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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아버지: 기독교 복음의 핵심 재발견, 톰 스매일, IVP 제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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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4,830 회
작성일 08-10-0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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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스매일, 잊혀진 아버지(IVP) : 4장 아들과 아버지


요약정리 : 정한신


성부에 대한 성자의 의존


  성부는 자신의 정체성, 계시, 활동에 대해 성자에게 의존하신다. 성자도 성부께 의존하신다. 우리 역시 성부께 의존하고 있다. 성자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지닌 분으로 성부와 관계를 맺으시며, 성자의 아들됨은 우리에게 적절하고 모범이 되며 권능을 부여해 준다. 예수님은 성육신 안에서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롬 8:29)이 되셔서 우리가 우리 식으로 그분의 아들됨을 공유하고,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관련하여 자신이 누구인지 아신다

1. 예수님은 성부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받으신다. 자신의 사명의 각 단계와 삶과 죽음의 각 위기 때마다 예수님은 성령의 권능으로 아바를 새로이 고백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다시 알게 됨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정체성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한 세상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내적 성찰, 과거에 대한 탐구, 자신의 업적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려 한다. 자신의 아들됨에 대한 예수님의 지식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주관적 인식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친밀한 지식에 있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아들로 아신 것은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를 특별히 아신 것의 반영이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을 아셨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아버지를 아신다

예수님이 그 육신의 부모와 함께 처음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했을 때 뒤에 남아 있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다. 성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의와 충성을 바치라고 우선적이고 비할 수 없는 요구를 할 수 있다는 것과 따라서 아버지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여야 할 줄을”(한글개역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예수님은 세례 시에 아버지를 아신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자신의 아들됨을 깨닫는 것은 예수님의 세례에서 결정적인 부분이었다. 예수님이 물에서 나와 자신이 부름받은 일에 자신을 드릴 때, 아들됨에 대한 새로운 인식(하나님의 음성이 말씀하신 것을 들음)과 성령의 활동이 새로이 일어나는 것(하나님의 영의 강림)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일어났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라는 말은 세 개의 구약본문에 대한 반영이다(시편 2편, 이사야 42:1, 창세기 22:2, 12, 16). 이는 예수님이 아들이면서 또한 메시아이며, 종이고 제물인 분이라는 구약의 세 주제를 성취시키면서, 그것에 살을 붙이고 이전에 없던 내용과 통일성을 부여하실 것임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자신의 아들됨이라는 이 새로운 비전을 새롭게 인식하는 바로 그 순간, 성령이 그분에게 임하신다. 그 성령에 의해 예수님은 종으로 희생을 당하지만 왕으로 자신의 백성들에게 오는 아들의 사명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는다.

 예수님의 광야 시험의 중요주제 중 하나는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이 아들됨의 의식에 가해진 공격이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눅4:3,9)이라고 시작하여 세례시 들었던 그 음성의 권위와 타당성에 도전한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 떡에 대한 필요를 채우기 위해 권능을 사용하라는 시험이 주어진다. 아들됨에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중심에 놓았던 삶에서 인간의 필요와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의 필요에 의해 그 위치를 확인하는 삶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에 대항해 자신의 삶이 아버지에 대한 순종에서 힘과 의미를 얻는다고 천명하신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4:4).

  또한 그분의 아들됨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에 시험삼아 뛰어내림으로써 그 아들됨을 입증하라는 시험이 주어진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험의 대상이 아니라 신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4:12).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적절한 관계는 의존 관계다. 그것은 순종하는 신뢰와 신뢰하는 순종의 관계이며, 공격이 바로 이 중대한 요소들에 임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것들은 사실상 은사주의 운동이 직면하는 두 개의 전형적 시험이며, 은사주의 운동의 수상쩍은 측면은 치유, 평강, 흥분을 위한 그들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혹은 은사의 소유자나 기적을 행하는 자로 자신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영적 권능을 오용하는 사람들로 인해 생겨난다. 이는 모두 자신이 자녀됨을 진정으로 믿지 않았거나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기에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 그분은 아버지의 은총과 성령이 임한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과 함께 계시며 자신이 하는 말과 자신이 치유를 위해 내미는 손길을 존중하실 것을 알고 모든 인간적 반대에 대항하여 전진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담대함의 필수조건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의심할 때 우리는 위축되고, 그분을 섬기는 일에 모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이다. 결정적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지지해 주지 않으실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치유 기도 사역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기꺼이 하실지 우리가 합당한 존재인지 의심이 든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위치를 확증해주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과, 우리 마음 속에 아바라 부르짖음으로써 그분이 아버지시며 우리가 그분의 사랑하시는 자녀라는 것을 새로 증거하시는 성령께 다시 호소해야 한다.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사람들만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변형에서 아버지를 아신다

