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를 위한 평신도신학:성경적 관점에서 본 소명, 일, 사역 제1부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별이 없는 한 백성 제3장 한 하나님, 한 백성
"성직자나 평신도에 대한 불균형한 개념은 교회에 대한 불균형한 개념에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사실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평신도에 대한 너무 낮은 견해는 성직자에 대한 너무 높은 견해에 기인하고, 성직자에 대한 너무 높은 견해는 교회에 대한 너무 낮은 견해에 기인한다." 죤스토트 평신도 신학에 대한 오해 ①실용적인 반응-평신도를 해방시켜 교회일을 위해 더 많은 일꾼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해 ②평신도층의 폐지를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으로 이해-거대한 반권위주의의 흐름 =>하나님의 온 백성이 주님의 참 사역자이자 하나님의 선교사로 회복되는 것에 대해 뜨거운 열정을 품는 이유는 그것이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1.두 백성인가, 한 백성인가? ①성직주의-'보통' 그리스도인이 특권과 권력을 가진 훈련받고 안수받은 자들에 의해 지배받는 것-평신도에 대한 경멸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함. ②반성직주의-'평신도'에 의한 지매 그리고 안수받은 교회 리더십을 배척하는 것을 뜻함, 교회에 주어진 목사,교사의 은사(엡4:11-12)가 무시됨 ③성직자와 평신도의 공존관계-일반적 현상, 성직자와 평신도가 상호 보완적으로 각각 자기 위치와 기능을 갖고 있는 것, -그러나 공존은 두 백성 곧 교육, 안수, 기능, 심지어는 문화면에서조차 구분되는 두 백성을 내포한다. =>"공동체"만이 백성의 지도자와 나머지 사람들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유일한 성경적 방식, 각 지체가 풍성한 사회적 연합을 도모하는 다양한 기능 가운데 다른 지체에게 기여하는 관계,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바 다양성을 통한 사랑의 하나됨, 이 이미지에 따라 교회(하나님의 백성)가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이미지들 '하나님의 백성''교회''성도''택하신 자''왕같은제사장''하나님의 집''하나님의 이스라엘''그리스도의 몸''주안에서의 성전''하늘의 시민'-이 모든 용어가 공동체적 단어라는 점을 주목하라 교회는 개개 '성도들'의 집합이 아니며, 인간들이 공동체를 이루려고 모인 모임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은유들 포도원지기, 목자, 아버지, 건축가, 머리 은유(교회의 생명이 하나님안에 있음을 묘사) 특히 머리 은유-머리가 무엇을 통해 할 일을 가르쳐 주지 않고 몸전체에 바로 연결됨, 하나님이 궁극적인 구비자이시다. 하나님의 백성의 수평적삶에 대해 은유들이 가르치는 바-하나님 백성의 지체들이 그리스도와 그리소 상호 의존 관계에 있음을 묘사하기 위해 전치사 syn을 사용-개별적인 그리스도인은 없다.
구분의 배후를 살피라 성경적인 평신도 신학을 위해 우리는 3세기 이래 교회를 괴롭혔던 성직자-평신도 문제의 배후로 가서, 하나님이 본래 자기 백성에게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 먼저 삼위일체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다음장에서는 이땅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본래 의도가 무엇인지 숙고하여야 한다.)
2.한 하나님, 세 위격 '라오스'의 정체성은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하나님과 교통하는 백성) 그 소명 역시 하나님과의 교통에서 나온다.
(라오스의)삼위일체적 정체성과 소명 모든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통하여 자신의 사역을 계속하신다. 이 사역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도우려고 '교회에 소속될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여 '아버지와 그 아들과 사귐'을 가질 때 시작되는 것이다. '라오스' 사역은 하나님의 '내부적으로 진행중인' 사역(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 관계 가운데) 차여하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외부적으로 진행중인'(보내는)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백성도 창조적이고(만들기) 회복적인(고치기) 사역과 연합적이고(연결하기) 치유적인(교정하기) 사역을 모두 담당해야 한다.-보통 대위임령(마28:19-20)에 사로잡혀 그것만을 유일한 사역으로 주장하는 복음주의자들은-물론 그 사명이 중요하긴 하지만- 마땅히 도전받아야 한다.
편향된 강조 백성됨과 소명, 리더십에 대한 전문화된 접근
성삼위일체의 하나됨은 차별성을 없애는 동질화된 연합도, 집합적인 연합도 아니다. 정교회는 다양성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하나됨을 송축의 주제로 삼은데 비해, 서뱡교회는 추상적인 하나됨의 개념에서 출발하여 다양성의 가능성을 이성적으로 파악하려고 고심했다. 후자의 노력의 결과는 하나님이 성부, 성자, 성령 셋임에도 불구하고 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접근은 그 정반대로 하나님은 셋이기 때문에 하나이시다고 믿는 것이다.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4세기 갑바도기아 교부들(바질,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하나님의 본질이 관계적, 하나님은 상호 교통으로 하나된 채 차별성 있는 위격의 복수성가운데 존재하신다. 집합주의와 개별주의 둘다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페리코레시스(사호성, 상호교환, 차별성을 없애지 않은 가운데 주고 받음)에 관해 말했다. '페리코레시스 교리는 셋됨을 하나됨으로 축소시키거나 하나됨을 셋됨속에 용해시키지 않으면서, 셋됨과 하나딤을 탁월한 방식으로 함께 연결한다.'(몰트마)
3.교통인가, 합일인가? '라오스'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지체들이 하나님과 그리고 서로 교통하는 것(하나님께 혹은 서로에게 병합되지 않는 가운데)을 의미
다양성을 통한 하나됨 하나됨은 어떤 목적-교회일을 완수해야 할 실제적인 필요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하나됨은 그 자체가 목적이자, 목표요, 사역이다. '라오스'가 된다는 것-공동체적인 동시에 개인적이 된다는 것,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합체되거나 합병되지 않고 상호 소속되고, 서로 생기를 불어넣고, 서로 생명을 부어 주는 데 있다. 평신도-성직자 딜레마와 관련 페리코레시스적 백성이 된다는 것은 위계제가 dqjt는 공동체(비록 역할들은 있는 공동체이긴 하지만)가 되는 것을 뜻한다. =>페리코레시스적 공동체는 위계제 없는 리더십과 풍부한 다양성을 가질 수 있다.
페리코레시스적 교회 ①개별적인 지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신자의 정체성은 개인적인 동시에 집합적 ②사역의 위계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는 어떤 일이 다른 일보다 더 나은 게 없다. 물을 긷는 것, 설거지하는 것과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면에서 마찬가지이다."( 영국의 종교개혁가 윌리엄 틴데일-이말 때문에 이단으로 처형됨) ③하나님의 '라오스'의 모든 지체는 서로에게 속하고, 서로에게 사역하며, 서로를 필요로 하고, 풍성한 하나됨과 전체사역에 기여한다. '라오스'의 정체성과 소명은 삼위 하나님의 백성됨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백성의 사역은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잠재성은 교회와 세상에서 하는 하나님의 온 백성의 소명, 일,사역등에서 드러나야 한다.
평일의 신학을 위한 기도(평일신학의 기도)를 이번 과에 맞추어 만들어 보고 함께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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