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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2021-2기 온라인 2021-2기 수료 안태훈님 피드백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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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 건 조회 919 회
작성일 21-09-09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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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1 “우리를 ReFrame하는 이야기”

1) 강의의 내용 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이전 세대와 다르게 오늘날 우리는 더욱 복잡해지고, 변화 속도가 가속화되며, 자연히 불확실성이 커진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사회에 예수 그리스도로 이룬 구원의 유일성을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은 과연 샬롬의 평안을 주는 진리와 통합의 축으로 작용하도록 전달할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듯이, 다양성을 꿸 바늘이 필요하며, 지속해서 묶을 수 있는 튼튼한 실이 필요합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께서 바늘과 실 역할을 감당해 왔지만, 삶의 지평, 우리의 현장이 너무 복잡해졌습니다. 예수가 없는 듯 하고, 창조주가 피조 세계 밖에 관망자로 존재하는 듯 느껴지는 때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상황도 비슷했을 것이죠. 예수와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소망으로 동행했지만,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죽임당함으로 혼돈에 빠졌고, 다시 부활의 소식을 접하며 혼란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전으로 퇴행할 것인가, 주류의 흐름에 따라 동화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다시 예수인가. 그런 그들 곁에 부활하신 예수가 서셨습니다. 예수의 이야기로 그들의 지평을 넓혀주셨습니다.

2) 어떤 질문이 생겼습니까?

결국 예수의 이야기로 우리의 이야기를 조명하고, 예수의 선택과 가치를 따라가야 함음 여전히 변화없습니다. 정언명제이나, 늘 고민의 종착역은 ‘어떻게’입니다. 각자가 엠마오를 다양하게 걷는 그리스도인에게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임을 어떻게 보여야 할 것인가 고민해 봅니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엠마오는 늘 가치 중립적으로 주어집니다. 동화냐, 퇴행이냐, 재조명되어 새로운 가치 판단 틀을 가질 것인가는 어떤 바늘과 실로 복잡성을 묶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의 이야기는 2천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진리로 길을 안내합니다. 남은 9주, 다시 한 번 예수의 이야기로 구슬들을 보고,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꿰며, 성령의 조명을 따라 지속적인 묵상과 실천하며 다가감의 길을 고민해 보겠습니다.

 

Episode 2 “우리의 문화에 담긴 이야기”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거울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살피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백설공주 속 왕비가 거울에게 묻지 않았다면, 거울에게 질문을 달리했다면 이야기는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비는 유동적인 외모에 집중했고, 불안과 경쟁, 살의를 품었다. 외면이 아닌 내면, 소유와 겉치레가 아닌 존재와 정체에 대한 질문을 가졌다면 어땠을까 싶다.

질문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가질까에 머물게 되면, 경쟁과 불만족, 그리고 불안으로 전철 될 것이다. 나는 누군가에 대한 질문이 반복적으로 이뤄져야 불안을 이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변은 시대정신, 주류의 가치에 따라 각 시대에 정리되어 왔다. 현대사회는 소유와 의식주, 지위와 직업을 통해 규정된다. 그러나 유행 흐름, 소비 패턴에 따라 유동적인 답들은 시대가 바뀌면, 붕괴되고 새로운 규정이 제안되고, 시대를 이끈다. 답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 소유와 능력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 정체성을 가지며 다른 사람을 그 존재 자체로 볼 수 있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스스로 있는 하나님을 지향하는 존재로서 '스스로 존재하기' 위한 바람직한 방법은 무엇인가에 질문을 가져본다. 아담의 타락 후, 굴곡 많은 렌즈로 세상을 보는 우리가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해야 반복적으로, 집중해서 해야할 일에 대해 생각해 본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영원하시기에 그 하나님에 의해 나는 규정된다. 세상의 평가 기준에 따라 소유와 소득, 생산량과 공여도에 따라 나를 규정하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규정하는 사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나는 규정된다. 그리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할 때, 나는 존재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는 시선이 그렇하다면 나 역시 세상과 가족과 이웃과 동료와 모든 사람을 규정하고, 볼 때 동일해야 할 것이다.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니 능력과 소유로 사람을 평하지 말며, 살피라고 권면하신다.