변화산상에서의 변형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선택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그 확증은 우선 율법과 선지자들(모세와 엘리야)로부터 오지만, 더 큰 확증은 하나님 자신의 음성으로부터 직접 온다. 예수님은 순종함으로 고난의 길을 가실 때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게 할 수 있는 새로운 권위를 가진다(“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님의 사명을 새로이 입증해 주심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신다. 아들됨은 고귀한 순종을 위해 택함 받는 것을 의미하지만, 또한 그 권위를 소유하게 되는 것도 의미한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아버지를 아신다

겟세마네에서 고뇌에 빠질 때 예수님은 아바와의 관계를 재천명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그분은 아버지와 교제를 나누면서 받는 힘으로 자신의 수난에 직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버지를 아신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아바’를 부르신다.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겟세마네에서 아바는 무조건적 요구를 하실 때 순종해야 하는 분이었고, 이제는 궁극적 구원자로서 신뢰할 수 있는 분이다. 모든 것을 드린 적극적 순종이 수동적 신뢰가 되다. 모든 문제-세상의 구원 및 그분 자신의 옳음이 입증되는 것-를 최종 판결자인 하나님 앞에 가져가 상고하고 그분의 대답을 기대하며 예수님은 죽으시는 것이다.


* 요약 : 성전에 있던 소년에서 십자가의 성인 남자가 되기까지, 시험과, 결단과, 고난과, 죽음의 모든 중대한 순간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그 관계에 순종과 신뢰로 응답하는 것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확신을 발견하며, 필요한 순간마다 하나님의 아버지되심과 자신의 아들됨을 새로이 재천명하고 계시하신다.


성부는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계시하신다

2. 예수님은 성부께 의존하신다. 예수님을 계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은 성부이시기 때문이다. 성부 역시 성자를 증거하시고(요8:18) 성자에게 영광을 돌리신다(요8:54). 예수님의 말과 사역 안에서 성부와 성자가 상호 영광을 돌린다. 특히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신비와 인격을 인식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을 성부의 사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음은 흥미롭다. 그 일이 다른 곳에서는 성령의 사역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예수를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게 한 것이 성부 하나님이라고 보신다. 바울은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똑같은 고백을 성령의 사역으로 돌린다. 여기에 모순이 없음은 성령이 성부 하나님 자신의 진리와 사랑과 능력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데서 성부의 주권적 뜻의 실행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주시고, 그들을 이끄시고, 그들이 자신에게 올 수 있게 하는 분이 아버지라고 하신다. 사람이 예수님께 오거나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고, 따르고, 제자가 되는 것의 배후에에 하나님이 택하시고 계시하시고 능력을 주신다고 인정하고 선포하신다. 인간의 선택 배후에는 성부 하나님의 선택이 있고, 인간이 가는 것 배후에는 성부 하나님의 이끄심이, 인간이 믿는 것 배후에는 성부 하나님의 계시하심이 있다.


성부와 성령은 예수님을 계시하는 일에 역사하신다

3. 요한복음 3:5에서 사람들을 중생하게 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고 거기 들어갈 수 있도록 하는 분은 성령이시다. 계시와 중생이라는 동일한 사역을, 성부의 사역으로 혹은 성령의 사역으로 말하는 것이 어떻게 연관되는가?

