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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 12. 시민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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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5,610 회
작성일 16-09-0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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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 자료/ 정리 : 정한신] 


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IVP, 1998


12. 시민의식


  교회와 국가라는 두 정사는 우리의 충성을 가운데 두고 끊임없이 열띤 경쟁을 벌여 왔다. 국가는 교회가 전적인 충성과 지원을 해주어 국가 정책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내기를 참으로 바란다. 또 교회는 국가의 도덕성과 가치관 문제에 영향력을 발휘하여 나라의 문화를 ‘기독교적 원칙’에 입각하여 형성하기를 참으로 바라고 있다.

  이것이 가진 악마적인 측면은, 교회와 국가라는 두 정사가 서로 결탁하면 대립 관계에 있을 때보다 서로에게 더 많은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제도적 분리’와 ‘기능적 상호 작용’이라는 말로 묘사되어 왔다. 제도적으로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어 있다. 국가의 일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입법 과정을 통해 시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교회의 일은 예배와 설교와 성례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또 이웃과 서로 조화롭게 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능적인 면에서 교회와 국가는 상호 작용을 한다. 국가는 종교 다원화 사회에서 중립을 지키고, 교회 관련 기관들이나 사회 기여도가 인정되는 프로그램들에게 (세금 면제나 보조금을 통해) 혜택을 부여함으로써 종교 자유를 보존해 준다. 교회는 중보 기도를 통해,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분위기 형성을 통해, 책임성 있는 시민 의식과 참여 의식을 격려함을 통해 국가 조직을 지지해 준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와 국가 간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일이 너무 흔했다는 사실이다. 두 제도가 소위 ‘시민 종교’라는 모호한 중간 지대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시민 종교


  시민 종교(civil religion)란 교회와 국가의 이익이 서로 겹치는 영역으로서 서로 협조 관계를 맺고 있는 중간 지대이다.

  미합중국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나라라는 생각이 미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면면히 흐르고 있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헌신을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같은 것으로 여기게 될 정도까지 하나님과 국가를 가깝게 연관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나 국가나 모두 큰 소리로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기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의 의무와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의무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국가의 시민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국가를 지지하며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궁극적인 충성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국가의 일에 참여는 하되 국가의 소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 이렇게 자유로운 존재가 될 때만 국가 조직과 구조들 속에서 제사장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성경적 관점


  아마도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역할과 관련해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신약 본문은 로마서 13장일 것이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대부분의 성경학자는 여기서의 바울의 충고를 모든 부분에 적용시키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바울이 목자로서 충고한 내용 중에는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 차원의 것이 많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할 때 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방해보다는 도움이 더 많이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당시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기독교 운동을, 로마 제국을 전복시키고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열심당의 정치 운동과 뚜렷이 차별화시킬 필요도 있었다. 이렇게 바울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정치적 권세에 완전히 순종할 것을 충고한 데는 그럴만한 실제적 이유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목회적 충고였지 신학이 아니다. 반면 바울의 신학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임을 선언한다. 갈라디아서 5:1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로마서 13:1-6은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바울의 목회적 충고로 보아야 하므로 우리는 그 본문을 모든 시기, 모든 장소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신학적 진술로 여겨서는 안 된다. 특히 그 본문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독재나 불의도 그저 견뎌야 하며 양심을 거스르는 전쟁이라도 참여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하나님과 국가에 대한 충성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적들이 그분에게 교묘한 덫을 놓았던 일이 있다(마 22:15-22; 막 12:13-17; 눅 20:20-26).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해 세금 문제를 덫으로 삼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그분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내야 한다고 말씀하심을 통해서, 단순히 세금 문제를 넘어서 모든 정치적 책임을 다 포함시키셨다. 이것은 가이사의 법을 따르는 것, 가이사의 인구조사에 응하는 것, 가이사의 사법 제도를 이용해 민사 분쟁을 해결하는 것 등을 다 포함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이 있노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가이사라도 유대 민족의 전적인 충성을 받을 권한은 없다. 다시 말해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충성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국가에 대한 순종에 우선하는 때가 언제인지를 결정해야 할 책임이 있다. 

  

전쟁


  교회와 국가의 요구가 상호 충돌하는 가장 두드러진 예 중 하나는 국가가 우리에게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구할 때이다. 