 

Episode 3 “창조와 타락”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익숙한 내용들 중, 낯선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타락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구원하려고 일하고 계십니다." 창조주께서 그 뜻을 저버리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 했던 인류를 향해 창조행위를 여전히 지속하고 계신다. 세상을 구원, 구속하시기 위해, 죄의 값을 치르시고 끌어내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데카르트의 담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처럼, '하나님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의 명제가 다시 오늘을 사는 내게 '창조주께서 일하시고, 예수께서 여전히 구원을 위해 일하시니, 나 역시 나를 비롯한 관계된 이들의 구원을 위해 살아야한다'는 다짐이 유의미하게 다가왔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세상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디스토피아를 향한다. 그러함에도 긍정하라며 유토피아를 꿈꾸게 한다. 하지만 성경은 선한 창조 후,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무질서가 확대되는 엔트로피가 커지는 심판을 향해 간다. 이러한 역사 흐름 속에 염세적이거나 자포적인 심상이 아니라, 성경적 긍정을 심으며, 심판을 바르게 준비하도록 도울 방법은 무엇일까?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예전에 창세기 1장을 주해하다가 하나님의 형상의 특징 중, '다스림'을 묵상한 적이 있다. 상대 위에 군림하여 자기 뜻으로 하명 하듯 다스림을 이해된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는 '돌보다, 보살피다'의 뜻이 담겨 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있는 모든 영역에서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왕과 제사장으로서 정의와 희생을 통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존재한다.'하는 나는 일상과 관계 안에서 정의와 희생을 구현할 방법으로 좀 더 구체화 해봐야겠다.

 

Episode 4 “이스라엘을 부르심”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을 향한 창세기 12장 1-3절의 하나님의 제안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순종했을까? 야곱은 얍복강에서 진심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사람 이스라엘이 되었을까?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한 왕이었나? 아니라고 생각한다. 원래부터 아버지와 가나안 땅으로 가려 했던 기복적 신앙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며 그가 혹할 만한 땅의 것의 풍요를 제시하셨다. 야곱은 철저하게 자기 인생을 설계하며 이해타산을 추구하던 자이다. 다윗은 전형적인 정치적 식견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다만, 그 불완전함을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도구로 쓰셨고, 다듬어 가셨으며,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다. "보잘 것 없는 시대에 보잘 것 없는 세상에 존재 했던 보잘 것 없는 한 집단에 불과했다. 우리처럼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불완전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로 사용하셨다. 나는 지금, 이 곳에서 누구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메신저이며, 내 안에 새겨진 메시지는 정직하며, 하나님의 것인가를 점검하게 된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강의 영상 중, 라숭찬 교수의 어머님 이야기가 내 안에 질문처럼 남는다. "정직한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바꾸신다."는 메시지와 그의 기도하는 어머님의 무릎뼈 이야기. 나는 정말 연약함과 누군가를 위한 간절함으로 매일 2-3시간을 무릎을 꿇어 기도한 적이 있는가? 안도현의 시, 연탄 한 장의 싯구처럼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라고 삶을 회상하지 않도록, 불완전한 나와 주위 사람들을 위해 지금 기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구약을 읽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인 독자를 위한 성인 도서이기 때문이다."라는 존 스택하우스 교수의 구약에 대한 스탠스가 마음에 담긴다. 특별할 것 없던 소수 민족 이스라엘을 특별한 방법과 특별한 편애로 인류를 위해 기다려 주신 하나님이시다. 지금 나를 향한 관점도 그러하실 하나님의 시선을 나 역시 체득하여 다른 누군가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는데도 그 모양이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기에 그나마 이스라엘이다'처럼 곁의 그리스도인을 보는 관점이 은혜 위에 서 있기를 다짐한다.

 

Episode 5 “왕이신 예수”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구주요, 왕과 주인으로 고백하는 자이다. 구원의 주체로서 구주요, 신자의 전요소의 왕이신 주인이 되신다.

