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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7-03-12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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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평신도 신학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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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평신도신학:성경적 관점에서 본 소명, 일, 사역
제2부 하나님이 부르시고 구비시키신 백성
제6장 성직주의를 초월한 사역
"나는 자네에게 생업을 계속하라고 충고하고 싶네. 직무를 수행하다 보면 아마 학문적인 신학이 가르쳐 주는 만큼이나 하나님에 관해 배울 수 있을 것이네."(C.S.Lewis)

1.오늘날의 사역(The Ministry)
만약 사역이 잃어버린 자들에게 전도하고 돌아온 자를 세우는 일이라면, 극소수만이 사역을 하는 것이다. 전임사역자외에는 사역이란 것이 여분의 시간에 하는 활동이 되고 마는 셈이다.
현대의 판단기준-①장소에 의해서 일터나 가정이 아닌 교회에서 하는 일②기능에 의해서 무언가 대신해서 하는일③필요에 의해서 세속적인 필요가 아닌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④호칭-목사⑤지명에 의해서-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언급함으로써 그리스도로 인한 섬김이 베풀어졌음을 분명히 하는 것에서 판단하려 함-안수받은 성직자의 역할

2.성경에 나타난 사역
사역은 행위의 모습과 그것을 행하는 위치에 의해서가 아니라 누가 섬김의 대상인가에 의해서 규정된다.
사역은 교회에서 그리고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하는 섬김이다. "종"의 개념을 생각하라
*아바드-일하다 혹은 만들다라는 의미에 나중에 예배하다 라는 의미가 결합된 용어-사람이나 사물 혹은 하나님께 행한 봉사의 총칭, 구약에서 290회 사용된 동사.아담과 하와가 성소-동산에서 그들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왕-제사장이었음
*사랏-통치자와 같은 중요 인물에게 한 개인적인 봉사, 혹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자들 편에서 드리는 예배 사역을 둘다 칭함
*주님의 종(에베드)-사람들을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가 하나님을 위해 사람을 섬기는가?(전자가 성경적, 후자는 현대의 사역의 개념), 부르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전 존재를 다하여 한결같이 섬김을 의미한다.(신10:12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이사야서의 고난받는 종과 모래시계_하나님이 그 자신의 종이 된다? 종되신 예수님에게서 성취된 그림

옛 언약과 새언약의 사역
    
    그리스도안에서 종되신 예수님과 교제 가운데 하나님께 봉사하게 된 모든 자들이      각각 위치해 있다.
    사역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섬김을 위해 의도된 것
    예수님 자신이 모든 구약 성경의 리더십과 섬김을 성취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백성이 전체로서 주님의 종이 된다
    지도자는 다른 종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섬기는 사람일 뿐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봉사
디아코니아-본래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 한 일이란 뜻도 있지만 말씀에 대한 봉사, 실제적인 사랑, 사도적인 활동 음식 준비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이땅에 종을 두시려 했던 하나님의 의도를 사람들이 만족시키지 못하자 하나님이 스스로 종이 되셨다(빌2장)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에게서 말미암으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교회는 사역이다.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영입된 자는 종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담긴 결정적인 요소는 '디아코니아'로서 자신의 삶이 주님의 손에 '고용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예외적이고 선택적인 활동이 아니라 백성됨의 본질의 일부다. 교회가 사역(혹은 사역자/목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사역이다.
바울의 둘로스(노예/종)-그리스도인 종은 먼저 하나님의 종이지 사람들의 종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종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음(고후4:5)
평범한 '디아코니아'와 공식적인 사역을 구별하는 데 사용된 많은 헬라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약저자들은 공식적인 사역자들과 평범한 신자들의 사역을 서로 구별시킬 소지가 있는 용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한결같이 거부함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온 백성, 곧 종되신 그분 안에 있는 종된 백성으로부터 시작해야지, 목사의 특별한 역할에서 시작해서는 안된다. 이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삼위일체적 접근을 취해야 한다.