  라인홀트 니버는 비폭력주의자였다. 그러나 1932년에 그는 한도를 철저히 지킨다는 조건하에 폭력적 저항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니버는 비폭력주의자들의 입장에 대해서 그들은 폭력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면 죄를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며 비판했다. 니버의 신학적 견해에 따르면, 죄는 보편적이기에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버는 대부분의 비폭력주의자들은 전쟁에서 인간들이 겪는 고통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독재정권하에서 인간들이 겪는 고통은 무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틴 루터 역시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나가야 할 때가 있으며, 또 나가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고 생각했다. “악한 이들을 저지하고 경건한 이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기에,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이나 그분의 대리자들이 요청할 시에는 다른 이들처럼 나가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에 저항하는 독일 개신교 세력의 중심이었던 고백 교회의 대표적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저항 운동에 관여하다가 마침내 아돌프 히틀러 암살 공모에까지 가담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의 글을 통해 그리스도인과 전쟁이라는 문제에 대해 본회퍼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알 수 있다.


  … 원수를 죽이지 않는 것 못지않게 나의 이웃을 보호하는 것 역시 우리가 지켜야 할 사랑의 계명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가장 먼저 지켜야 할 의무라고 말하며 그것을 위해 나의 구체적인 이웃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완전히 뒤틀린 윤리 의식이다. 원수와 이웃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형제를 죽게하거나 원수를 죽게 해야 하는 구체적인 선택의 상황에 직면해 있을 뿐이다. … 나는 극악 무도한 일인 줄 알면서도 무기를 들 것이다. 다른 선택은 할 수가 없다. 나는 내 형제, 내 어머니, 내 [이웃]을 보호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균정성’(均整性, proportionality)이라는 기준이 있다. ‘균정성’이란 소위 정의로운 전쟁(just war)을 가려 주는 시금석 중 하나로서 어떤 전쟁이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 전쟁에 꼭 필요한 만큼의 병력만 동원되어야 하며 또 승리를 위해 지불되는 대가가 그로 인해 얻어지는 이익보다 크지 않아야 한다는 법칙이다.

  전쟁에 대해 성경학자들이 갖고 있는 관점들이 서로 너무도 다르기에, 그리스도인은 무척이나 어려운 처지에 있다. 무저항주의(nonresistance), 비폭력주의(pacifism), 정의로운 전쟁주의(just war), 예방 전쟁주의(preventive war) 등.

  우리는 나름대로의 성경 이해에 입각하여 주어진 전쟁 상황을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난 뒤 각자 입장을 결정하는 수밖에 없다. 전쟁은 우리가 맹목적으로 국가의 뜻을 따라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국가의 악마적 지배를 받을 수 없는 자유인들이기에, 우리에게는 국가의 전쟁 결정을 지지할 수도 있고 반대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다.


핵으로 인한 대참사?


  핵무기 증강 경쟁으로 인해, 인류는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 절멸이라는 가능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핵무기 증강 경쟁에는 핵 전쟁 억제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 있다. 우리에게 상대 편을 전멸시킬 수 있는 충분한 핵무기가 있다면, 절대 상대 편이 먼저 전쟁을 시작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결국 인간들을 해하는 데 사용되지 않은 무기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핵 전쟁은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믿는 데는 충분한 근거가 있다. 

  우리 문명이 살아 남기 위해서는 전 세계적인 핵무기 감축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길 외에는 방법이 없다.

  나는 군비 축소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시민으로서 관여해야 할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믿는다. 

  알란 게이어는 군비 축소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 시민으로서 수행해야 할 긴급한 도덕적 임무 세 가지를 제시한다.

  (1) 실질적인 군축을 점증적으로 실현시키겠다는 정치적 의지를 꾸준히 갖는 일 (2) 왜곡된 선전을 거스르고 극복하기 위해 충분한 지식을 쌓는 일 (3) 안전에 대한 국가와 정부의 정당한 관심을 이해하는 일, 즉 군축이야말로 진정한 안전 증대로 이어질 수 있는 확실한 길임을 이해하는 일.

  “폭격기를 쳐부수어 보습을 만들고 미사일을 녹여 낫을 만들기 위한 이 싸움-하나님이 만드신 무한히 소중한 창조물들의 생존과 건강을 위해 창조 세계의 밭을 갈고 열매를 기르는 일-은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적 신앙의 핵심이다.” (알란 게이어)

  핵 전쟁은 너무도 심각한 문제이다. 극단적 비폭력주의나 극단적 군비 확장주의로는 그 문제는 결코 풀리지 않는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의 중간 지대를 찾아 우리가 함께 협력할 때에만 그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핵무기 증강 경쟁 역시 ‘권세’의 일종이다. 즉,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곧 그 자체의 생명을 가지고 번성하다가 우리가 막지 못하면 결국 끔찍한 재난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국수주의의 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논쟁에 대한 두려움, 우리를 꼼짝 못 하게 만들려는 모든 세력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다면 우리는 핵 전쟁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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