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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성령 일과성령 2-4장 합독 요약 (홍정환) 소감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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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 건 조회 3,263 회
작성일 20-05-06 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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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29일

참가자: 지성근, 박주현, 정한신, 박태선, 이하정, 부순애, 조민주, 홍정환, 배성우

범위: pp. 83~195


2장 지배적 일 이해


일 이론의 고찰 필요성과 계획(시장 경제와 계획 경제의 대표 주자로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선택하고 분석)


“일의 신학의 주요한 특징을 놓치지 않으려면,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삶에서의 일의 성격과 역할뿐 아니라(1장),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이해하는 방식 역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일의 신학이 고찰할 필요가 있는 일의 실재 중에서 그 핵심은 일 이론이다. 일의 신학이 경제가 발전한 사회와 발전 중인 사회 모두에 타당성을 지니려면, 반드시 이 사회들에서 우세한 일의 철학을 분석해야 한다. 따라서 이번 장에서 나는 애덤 스미스와 카를 마르크스의 일 이론을 살펴볼 것이다.”(p. 84)


“스미스와 마르크스는 개인과 사회의 삶에서 일의 중심성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그러나 일의 목적, 노동 분화, 그에 따른 결과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소외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르다.”(p. 87)


 


애덤 스미스

카를 마르크스

일의 목적

소비(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표이자 목적)

일은 인간성의 표현이 아닌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한다.

자연의 인간화(세계를 인간의 형상으로 재창조)

일은 인간이 몸과 영혼을 하나로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자기 실현 그리고 자연의 인간화를 통해 인간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일의 본질적 기능

노동 분화와 노동자의 사익 추구

노동 분화

- 노동 분화의 결과로 인간 본성의 차이가 발생했다.

- 노동 분화만이 경제적 진보의 실질적 요인이다.

- 현대 사회를 조직하고 유지하는 원칙이다(자신의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노동을 분화하고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

소외를 조장

- 노동자와 그 노동자의 활동 및 생산품을 단순한 수단으로 바꾸기 때문

- 인간이 하는 일의 특징을 변화시키기 때문(개별 노동자의 일이 “모든 예술적 특성을 잃고” 점점 “순수하게 기계적인 활동”이 되어 버림)

사익 추구

사람들이 다른 이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추구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이익일 뿐.

공동선을 실현하는데는 덕이 필요 없으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의 등 뒤에서 자동적으로 실현된다.

인간 본성의 타락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점은 목적을 가지고 자유롭게 일할 뿐 아니라 서로를 위해 일하는 것!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동시에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불충분하다. 모든 개인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삼아야 한다.

노동자의 소외

- 양질의 일자리를 갖지 못한 사람에게 발생하는 것

- 필연적으로 감내해야 하는 짐(노동 분화가 문명의 진보를 위한 열쇠이기 때문)

일이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될 때 소외를 조장

한 사람의 존재가 단지 그의 실존을 위한 수단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2부 성령론적 일의 신학을 향하여


3장 일의 신학을 향하여


* 필요성과 방법론을 기술한 챕터


“일 윤리로 충분할까? 아니면 일의 신학이 요구되는가?”(p. 117)

“전통적으로 성화의 교리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졌던 일에 대한 윤리적 고찰은 인간론적 관점의 고찰로 보완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형태의 일이 하나님이 만드신 자유롭게 책임감 있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과 양립할 수 없는지, 그리고 어떤 형태의 일이 그들의 개성을 발전시키거나 억압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p. 122)


일에 대한 윤리 신학적 고찰에 만족해서는 안됨: 성경은 일을 할지 말지만 말하는 것을 넘어 일의 궁극적 의미를 조명함. 성화를 넘어 더 넓은 시각이 필요하다(p. 123).


“이 책의 주요 임무는 인간의 일을 이해하기 위한 신학적 틀을 발전시키고, 일의 세계를 평가하고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안내할 암묵적인 윤리 원칙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p. 125)


방법론_ 일의 신학을 형성하기 위한

전통적 방법론은 일에 관한 성경구절을 분석, 조합하여 일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진술하는 귀납적 방법론이었다.


전통적 방법론의 한계

- 소스가 부족(일에 대한 언급이 부족)

- 성경 시대와 현대의 사회문화적 간극이 큼

- 상충되는 구절 중 어디에 중요성을 부여할 것인가?


“대신 우리는 연역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즉, 신학적 틀을 먼저 정립한 뒤 그 틀 안에서 일에 대한 성경적 진술들을 통합해야 한다.”(p. 129)


<희망의 신학>(몰트만)에 담긴 기본 통찰을 따르고 있음.


