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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영성 1장 육체를 긍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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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윗
댓글 0 건 조회 6,282 회
작성일 08-01-19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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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PNU

2006 8 28일 월요일 부산대 앞 오이코스

정리 : 정한신 협동간사

로드니 클랩의 「사람을 위한 영성」(IVP, 2006)

 

1부 고전적 기독교 영성

 

서론 : 사람을 위한 영성

 

‘영성’의 홍수시대다. 영성이라는 단어는 너무나도 무분별하게 사용되고 있다.

 

기독교 영성

 

영성은 일반적으로 그 앞에 붙는 수식어에 의해 의미가 결정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기독교영성은 무엇인가? 기독교는 다양한 색깔(분파)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분파들이 복음적(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한)이고 보편적(전 세계의 보편적인 교회와 연결된)이며 정통적인(고대의 사도적 예배와 신앙에 뿌리박은) 입장을 유지하는 한 정통 기독교 영성의 공통적 토양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정통 기독교 영성을 정의하다

 

우선 정통 기독교의 관점에서 영성이 아닌 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몸을 거부하는 것은 영성이 아니다. 또한 시간의 영속적 흐름인 역사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영성이 아니다. 그리고 반사회적인 독자적 활동은 영성이 아니다. 즉 사적인 영성, 단지 내면에만 머무는 것은 영성이 아니다.(비육체성, 개인성, 역사의 부정 = 영성이 아닌 것)

정통 기독교 영성은 성령이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교회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삶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spirit-uality)의 생명과 그 정의는 삼위의 한 지체이자 인격이신 성령(Holy Spirit)에서 온다. 요엘은 성령이 모든 육체”, 곧 모든 나라와 계급, 모든 남녀에게 부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기독 교회는 요엘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기름부음 받은 자)를 통해 성취되었다고 고백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물과 피가 흘러나왔듯이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영이 흘러나와 온 세상으로 퍼져 갔다. 성령은 예수님이 육체로 잉태되어 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통치자들과 무정한 부자들을 도전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실 때 관여하셨다. 성령은 십자가와 부활시에 능력으로 행하시고, 오순절 강림 이후 교회의 탄생에도 관여하셨다. 그래서 이제 그 동일한 성령이 산파 역할을 하여 새로운 백성 곧 제3의 종족(순전히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닌 그리스도인)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원이 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충만한 믿음에 이르며, 성령의 능력으로 죽음이 아닌 생명을 향해 열린 길을 분별하는 자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신체적인 몸과 대립하지 않는다. 성령을 통하여 몸이 만들어졌고, 그 가운데 하나의 몸은 이미 부활했다(다른 몸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또한 시간이나 역사와 대립하지 않는다. 성령은 역사를 시작하신 분이며, 계속해서 역사 속에서 활동하고 계신다. 끝으로 기독교 영성은 교회와 대립하지 않는다. 성령은 우리가 교회의 결함을 넘어 그것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고전적인 기독교 영성은 천사의 영성이 아니다. 천사는 몸 없이 영만 가진 존재다. 천사는 시간의 흐름(역사)이 가져다 주는 혼란을 초월한다. 천사는 각기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사의 영성은 홀로 동산을 찾는 은둔의 영성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그 온전한 모습을 회복시키며, 참된 목적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게 하신다. 그런데 이런 일은 몸을 통해서, 역사 안에서 공적인 형태로, 그리고 교회라 불리는 사회를 통해 이뤄진다.

기독교 영성은 천사가 아닌 사람을 위한 것이다. , 전인이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삶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존재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이자 성령의 공적 실체로서 세상에게 그 본래 목적과 유일한 희망인 창조주께 돌아가라고 요구하기 위함이다.

 

: 자기 파괴와 중독

 

기독교 영성의 전통은 인간의 무모한 자기 파괴, 즉 죄에 대해 다룬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가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 자체가 심판이다. 다시 말해서 죄란,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과 피조물 안에서 즐거움과 명예와 생명을 찾으려고 고집함으로써, 우리의 참된 유익을 창조하고 지탱하는 분과 분리되려는 욕구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를 보호하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어느 정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생명의 법에 이끌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 법에 사로잡혀 스스로와 싸우고 있다. 죄의 중독과의 싸움이다.

