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로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노아 다음의 아브라함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75세에 하란을 떠나라는 명령과 함께 언약을 맺으시지만 그 이후 100세에 이르러서야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주셨고 긴 기다림의 세월을 통해 결국 하나님은 이삭을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모습속에서 예배하는 존재, 헌신하는 존재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40일간의 홍수사건 이후에 한꺼번에 물을 말리시는 방식을 택하시지 않으시고 지루하리만큼 자연적인 방식으로 땅을 말리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전 생태계에 있어서 곤고함의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노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까마귀와 비둘기로 땅의 건조여부를 점검해보고 확인후 방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점검 작업 후에도 나오지 못하다가(사실 땅의 안전 여부나 이 모든 것에 있어서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16절과 17절에서 나오라고 하신 후에야 노아가 모든 식구와 생물들과 함께 노아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긴 방주생활끝에 한 일이 무엇입니까? 20절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점에서 오늘 본문은 노아에 대해서 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보게 되는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지루한 방주의 삶을 “기억”하시고 “권념”하시는 분이십니다. 구원 이후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해피하지 않고 오히려 광야의 삶과 같은 곤고한 삶이며 밀폐된 공간에서 느끼는 폐소 공포증을 느낄 만큼, 그렇다고 밖으로 한 발자국도 우리 마음대로 내 딛지 못하는 좌절과 절망의 어두운 밤을 우리 믿는 자들이 경험하게 됩니다. 현재의 삶의 답답함과 미래의 삶에 대한 불안함 속에서 나름대로 이런 저런 시도(까마귀, 비둘기 날려 보내는)를 해봅니다만 뾰족한 수가 없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삶을 권념하시며 기억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친히 “바람을 땅위에 불게 하”셔서 물이 줄어 들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기억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15절에서 17절 말씀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 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이 말씀을 통해 불안함과 포비아속에 있는 노아와 그 가족들을 방주 밖 세상으로 인도하여 내십니다. 그리고 창세기 1장의 명령처럼 번성의 명령, 번성의 약속을 통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창조가 시작됨을 명하십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21절과 22절에서 자신의 기준마저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기다림속에서 결국은 하나님을 예배한 노아를 대표로 하는 인류와 모든 세상을 향하여 보존의 약속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 하지 아니하”겠다 하시는 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입니다. 이제는 인간의 어떠함을 보시고 그 기준, 그 수준을 낮추셔서 인간과 세상을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대개 전통적인 신학은 하나님을 절대로 자신의 뜻을 바꾸지 않으시는 움직이지 않으시는 부동자로 이해합니다만 성경은 너무나 자주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 자신의 마음을 바꾸시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일상의 반복성, 22절이 표현하는 것처럼 파종하고 추수하고 계절이 변하고 다시 돌아오고 아침이 되고 밤이 되는 이 세상의 일상적인 반복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존하신다는 증거이며 하나님의 자기 기준을 낮추심이 없으시면 이런 세상의 보전이 불가능함을 보여 주는 증표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만드신 피조세계를 향하여 낮추시고 바꾸시는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보다도 성육신의 신비 속에 가장 농후하게 녹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시다 못해 심지어 아들이신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자기비하의 절정인 것입니다.

 

대강절은 하나님이 고통중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권념, 기억하셔서 이 땅에 인간의 몸, 아기의 몸으로 성육신하신 것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다림속에서 이 땅에 오시는 메시야를 바라봅니다. 이 모든 대강절의 메시지가 오늘 창세기 8장에 들어 있습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개인적인 삶이든, 아니면 공동체로서 교회의 삶이든 우리의 삶이 그리 녹녹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뭔가 빠른 변화, 속 시원한 결과를 기대하지만 마치 사방이 막힌 벽에 갇힌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희망으로 이 사실을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삶을 기억하시고 권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일을 이루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결국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자신을 낮추시고 기준을 낮추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일하심을 잠잠히, 기다림으로 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대강절에 창세기 8장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일,삶,구원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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