“새 창조의 개념에 기초한 일의 신학은 종합적일 필요가 있다. 새 창조는 우주적 실재(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이기 때문에, 그것에 기초한 일의 신학은 인간의 일이 모든 실재, 즉 하나님, 인간, 인간 이외의 환경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할 필요가 있다.”(p. 138)


“일의 신학은 전 지구적 신학이어야 한다. 인간의 일의 세계가 전 지구적 세계이기 때문에, 일의 신학 역시 전 지구적 맥락에서 일을 고찰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p. 138)


“일의 신학은 (지구촌과 전 지구적 환경을 고려하는) 공시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통시적 의미에서도 종합적이어야 한다.”(p. 139)


 

4장 일, 성령, 새 창조


“이번 장에서는 그러한 성령론적 일의 신학을 위한 기초를 놓고 그 기본 윤곽을 그릴 것이다.”(p. 143)


“그러나 인간의 일과 그 결과물이 단지 이러한 ‘오프스 프로프리움’의 전제 조건이라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모든 인간의 영혼에 끼치는 그 영향과 상관없이 종말론적으로는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한다.”(p. 146)

* opus proprium: 본래적 일. 여기서는 기독교 신앙, 성화, 섬김 등.


“그리고 창조세계의 내재적 가치와 선함에 대해 신학적으로 견고한 믿음이 없다면, 문화 참여에 대한 긍정도 신학적으로 공중에 붕 뜨게 된다. 따라서 세상의 멸망을 기다리는(그러면서도 분열증적인 삶을 사는 것은 편리하게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같이 사회와 문화에의 참여를 기피한다(이는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신학적 일관성에 기인한다).”(p. 147)


“그리고 창조세계의 본질적 선함을 믿는 것은, 종말론적 파괴가 아닌 종말론적 변혁을 믿을 때에만 가능하다.”(p. 147)


“세상의 마지막에 묵시록적 멸망이 아니라 종말론적 변혁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면 (...) 인간이 행해온 일의 축적된 결과물들은 본질적 가치와 궁극적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p. 148)


“더 나아가 인간론적으로 우리는 인간이 몸을 가지기만 한 것이 아님을 주장해야 한다. 즉 인간은 곧 몸이다. 그렇다면 물질적 창조세계 전체의 선함은 단지 수단적일 뿐 아니라 본질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창조 세계의 본질적 선함에 대한 믿음은 오직 종말론적 연속성에 대한 믿음과만 양립한다.”(p. 155)


새 창조는 처음 창조의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처음 창조가 지향하고 있던 방향으로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창조 교리는 그 자체로 일의 신학을 발전시키는 데 충분한 기초가 되지 못한다. 일의 신학은 새 창조의 (부분적) 실현 그리고 새 창조에 대한 기대라는 더 넓은 맥락 안에 놓여야 한다.”(pp. 162-163)


성령을 언급하지 않은 채 새 창조를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울이 말했듯이, 성령은 미래에 있을 구원의 “첫 열매” 혹은 “보증[금] ”(롬 s:23; 고후 1:22을 보라)이시고, 그들 안에 있는 종말론적 변혁의 현재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도, 성령은 미래의 새 창조가 현재 선행될 수 있게 하는 주체시다(마 12:28). 성령 없이는 새 창조의 경험도 없다! 따라서 일을 ‘트란스포르마티오 문디’의 적극적 선행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일의 신학은 성령론적 일의 신학이 될 수밖에 없다.”(p. 164)


기존의 이해가 성령의 활동을 구원에 주로 국한 시킨데 반해, 저자는 “성령이 구속의 영(spiritus redemptor)이실 뿐 아니라 창조의 영(spiritus creato)이심을 보여 주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p. 165)


일을 소명으로 이해하는 (루터의) 입장이 갖는 강점과 약점

- 강점: 일에 큰 가치를 부여한다.

- 약점: 일에서 발생하는 소외에 무관심하며, 외적 부르심과 영적 부르심의 갈등을 화해시키기 어렵고, 구조적 변화를 외면한채 일을 열심히 하도록 종용하며, 직업 이동의 유동성이 커진 현실에 적합하지 않고, 소명을 임금을 받는 활동(취업)으로 축소시켰다.