중독은 무언가 악한 것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 좋은 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다. 그 좋은 것을 전체에 비추어 적절한 위치에 두지 않고 그것이 전부인양 착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피조물도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는 만큼, 중독자의 세계는 그 부분적인 것에 묶인 채 갈수록 위축된다. 그러한 갑갑한 세계에서 해방되려면 그 세계를 깨고 나와야 하나 한동안 두 세계 사이에 있을 수밖에 없다. 즉 참되고 새로운 회복의 길이 보이지만 즐거움과 안전을 제공하는 이전의 중독이 여전히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천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천사들은 죄의 중독을 모른다. 기독교 영성은 인간, 곧 시간의 제약을 받는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동시에 죄인인 우리 같은 남녀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뒤쫓아 오셨고, 성령 안에서 지금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그 회복의 과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현재 누구나 참여하고 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조지 허버트는 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우리는 모두 한 때 길을 잃고 자기를 파괴하던가련한 피조물이었으나, 이제는 성령이 기억하고 다시 찾아온놀라운 기적이 되었다. 우리는이 세계와 은혜의 세계 사이에 끼여 고통당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은 고통당하는 놀라운 존재들을 위한 영성인 셈이다.

 

그 길을 가기 위한 영성

 

기독교 전통은 인간을두 세계에 끼여고통당하는 피조물로 본다. 우리는 천사와 동물 사이에, 죄와 완전한 구원 사이에 끼여 있다. 따라서 영성은 하나의 여정이자 몸부림이다. 기쁨이 있지만 아침마다 죄가 새롭다는 것을 경험하는 싸움이다. 기독교 영성이란 성령이 창조하고 지탱하는 공동체인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고 그 삶에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말에서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몸부림이다. 영성이 형성의 과정이라는 말은 교회와 그 구성원 각자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았고, 교회가 그 바람직한 모습에 이르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우리가 몸을 가진 피조물로서 사회 속에서 그리고 역사 가운데 그 본연의 모습을 따라 살기에 적합한 존재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이런 영성이 주기도문에서 압축되어 표현된다.

 

 

1. 육체를 긍정하다

기독교 영성과 몸의 필연성

 

부패라는 끔찍한 혼돈

 

우리는 끊임없이 신체적 방출물을 내어놓는 존재다. 우리 몸은 계속해서 변하고 방출 현상을 일으킴으로써 우리가 결국 죽을 존재임을 알려 준다.

 

날마다 죽음을 목격하던 시대

 

고대 세계에서는 매일 일상적으로 몸의 취약함과 연약함을 경험하며 죽음을, 삶의 단기성과 불결성을 경험하여야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영성이 처음부터 영혼뿐 아니라 몸의 선함을 주장하는 구체화된 영성이었음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다.

 

몸으로 인한 불안

 

고대의 종교와 철학은 안정되고 영구적인 근원을 찾다보니 몸을 이상화시킬 수 없었다. 이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마찬가지다. 따라서 역사적 상황을 비춰볼 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몸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성적 욕망을 경계하던 행습이 그리 별나다거나 아주 부정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는 어디까지나 몸의 연약함에 대한 믿을 만한 관찰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현대의 세속적 자연주의는 영혼을 깎아내릴 뿐 아니라 인간의 몸을 진화의 부산물로 본다. 그리고 몸은 신체 부위들이 상호 결합된 하나의 기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몸을 채찍질하여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어 보고자 부단히 애쓰고 있다.

정통 기독교는 신체의 연약성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몸을 긍정한다. 고전적 기독교 영성은 몸을 배척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데, 그 이야기와 논리는 창조, 성육신, 부활이라는 세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영혼에 못지않은 몸으로의 창조

 

교회는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선한 하나님의 창조물로 본다. 영혼의 창조처럼 몸의 창조도 가장 높은 자리에 계시는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의 행위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창조세계를선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것이 그 영광의 창조주를 근원으로 삼고 있으며, 그 가운데 어느 것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우리의 인간 본성과 인격 자체는 하나님께 받은 선물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그렇다면 몸은 영혼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적으로는 가장 넓은 차원에서 영혼은 곧 생명이다. 인간의 영혼은 몸에 생기를 줄 뿐만 아니라, 이성적이며 사고와 의지의 근원이 된다. 즉 영혼은 몸에 생명을 부여하고 몸을 지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통적 기독교는 영혼이 몸을 지도한다고 하여 영혼을 영화롭게 높이고 몸을 낮추는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마치 부모가 자식을 낳고 지도한다고 하여 자식이 하찮아지거나 처분 가능한 것으로 격하되지 않는 것과 같다. 기독교 영성에서는 영혼과 몸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므로 양자 없이는 누구도 온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한편 성경에서는 죽음과 부활 사이의 중간기에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분명히 말하지 않으며 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초점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몸의 부활과 몸과 영혼의 재결합에 대한 소망이다. 따라서 인간을 영혼을 가진 몸이요 몸을 가진 영혼이라고 파악하는 것(칼 바르트)이 정확하다. 또한 영혼이 몸에 생기를 주고 몸을 지도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몸도 영혼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영혼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즉 몸은 언제나 의미를 지니고, 잠재력과 기회의 범주를 설정해 주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은 영혼을 형성하는 일과 몸을 길들이고 형성하는 일을 서로 연계시킨다. 우리가 선한 사랑의 창조주로부터 온전하게 몸과 영혼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가 이것이다.