  요한복음에는 성부의 행동과 성령의 행동 사이에 기본적 통일성이 있어서 엄격히 그 둘을 분리할 수 없다는 초기 삼위일체론이 나와있다. 성령은 그들 자신을 넘어 서로를 향해 교통과 사랑 안에서 손을 내미는 성부와 성자이시다. 따라서 계시 활동은 각자 그리고 연합하여 행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성부와 성령이 연합하여 성자를 계시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오는 일에 외적인 섭리적 요소, 그리고 더 엄밀하게 말하면 내적인 영적 요소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성부가 외적 환경들과 사건들을 정하시는 것과, 성령의 내적이고 주권적인 깨우침과 중생의 사역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드는 데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요소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계시하고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에 성부 하나님의 주권적 활동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고 그를 알리시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과 행하시는 모든 것을 아버지께 의존한다

4. 성부 하나님의 뜻이 그 뜻의 필수 행위자인 성자를 통해 실행되는 것처럼, 성자의 행동은 성부께 완전히 의존하며 성부에 의해 결정된다.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성부의 인격과 목적과 영광으로부터 비롯되며, 그 인격과 목적과 영광의 지시를 받고, 그 인격과 목적과 영광을 지향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적 행동으로 분별하고 따르는 것이다.


예수님 사역의 원천이신 성부

성부는 성자의 사명의 원천이다. 예수님은 곧 성부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자, 아버지가 주신 완수해야 할 사명을 가진 분이다.


성부는 예수님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관장하신다

성부의 행동은 성자의 행동을 지속적으로 관장하신다. 예수님의 삶 속에는 매순간 그분의 결정들을 형성하는, 비밀스럽게 지휘하는 지속적인 인격적 인도가 작용한다. “...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시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요5:19-20). 이는 신학적 원리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상생활에 대한 묘사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버지께 내어 드릴 것이다

성부는 이중적 의미에서 성자의 사명의 미래다. 성자의 완성된 사역이 성부의 판결에 맡겨진다는 의미에서, 또한 성자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며, 그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그것을 성부께 내어드려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고전15:28)되도록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모든 것은 처음에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리고 모든 것이 끝에 가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모든 입이 예수님의 주되심을 고백하고 모든 무릎이 그분의 이름에 꿇을 때, 그것은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 사명은 그것을 시작하는 원천이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from), 그 사명을 지속하는 권위이신 성부 하나님과 함께(with), 그 사명의 궁극적 목적이신 성부 하나님을 위한(for) 것이다.



성부는 성자에게 말씀하신다

5. 하나님이 예수님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식과 같다. 우리는 복음서들의 행간을 읽을 때, 성부와 성자가 그들 존재의 영광스러운 신비 안에서 함께 이야기 나누는 방식들을 어느 정도 추적할 수 있다.


성부는 인간사와 사건들에서 성자에게 말씀하신다

성부는 주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인간사와 사건들이라는 맥락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성자에게 보여주신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 안에서 우리와 더불어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성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와 더불어 사는 사람들 및 사건들과 연관해서 주어진다.


성부는 구약으로부터 성자에게 말씀하신다

성부는 이미 하나님의 행동과 자기 계시의 장이 되었던 자기 백성의 과거 전통으로부터 성자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지금 하시려는 일은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 하셨으며 성경에 기록된 일의 연장선상에 있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완벽하게 성경에 한정된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항상 구약의 말씀과 그것을 반영하는 말로 기록되어 있다.


성부는 기도 중에 성자에게 말씀하신다

성자는 자기 아버지께 기도하셨다. 기도는 성자가 성부와 교통하는 수단이며 성부가 성자에게 대답하는 수단이 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바에 대해 자유롭고 사실적으로 알리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고백’의 기도를 드리셨다. 또한 예수님의 기도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대한 ‘분별’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은 명확하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을 통해, 성경을 통해, 기도를 통해, 예수님은 특정상황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명확한 뜻을 반복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예수님은 어떤 방법이나 기술이나 ‘기독교적 원리를 적용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에서 지금 하고 계시는 일을 깨닫는 성령의 민감한 통찰에 의해 행동하신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파악하는 것은 성령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고자 하시는 분별력에 대한 묘사이자 약속이다.


성자에 대한 성부의 마지막 심판인 부활


성부에 대한 성자의 의존을 마지막으로 표현한 것은 물론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다. 십자가에서 성부는 성자가 가시는 미래다. 부활은 성자의 완성된 순종에 대한 성부의 판결로, 로마와 이스라엘의, 국가와 교회의, 원수와 친구의 갖가지 적대적 판결들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역전이며 미래의 시작이다. 성자가 순종의 길을 다 가셨을 때, 그가 신뢰한 아버지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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