루터의 관점을 고쳐 쓰기 어려운 이유

- 근거 구절에 대한 성경 해석이 애당초 틀렸음

- 보카티오vocatio는 원래 그렇게 쓸 개념이 아닌데 억지로 골라 설명하다보니, 신학적 일관성이 애당초 결여되었음(적합한 진짜 개념은 카리스마charisma, 즉 은사임)


“은사를 나누어 주시고 그 은사를 통해 행하시는 성령은 종말론적 새창조 실현의 “보증”이시기 때문에(고후 1:22: 참고, 롬 8:23), 일에서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트란스포르마티오 문디에서 선행적으로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 된다. 영광을 받으신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은사 안에, 그리고 이러한 은사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에 의해 가능해지는 섬김 안에 임재하신다.”  악의 세력이 그분의 통치를 여전히 방해하고 있지만, 그분은 그러한 은사를 통해 그분의 사랑의 통치를 세상 안에 실현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일상적인 일을 할 때, 성령은 그들이 “창조를 완성하고 하늘과 땅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협력할 수 있게 하신다.”(pp. 184-185)


“성령론적 일 이해는 일을 인간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일을 의미있다고 선언하지 않는다. 성령론적 일 이해에서 일을 하나님과 협력하는 행위로 격상시키는 것은 소외를 극복해야 할 의무를 함축한다. 사람의 개인적 은사는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요점은 단순히 일을 하나님과의 협력으로 종교적으로 해석하고 그럼으로써 그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새 창조의 ‘기획’을 위해 하나님과 은사적으로 협력하는 것으로 변화 시키는것이다.”(p. 186)


“어떤 경우라도, 누구든 신실하지 못하다는 의심을 받지 않고도 직업을 바꿀 수 있다. 만약 그 변경이 주어진 ‘카리스마’와 조화를 이룬다면, 사실 그것은 그 ‘카리스마를 주신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의 표현이자 새로운 방식으로 동료 인간을 섬기고자 준비되어 있다는 표현일 수 있다. 영구적인 부르심이 없이는 (칼뱅이 생각했던 것처럼) 인간의 삶이 “뒤죽박죽”되거나, (청교도들이 두려워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보다 게으름을 피우며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단일하고 영구적인 소명의 경직성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창조성이라는 풍미를 더해 주고, 현대 일중독자들의 단조로운 생활을 깨뜨리는 쉼을 가져올수있다.”(p. 187)


비스리스도인의 일은 새 창조와 관련이 있는가?

“(...) 즉, 비그리스도인의 일의 결과가 하나님의 정화의 심판을 통과하는 한, 그것은 미래의 새 창조에 기여할 것이다.”(p. 189)


비그리스도인의 일을 성령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한가?

성령은 모든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며, 교회와 세상 문화 안에서 활동하신다. 성령의 목표는 최종적으로 영화롭게 되는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애쓰신다는 점에서, 두 영역에서 동일하다. 차이는 두 집단의 사람들을 향한 성령의 목적이 아니다. 사람들의 수용력이다. 


일의 신학은 위장된 일의 이데올로기인가?

“일을 ‘트란스포르마티오 문디’를 위해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일에 해당하는 일반 이론이 아니다. 모든 종류의 일과 모든 방식의 일에 적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새 창조가 현재의 창조 세계에서 발견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은 현재 세상의 모든 것을 무차별적으로 인정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마구잡이식 인정은 가장 값싼 은혜가 될 것이고, 따라서 은혜가 아닐 것이다. 새 창조의 실현은 심판의 날, 곧 현재 창조세계 내의 부정적인 모든 것이 부정될 그날을 우회할 수 없다.”(p. 192)

“심판의 주제를 포함하지 않은 채 일을 하나님과의 협력으로 보는 어떤 식의 이해도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새 창조의 가치에 따라 재단해야 하기에, 또한 종말론적 심판에 비추어 그것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p. 193)

“심판의 실재는 인간의 일을 하나님의 새 창조와 긍정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미화가 아님을 분명히 한다.”(p. 194)


“성령이 주시는 재능과 에너지가 성령의 뜻에 반하여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은, 역사 안에서 성령의 겸양에 기인한다. 즉, 성령은 창조세계에 생명을 주심으로써 그 세계가 성령의 이끄심에서 독립적일 수 있는 힘을 부여하신다. 성령은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창조하시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동하는 일은 성령의 뜻에 부합할 수도 있고 반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성령의 능력 안에서 행하는 일은 영광스러운 새 창조를 선행하여 창조세계를 변화시키시는 성령과 협력하는 것이 될 수도, 그것을 망치려고 하는 불경한 영에 부역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p. 195)


* 개인적 소회 - 이 아래에 적어주시면 됩니다.


지성근

루터의 소명의 발견과 강조는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그 위에 서서 일의 윤리, 일의 신학을 추구하는 것은 시대와 사회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당연할 뿐 아니라 신학적 발견과 성숙을 고려할 때 필수적일 것이다. 문제는 아직도 신학적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16세기 종교개혁가들에게서 찾으려는 무능과 게으름을 볼프는 안타까워 하고 있다고 본다. 