3. 삼위일체적 사역신학
삼위일체적 기초가 없으면 사역은 대개 신성(the Godhead)의 한 부분의 견지에서 규정된다.
*하나님 안에 사역이 있으며, 하나님은 곧 사역이시다.-페리코레시스-하나님 내부에서 서로 베풀었던 봉사(상호생기교환, 상호침투,내주, 언약적인 충성과 타자 지향). "사역은 예수님의 모범을 보고 의무감이나 존경심 때문에 하게 되는 인간적인 활동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사역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데려가는 그 무엇이다.
*하나님의 온 백성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사역-요한복음 17장 성삼위일체의 모든 자원과 더불어 삼위일체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가정'생활에 참여하는 것,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과 임재 가운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속해서 섬기는 통로는 바로 이 백성이다. 교회의 사역자는 성부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일하시는 예수님, 세상에서 일하는 사역자는 하나님의 전체 백성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사역의 특징은 사랑이다-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그것은 이 세상이 있기도 전부터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에게 사랑안에서 사역하던 하나님의 공동적인 삶에서 나온다.(요17:24) 하나님의 백성의 경우, 사역은 위임된 활동이 아니라 파생적이고 참여적이며 페리코레시스적인 활동이다. 사역이란 하나님이 자기 백성안에서 그리고 그 백성을 통하여 그분의 사랑의 봉사를 계속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상 아마추어의 신분을 가진 자이다. 즉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자이기에, 사랑안에서 섬기는 자이다.
*사역은 성육신을 통하여 창조세계를 축복한다.-예수님을 통한 성부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은 규범이 된다.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게 된 자들은 하나님이 그처럼 사랑하시는 세상속에 참여해야 마땅하다. 그 방법은 성육신적이어야 한다.
*사역은 종말론적이다-사역은 어떤 명령(심지어 대위임령조차도)에 대한 의무감으로 수행하는 인간적인 활동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친히 계속해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교회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시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침공할 것을 전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고 사모하며 살아가고 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목표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 뿐 아니라 모든 창조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 아래 새롭게 되는 것이다.
*요약-"삼위일체적 사역 신학에 의하면, 봉사란 삼위 하나님 상호간의 사랑의 삶이 성령의 능력 주시는 임재 가운데 하나님의 온 백성을 통하여 표출되는 것이다. 삼위일체적 사역은 모인 교회 생활 가운데 다양성을 통한 통일성을 이룩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성육신적 봉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한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성취되고 새하늘과 새 땅에서 창조 세계가 새롭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은 신약성경에서 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주장들로 인해 모두 종된 사역자이다. 그렇다면 지도자들의 사역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나?

4. 사역하는 지도자들
신약 성경이 성직자들에게 별도의 범주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성경 전체에는 하나님의 '라오스'안에 있는 지도자들에 대해 많이 언급되어 있다.(특이한 것은 제사장이란 단어는 2세기말까지는 그리스도와 믿음의 공동체 전체에 한정하여 사용하였다.)
*기능인가 직분인가?-삼위일체적 거룩함과 사랑이 지상에 나타나는 이미지인 공동체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데 지체들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각자의 기능을 함으로써 섬기게 된다. 역할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지만 직분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각 상황과 경우에 걸맞는 다수의 리더십 모델이 있을 뿐이다. (독재방식에 따라 일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형태로 일한다. 그들은 전체를 섬기는 '라오스'의 지체요 사역자인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그 공동체의 바른 질서를 위해, 예수님의 머리 되심 안에서 사람들의 은사를 끌어내고 그들을 양육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지도자들은 성도를 구비시키고 몸을 세우기 위해 필요하다. 하지만 교회가 지도자들로 하여금 사역의 일을 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은 몸의 나머지 지체들로 하여금 교회와 세상에서 그들이 맡은 봉사를 잘 감당하도록 능력을 부여해 주는 조력자들이다.
*다이아몬드만큼이나 단단한 선(토마스 오덴의 주장)-오직 안수받은 사제만이 성찬식을 집행할 수 있고 '사역의 교회적 성격이 사라지게' 된데에는 명백히 비신학적인 이유가 도사리고 있다.
*전문사역으로 부름받은 특별한 소명이라는 것이 있는가?
하나님이 특별한 초자연적인 부름을 주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때로 그런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이것을 교회 리더십의 근거로 요구하는 것은 성경을 넘어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목사후보생은 목회의 선결 요건으로서 '사역으로의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 하지만, 나머지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에서 자기 은사를 발휘하는 데 그런 부르심이 필요없다는 논리는 성경적으로 견지될 수 없는 입장이다. 칼빈의 내적인 은밀한 소명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기 위한 의도였고 루터의 경우도 목사의 직분을 위해 교회로부터 오는 부름이 필요함을 인정하였다.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리더십으로 부름받는 것은 유효한, 섭리적인, 카리스마적인, 마음속의 부르심에 덧붙여서, 교회지도자의 경우에는 교회적인 부르심이 있어야 한다.(교회적인 부르심은 은사의 측면과 성품의 측면에서..)-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그리고 위험천만하게 결여되어 있는 것
*안수-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차별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
존재론적 성직주의 사역관과 순전히 기능주의적인 사역관 사이의 긴장은 교회의 사역, 곧 공동체를 지도하는 섬김을 카리스마적 직분으로 보는 신학적 견해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그것은 그 사역을 공동체가 수락하는 공동체 내부의 교회적 기능으로 보는 것이다.
결론-187페이지를 참조하라

"공동체의 사역은 무엇보다도 먼저 세상속에서 세상을 위하여 수해되기 때문이다. 사역은 그 구성원들의 매일의 삶속에서, 그들이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가운데, '세상적인 일' 속에서 그들이 희생적으로 순종하는 가운데, 사랑으로 이 세상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는 하나님을 위하여 세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들의 사명 가운데 행해지는 것이다."(토마스 길레스피"

평일의 신학을 위한 기도(평일신학의 기도)를 이번 과에 맞추어 만들어 보고 함께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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