구원만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었다면, 굳이 성육신하지 않고, 모두에게 나타나셔서 공중에서 구원을 선포하시는 것이 훨씬 스펙타클하고, 경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구주로서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의 왕이요 주인으로 세상에 주지시키고자 인간이 되셨다. 그 통로가 된 이스라엘의 역사 안으로 들어가 구약성경을 통해 기록되고 약속된 구주로서의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상을 구현하셨다. 전능자가 약속의 말씀에 자신을 제한하고, 십자가의 죽기까지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의 궁극적 모형을 구현하셨다.

그리스도인은 구주요, 주인으로서 예수와 더불어 사는 자이다. 그의 십자가 죽음이 내 죄로 인함이며, 그로 말미암아 그의 부활이 믿는 자의 것이 되어 소망이 된다. 그러하기에 신자의 삶의 모든 영역은 섬김을 받고, 내 몫을 챙기기 위한 장이 아니라, 주인이신 예수의 희생을 복습하며, 실현하는 장이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완전한 인간이 되신 성자 하나님이시다. 자기 능력과 존재를 철저하게 제약하고, 창조주가 피조물 중 하나로 모든 요소에서 다운 사이징 하셨다. 음성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시간과 공간도 제약이 없으셨던 존재가 시간과 공간에 제약 받으며, 피로와 배고픔, 사탄의 유혹까지 받을 만큼 내어주셨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그 분과 사는 것이라고 하는데, 예수처럼 다운사이징되기를 기뻐하고, 무시당하는 현장에서 도리어 가해자를 향한 긍휼의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예수는 율법을 중심으로 묶여 있던 사람들, 목적이 아닌 도구와 노동 착취의 대상이 된 사람들, 경쟁에 내몰리고 자유가 없던 인생들에게 은혜를 선물하며,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자기 인식을 가르치셨다. 경쟁과 학대의 대상이 도구적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또 다른 형상임을 알리시며, 예수 안에 생명을 주시며 바른 인간상을 선포하며 구현하셨다. 내 영역 안에 목격하게 되는 부조리한 노동현장, 인간성이 무시되시고, 사람이 도구가 된 상황에 울분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이 있는지 살피게 된다.

 

Episode 6 “새 하늘과 새 땅”

1) 강의의 내용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의 변화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거부감이 적어질 정도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뀌었다. 성공을 지향하며 예수를 따르던 중, 검거된 예수와 공범으로 취급받는 것이 두려워 부인하고 도망쳤던 제자들이 바뀌었다. 불과 3일에서 40일이라는 시간 동안 말이다. 예수의 부활 사건이 확인되는 순간, 바뀌었다. 그 순간 피상적으로 머리에 담겨 있던 예수의 가르침이 자신들 안에 구현됨을 경험했다. 하늘의 뜻, 예수의 담론 속에 담겨 있던 개념이 자신들의 일상 영역 안에 재해석되고, 적용되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까지 40여일, 세상은 크게 변한 것 없었다. 하지만 그 시공간을 사는 제자들이 다른 존재가 되었다. 새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 안에 새로운 피조물이 된 제자들, 그리고 신자들에 의해 각자의 삶에서 구현되게 된 것이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지 않을까.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눈에 보이는 변화 없는 부조리한 세상 구조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현시성 사이에 믿음을 견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자는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살고 있다는 신앙의 틀을 가진 자이다. 내 안에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교정하신 성령님의 다스림과 아직 주의 재림 때까지 불완전한 세상의 부조리함에는 간극이 있음을 이해하고, 아직 부조리한 일상의 많은 문제 앞에 이미 새롭게 된 신자로서의 내가 사명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나는 세상 부조리함에 대해 하나님의 부재와 원망을 품을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개선이 이뤄질 수 없을지라도 마침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조율하신다는 약속을 기억하고, 믿는 자로 부조리한 것임을 나타내 보여야 할 자이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은 궁극적인 주의 재림 때에 완전하게 구현되겠지만, 오늘을 사는 나의 일상 영역 안에서 수시로 확인되고, 다스림이 구현되어야 한다. 부활의 증인이 되어 다른 존재로 역할을 수행한 제자들이 예수의 부활 증거가 되듯이,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내 언사와 생각, 일터에서의 수고와 투표, 행동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투영해야 한다.