볼프는 새창조의 영인 성령안에서 일을 신학적으로 숙고하는 작업, 즉 하나의  집을 짓고 있는데  상당히 주도면밀하게 기초를 놓고 벽돌이 쌓아올리고 있는듯 하다. 모더니즘시대의 일의 철학적 기초가 되는 두인물(아담스미스와 칼 막스)의 일에 대한 관점을 다룬 이후에 기독교의 입장에서 일의 윤리를 넘어서는 일의 신학을 추구하기 위하여 귀납적인 방법론을 넘어서 구성적인 일의 신학의 청사진을 그린다. 이 청사진위에 일의 신학의 기초로서 창조를 넘어 새창조와 성령이라는 중요한 종말론적 개념을 우리에게 풀어내고 있다. 이런 기초놓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기초를 허물어 뜨릴 가능성이 있는 이슈들을 짚고 넘어가고 있는데 이 또한 매우 매력적인다. 루터의 소명이야기, 믿지 않는 이들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주제의 효용성문제, 그리고 타락한 일의 일면,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런 일의 신학이 오용될 가능성에 대한 지적은 흥미롭다. 


 

박주현

같이 읽을 때 너무 정신없이 읽어서 다시 읽으며 정리했는데 참 좋네요. 세번 읽으면 더 좋겠지요?

직업과 부르심은 학교다닐 때나 2000년 초반까지 참 많이 들려지고 말해진 주제였네요. 볼프의 소명적 일에 대한 비평과 성령론적 일의 설명을 읽으며 당시 무언가 모호하고 부족했던 점들이 해소되고 가려부분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성령론적 일 이해해서 성령론? 또한 너무 개인적이고 영적인 부분에만 치우쳐져서 축소되어 배워왔고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상적인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비그리스도인과 사회와 우주적인 영역에서 성령의 임재와 일하심을 깨달아가길 소망합니다. 

볼프의 다소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들려진다면 일상과 일에 있어서 위로와 도전 용기를 얻고 혁명(변혁)의 용사?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한신

비그리스도인의 일과 새 창조와의 관계, 비그리스도인의 일과 성령론적 설명 부분이 잘 정리된 것 같아서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소명으로서 일을 이해하는 전통적 관점에 대해 비판하면서 볼프는 보카티오라는 개념이 단일한 직업적 부르심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직업적 유동성이 많은 현대 사회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원래 보카티오가 영구적이고 일회적이며 단일한 부르심만 의미하는 것인지, 그 부르심이 평생에 걸쳐 다양한 직업과 활동으로 여러 번, 다양하게 주어질 수는 없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또한 새 창조의 보증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일을 하나님과의 협력으로 이끌어 주시고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 그러한 일을 한다는 식으로 볼프의 견해를 이해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새 창조라는 궁극적 목표와 방향에 부합하는 일로 우리를 부르시고(소명), 우리가 개별적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로 행하며, 오직 성령충만함에 의해서만 그러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일할 수 있다는 식으로 기존의 소명관과 조화롭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소명이라는 것이 그저 우리가 처한 상황 그대로 머물라는 식의 현상유지적 이데올로기로 악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새 창조의 빛 아래에서 우리의 직업적 부르심을 이해하고 성령의 은사와 성령충만한 협력적 창조사역으로서 일을 이해한다면, 직업에서의 인간 소외와 불의 및 착취를 거부하고 일의 구조를 변혁하는 모습과도 조화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태선


이하정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으로 환원되지 않은 일은 일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집안일, 화초가꾸기, 아이돌보기, 여러 사회운동과 봉사활동들…얼마전에 이사 관련하여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방이 4개인 집으로 현재로는 이사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돈이 없어서 그렇다는 나의 말에 아들 왈 “ 엄마가 일을 안해서 못가는 거잖아요. 아빠가 그랬어요.” … 나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인데…


 “인간의 모든 일은 일하는 그 사람 안에서 작업하시는 성령 때문에 가능해진다. 또한 그 성격과 결과가 새 창조의 가치를 반영하는 모든 일은 성령의 지도와 영감 아래 이루어진다.”(183쪽)


세상은 내가 하는 일이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내가 하는 여러 가지 일은 성령과 함께 하는 일이며 새 창조의 가치를 위해 나름 작은 일조를 하고 있다고 이미 30년전 볼프가 주장한 사실을 토대로 주장하고 싶다. 

 

부순애

비그리스도인에게도 성령님이 계신다는 주장이 충격적이다


조민주


홍정환

일에 대한 글이나 강의를 부탁 받을 때마다, ‘사장님들이 좋아하실 만한 이야기를 신앙의 이름으로 늘어놓고 있는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마음 한 켠이 늘 찜찜했습니다. 볼프가 구상한 성령론적 일의 신학이 그 찜찜함을 덜어줄 수 있을지 기대하며 계속 읽어가겠습니다.


배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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