 

성육신과 전인의 구원

 

초대교회가 싸워야 했던 가장 끈질긴 이단은 여러 형태의 영지주의였는데, 그것은 물리적 세계는 약하고 결함이 있어서 (영혼만의) 구원은 바른 지식 즉그노시스’(gnosis)를 섭렵해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다. 최근에 등장한 사상 가운데 의식이 가상 현실이나 정교한 컴퓨터 속으로 도피할 수 있다는 식의 정보(지식) 숭배사상은 현대판 영지주의의 일종이다. 영지주의에 따르면, 죄는 영혼이나 의식이 감옥과 같은 몸 속으로떨어지는것이다. 몸은 순전히고기’로 된 새장에 불과하므로, 그것을 버리면 큰 유익이 따른다.

그러나 고전적 기독교 영성은 사람의 구원에 몸이 결코 배제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영혼뿐 아니라 몸도 구원을 받아야 한다. 더욱이 기독교 영성은 타락이 몸의 문제일 뿐 아니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영혼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특히 원죄는 무엇보다 영혼의 죄이지 신체적 죄가 아니다. 그것은 굶주림(혹은 섹스)과 같은 신체적 속성에 의해 촉발된 죄가 아니라 탐욕과 욕심이라는 영적인 속성으로 인한 죄였다.

전통적 기독교는 타락이 몸과 영혼 모두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한다. 죄는 자기 파괴 및 유한성과 동의어다. 영혼과 몸 중 한쪽의 죽음은 다른 쪽의 죽음과 더불어 오기 때문에 전인의 구원과 치유 없이는 어느 한 부분도 구원받거나 치유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육신으로, 즉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그분 안에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2:9)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몸의 형태를 지닌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으로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죄와 죽음을 대면하고, 그것들을 이기신다. 기독교 영성이 담지한 이야기와 논리에서, 성육신은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서 분리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아담의 실패를 넘어서서 성육신과 재현의 삶, 곧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는 삶을 사심으로써 모든 생명을 부여하고 지탱하고 완성시키는 성령으로 충만한 세계를 이루어가신다.

 

몸의 부활

 

다른 철학과 생활 방식들도 어느 지점까지는 몸의 선함을 긍정하고 있지만, 기독교처럼 몸이 부활한다고 함으로써 죽음의 순간까지 몸을 포기하지 않는 종교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크고 영광스러운 소망은 각 영혼이 몸에서 하늘로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고, 통합된 전인으로서 영원한 삶을 향해 육체로 부활하는 것이다. 부활한 사람은 성령 안에 전적으로 거함으로써 하나님과 재결합된 몸과 영혼이 될 것이다.

부활 이후의 몸은 여전히 몸이되 단지 지상에 속한 몸이 아니다. 그것들은 다함께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과 자유롭고 완전한 교통을 나누며 사는 몸들이다. 그리고 이 성령은 에너지와 자양분의 유일한 근원이요 충만한 생명의 원천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차고 넘치는 교제를 갖고, 그 안에서 생명과 활력과 상호 관계를 누리게 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거류민이 부활할 때, 영적인 육신은 성령의 영에 복종할 것이다. 영적인 육신은 성령 안에서 불타오르는 충만하게 살아있는 인간이 될 것이다.

부활을 반대하는 자들은 몸의 없어지거나 사라지게 된 자들에게 몸과 영혼의 합류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지적한다. 그러나 본래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그 DNA(그리고 그보다 훨씬 많은 것)가 하나님의 기억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신체적인 몸의 씨앗이나 본질적 형태도 완전히 상실되지 않고 나중에 회복될 수 있으며, 영적인 몸 안에서 그 잠재력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핵심

 

정통 기독교 영성이 부활과 영적인 몸의 존재를 주장한다는 사실은 그것이 몸을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몸을 가진 영혼이요 영혼을 가진 몸이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이 있기까지는 고통당하는 존재로 살 것이다. 우리는 중간기에 몸으로 살면서 그 몸이 장차 완전한 영적 능력을 가질 것을 고대할 뿐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한계를 안고 실패를 경험하며 살지 않을 수 없다.

몸은 제대로 길들이지 않으면 온갖 올무와 자기 파멸에 빠질 수 있다. 몸은 커다란 잠재력을 가진 아이와 같아서 가르치지 않고 내버려 두기엔 너무 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 뿐만 아니라 몸도 가진 전인을 훈련하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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