 

Episode 7 “교회와 성령”

1) 강의의 내용 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한국교회는 성령을 사람이 부리는 영, 방언을 주는 은사 전달자, 영롱한 사람인도자에 의해 부어줄 수 있는 도구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령님은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불, 하나님의 바람, 하나님의 물, 하나님의 영이시다. 창조에 함께 하셨고, 인간의 타락 순간을 지켜보셨고, 구약 선지자들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부리는 천사급 영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믿는 자를 주관하며, 하나님의 뜻을 인지하고 따르게 만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 성령님과 연합될 때, 그리스도의 구원을 나로 말미암은 사건이요, 나를 위한 사건으로 고백한다. 하나님의 구원 범위 안에 있으나 구원 밖에 있던 존재가 성령님으로 구원 안에 있게 된다. 또한 성령님의 임재로 팔레스타인 땅에 2,000여년 전 오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며, 성경의 무대 밖에 있던 나를 구원의 무대 위에 서게 하신다. 그리고 이런 객체가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모여 교회가 된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공평하게 임하신 성령님으로 한 백성, 한몸, 한 성전이 된다. 성령님의 사역으로 모이는 교회로서의 공동체로, 흩어져 일상의 영역에서 평화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신자들은 살게 된다. 이는 세상을 멀리하는 뜬 구름의 신앙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 이주민노동자처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이다. 또한 이 모든 일들에 침묵자가 아닌 전하는 자로 구별된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자로 일상을 산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다양한 사회적 관계적 위치 안에서 일하며 구별되게 사는 것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탈레반 정부가 재집권한 아프카니스탄이나 지진피해를 다시 입은 아이티 등에 비하면 군소리 할 것이 없는 이 땅이다. 4세기 이집트 사막의 그리스도인의 기도, 로마제국의 멸망일로에 스위스를 중심으로 선교열정에 비하면, 오늘날의 상황은 나은 것이다. 그러함에도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오늘을 살며 성령님을 통해 가져야 한다는 새로운 일들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미래를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게 된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인도 우화 중, 시각장애인 여섯 명이 각자가 만진 코끼리 부분을 통해 자기가 상상한 코끼리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우화가 있다. 저마다의 촉각으로 상상한 코끼리는 천차 만별이고, 이를 고집스럽게 주장하면 답없다. 하지만 이를 조합하면 완전하지 않지만 코끼리의 모양을 유추할 수 있다. 성령님으로 한 몸된 공동체가 되어 모이는 교회로, 흩어지는 교회로 산다는 것은 각자가 경험한 하나님을 성령님을 통해 공유하고, 상대의 하나님을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기 위해 인내해 가는 여정이라고 여겨진다. 성령님은 그 일을 주장하시며 또 다른 성경의 뒷 이야기를 그리스도인의 일상을 통해 써 가고 계신다.

 

Episode 8 “이방인과 나그네”

1) 강의의 내용 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성도와 교회는 세상 속에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대사관으로 출입관문과 모델하우스로서 양다리 역할을 한다. 부정적 의미로서가 아닌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가교역할을 해야한다. 어려운 것은 세상을 듣고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을 등질 수만 없고, 세상 안에 있는 한 우리는 동화와 동조의 가능성을 안고 살 수 밖에 없다.

세상 속 그리스도인, 맘몬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지향하기가 쉽지 않다. 재림의 때까지 세상은 사탄과 맘몬의 가치가 지배적인 세상, 곧 맘몬과 사탄의 나라일 것이다. 이럴 때 기억할 것은 나그네 된 삶과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 나라를 사는 백성으로의 정체성이다. 광화문 앞 세종로 미국 대사관 영내에서는 미국법이 적용되듯 내 일상의 영역 안에서 세상을 연하여 살지만, 예수의 가치가 지배적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유일한 하나님, 유일한 구원의 길을 축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기독교가 게토화 되지 않고, 대사관으로 세상 속에서 지속 가능하게 존재하기 위해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낮춰야 할, 또는 무너뜨려야 할 진입장벽은 무엇일까? 진리에 대한 타협은 불가하겠지만, 예배의 형태, 교회의 용어와 문화 등 코로나로 급변한 현대사회에 접근이 용이하도록 맞춰야 할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문하게 된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세상으로의 동화냐? 하나님 나라로의 회복이냐? 순간순간의 선택기로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이자 하나님 형상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내 직업과 직장, 관계 안에서 피상적 하나님을 다스림을 구체적 영향력으로 끼쳐야 할 사명을 가진다.

