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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문화 #8. 설거지와 일상생활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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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6,234 회
작성일 13-09-11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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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문화 / 일상영성과 사물 묵상 / #설거지

<설거지와 일상생활의 영성>

정한신(일상생활사역연구소 기획연구위원)

1. 설거지와 살림의 재발견, 일상영성의 시작 

설거지는 우리가 매일하게 되는 가장 일상적인 행위입니다. 하루라도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금새 지저분하고도 불편한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는 기본적으로 식기에서 더러운 음식물을 닦아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고무장갑과 온갖 세제가 구비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설거지를 기피합니다. 더러운 것들과 악취를 잠시라도 마주하고 견뎌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더럽다고 여기는 이것들이 바로 좀 전에 우리가 입으로 가져간 음식물이라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배설물을 바라보며 더럽다고 느끼는 것도 어쩌면 아이러니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설거지는 더럽고 귀찮은 일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이 기피합니다. 한편, 설거지는 그것을 한다고 해서 칭찬을 받거나 어떤 업적으로 인정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런 측면에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활동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설거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거지를 위한 순번을 정하기도 하고, 게임을 해서 설거지를 벌칙으로 하게 하기도 하며, 심지어 공동체에서 지각한 사람이 설거지를 하게 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설거지는 주부의 몫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만 여전히 설거지는 ‘돈이 되는’ 바깥 일에 비하여 그 중요도가 떨어지는 일, 마지 못해서 하는 일이라는 관념이 사람들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설거지를 가지고 일상생활의 영성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생각을 전환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설거지는 더럽고, 하찮고, 귀찮은 일이며, 덜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설거지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가 갖는 가치를 재발견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소위 ‘집안일’을 ‘살림’이라고 합니다. 살림은 한 집안을 이루어 살아가는 일, 살아가게 하는 일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살림은 살리는 일을 의미합니다. ‘살림’의 반대는 ‘죽임’입니다. 소위 살림이라고 하는 행위들, 청소와 설거지, 밥 짖기와 빨래하기 등은 그야말로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이고 하찮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이런 행위들 없이는 우리는 한시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설거지를 하지 않고 미뤄두면 악취가 나고 벌레가 생기며 식기가 제대로 구비되지 않아 밥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설거지라는 행위는 우리가 살아가도록 해 주는 그야말로 ‘살림’의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설거지는 기피해야 할 하찮은 일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가치를 띤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일상적인 행위, 작고 반복적이며 주목받지 못하지만 사람을 살리는 일에 대하여 그 가치를 깨닫고 행하는 것이 일상영성의 시작입니다. 이런 일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영성에 대한 말을 멋지게 하는 것보다 더 진정성 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2. 설거지와 섬김

이와 같이 설거지는 살림의 행위라는 측면에서 기피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행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설거지는 그 과정이 어렵고 매일하라고 하면 불편한 그런 일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누군가가 나서서 먼저 설거지를 한다고 했을 때 그 모습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섬기는 면이 있음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기 싫은 일을 감당하는 섬김은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3. 설거지와 정화, 준비의 영성 

설거지를 하는 과정을 생각해 보면 더러워진 식기에 세제를 묻히고 이를 닦아낸 뒤 깨끗한 물로 헹궈내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마다, 식기에 무엇인가를 담아내고 사용할 때마다 그 직후에 설거지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식기나 그릇이 제기능에 맞게 사용되기 위해서는 설거지라는 과정이 먼저 있어서 식기나 그릇이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2:21을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개역개정)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곧 망령되고 헛된 말, 진리에 대한 그릇된 태도, 불의 등에서 깨끗하게 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쓰시는 그릇들이요, 설거지를 통해 늘 더러운 것들을 닦아내고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 가운데에서 많이 사용되면 될수록 더럽고 닦아내어야 할 것들이 많아지겠지만 성령충만을 구하며 우리 삶의 주인되신 이가 기뻐 쓰시는 그릇이 되기를 갈망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 이것이 세상 속에 보냄받은 이들의 영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일상과 문화 / 일상영성과 사물묵상>은 부산극동방송에서 매주 금요일 아침 7시-7시5분간 방송되는 <일상과 문화> 코너에서 다룬 이야기를 글로 풀어서 나누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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