 

Episode 9 “하나님의 대사”

1) 강의의 내용 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바벨론 포로기, 가시적 상황은 절망이고 나라와 주권을 잃은 패망국의 포로민의 처지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공동체가 형성되고, 대단위의 모임보다는 가정과 지인 단위의 모임, 제의적 모임보다는 성경묵상과 돌봄, 기도와 배움의 모임이 생겨났다. 포로귀환과 재건을 위한 준비가 절망의 상황처럼 인지되던 바벨론의 포로되었던 이들 안에서 이뤄졌다.

세상 속 그리스도인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소명과 사명을 발견하고, 일상 영역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일터와 다른 이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넓혀야 한다. 다가감과 소통을 위한 수고와 노력 없이는 복음을 전달할 수 없다.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이런 일련의 수고와 노력, 하나님에 대한 사랑 표현이자 동시에 세상을 사랑하는 가시적 표현이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항상 앞서 일하시며, 상황 가운데 모든 상황을 궁긍적인 선을 이뤄가는 일에 도구로 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성도는, 신자는 그 하나님을 세상에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대사이다. 자기 손해가 기반되어야 할 일이다. 나는 하나님처럼, 예수님처럼 오래 참으며, 내게 유익되는 선택이나 강요가 아닌 그와 우리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선이 되는 선택지를 정직하고 바르게 제시하고 있는가?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대사이다. 이질적인 문화권 안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이해하고, 소명을 따라 사명을 세우고, 교회 안의 언어로서가 아닌 일상 영역 안에서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 익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물과 기름처럼 접하여 있지만 섞이지 못하는 이질적 존재로서 교인이 아니라, 대상의 문화와 언어를 익혀 경계를 허물고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그러했고, 광야에서의 불과 구름기둥 역시 하나님께서 자기 자리를 버리고 인간의 눈높이를 맞춰주신 하나님의 선교이기에 내 자리의 고수가 아닌 그들의 세계 속에 내가 서야 한다.

 

Episode 10 “기쁨이 충만한 삶”

1) 강의의 내용 중 나에게 새로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서양 기독교인들이 잘 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강의 속 존 딕슨 목사의 담론이 마음에 담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기 길 가겠다는 인류를 하나님께서 벌하기 앞서 한 발 물러나 대속의 길을 열어주셨다. 심판에 앞서 피할 길을 열어두시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셨다. 그렇게 성경의 역사는 매번 공멸할 인류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시기 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셨던 하나님의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얻기 위해 져주셨다. 그 절정이 십자가다.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는 일련의 과정 역시 인류를 얻기 위한 하나님의 패배였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한 영혼을 얻기 위한 내 속의 내 것을 내어줌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다.

2) 어떤 질문(의문)이 생겼습니까?

세상 질서와 가치에 타협하지 않고, 복음의 본질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까지 낮추고 져주며, 물러나는 것이 맞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몇 차례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감래할 수 있지만 빈도가 많아지고, 자기 손해의 규모가 커질 때, 어느 선까지 참아야 할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늘 있다. 한 영혼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아내와 자녀들, 직장 동료, 많은 사람들과의 다양한 관계와 상황 안에서 임하려 하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3)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까?

"예수에 대해 세상이 원하는 대로 바꿀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진정한 예수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이다." 다양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다양한 관계와 상황 속에서 복음의 본질을 희석하지 않는 강직과 상대의 상황과 성향에 따라 가변적인 유연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외골수의 고집쟁이가 아닌 복음적 자유를 간직하며 살자. 엠마오 도상에서 만나주시고, 재차 복음을 설명하여 주시며 먹이셨던 예수님처럼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제시할 복음을 선명하게 닦고, 듣기를 즐거워 하기 위해 마음의 귀를 닦으며, 먹기를 즐거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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