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 2. 경쟁 사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한신 작성일 11-06-17 16:12본문
[TGIM 부산대․금정점] / 요약 : 정한신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윌리엄 딜,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IVP, 1998
2. 경쟁사회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경쟁사회에 살고 있다.
스포츠
아마추어든 프로든 스포츠 경쟁은 우리 문화의 중요한 일부이다. 우리는 스포츠 경기에서 이기는 것에 거의 강박적인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런 스포츠 경쟁 속으로 아이들마저 밀어넣고 있다.
스포츠 관람
텔레비전 덕택에, 스포츠는 굉장한 돈벌이가 되었다. 스포츠 방송에 중독이 된 수백만의 사람에게 자기 회사 상품을 광고하고 싶어하는 광고주들이 엄청난 액수의 돈을 내기 때문이다. 역사상 지금처럼 많은 인구가 스포츠 관람에 몰두했던 때는 없었다.
스포츠 관람에서도 우리 문화는 경쟁과 관련하여 변화를 맞이했다.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하지만 지더라도 멋진 패자가 되라”는 정신은 이제 “우승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전부이다!”라는 정신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단지 경기를 이기는 일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넘버 원’이 되는데 가히 강박적인 집착을 보인다. 그리고 넘버 원이 되라는 압력은 수많은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힌다. 성난 관중의 고함소리를 듣는 선수들, 부모의 잔소리에 시달리는 어린 유망주들, 스타를 만들어내기 위해 조작되는 운동 기록, 뇌물과 향응이 난무하는 현실 등등.
또한 경쟁 스포츠는 다양한 모습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의 삶에 지배적 영향력을 끼친다. 스포츠가 우리를 섬기기를 그만두고 오히려 우리를 지배하려 들기 시작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사업
사업과 산업은 둘 다 경쟁이라는 젖을 먹고 자란다. 아담 스미스의 이론에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지지를 보낸다. 경제를 자유롭게 돌아가도록 가만히 놓아두면, 결국 사회 전부에게 이득이 돌아간다는 것이 그의 이론이었다. 그동안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점점 더 증가하긴 했지만, 여전히 자유경쟁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충분한 증거들로 뒷받침되고 있다.
사업 경쟁에서 성공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이용해 번성하는 사업도 있다. 서점과 도서관 서고는 성공적 세일즈맨, 동기 부여가, 관리자, 투자자가 되는 비결을 가르쳐 주겠다는 책으로 가득차 있다. 최근 들어 신앙 서적 중에서도 적극적 사고방식과 ‘성공하는 법’을 다루는 책들이 인기를 누렸다. 주일 아침 텔레비전 설교자들도 성공 지향성 신학을 담은 설교를 한다.
사업에서도 경쟁은 바람직하지 못한 불법 행위를 많이 야기시킨다. 비용을 줄이려고 생산품의 질을 타협해 소비자가 해를 입기도 한다. 생산량을 늘리려고 안전 수칙을 무시하다가 근로자들이 해를 입기도 한다. 매출을 늘리려고 부정직한 광고나 기만적인 포장을 해 소비자를 속이기도 한다. 불법적인 가격 담함이나 뇌물을 사용하기도 한다. 산업 스파이도 문제다. 이런 폐해를 막기 위해, 사회는 여러 가지 해당 법규를 마련해야 했다.
기업 사회는 이기는 즐거움 자체를 위해 경쟁을 벌이는 현상이 어느 때보다도 심하다. 회사에 대한 충성과 복종이 높은 가치로 여겨졌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안전이나 심지어 보수보다도 경쟁에서의 승리가 더 중요한 시대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경쟁에서 승리한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 때 큰 성취감을 느낀다.
물론 지금 우리의 경제 제도를 움직이는 엔진은 바로 자유 경쟁이다. 사업과 산업계의 경쟁을 통해 수없이 많은 이들이 복지가 향상되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다. 경쟁이 우리를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경쟁을 섬기고 있는가?
교육제도
아마 경쟁과 가장 처음 접하는 장소는 학교일 것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경쟁은 더욱 노골적이 된다.
대학의 부정행위는 이미 상당 수준이며 증가추세에 있다. 학생들은 학점 인플레이션, 대학의 과밀화, 가열된 대학원 진학 경쟁, 전문적인 커닝의 만연 등을 이유로 그들의 부정행위를 합리화한다.
경쟁은 학생들 사이에서 위력을 과시하고 있고, 교사들, 교수들 그리고 행정 임원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위력에 떠밀리고 있다.
학교와 대학의 등록 학생 수가 줄면, 교수들의 수도 그에 상응해서 감소하게 된다. 교수들 사이에는 인원 감축에서 살아남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진다. 교수들은 일자리, 학과, 학교 당국에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앉기 위해 서로 격심한 권력 투쟁을 벌인다.
교수들은 더 명예로운 자리로 승진하고, 더 좋은 학교로 초빙받으며, 이름있는 학술지에 글을 싣고, 연구보조비를 타 내기 위해, 종신 재직 자리를 얻기 위해 경쟁을 벌인다.
교육기관들도 서로 경쟁을 벌인다. 일류 학군, 일류 고등학교, 대학의 서열화 등이 그 결과다.
물론 교육 제도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경쟁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적절하게만 이용되면, 경쟁은 탁월성을 촉진시킬 수 있고, 인간의 잠재력을 개발시키는데 도움이 되며, 긍정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경쟁이 없다면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기원 이래로 경쟁은 진지한 활동에 대한 자극제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쟁을 벌이는 방식과 정도, 경쟁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항상 점검해 보아야 한다. 교육 제도 속에서 경쟁은 지금 우리를 섬기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가 경쟁의 노예가 되었는가?
예술
예술의 영역에서도 경쟁은 있다. 경제적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영예로운 상을 타는 것도 중요하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는 시청률이 중요하다. 최고의 보도, 최고의 논설 등을 놓고도 경쟁을 벌인다. 여기서도, 야심 때문에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발생한다. 어떤 형태든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 창작·예술 분야는 전혀 없다.
종교
종교도 성공 신드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교인 수와 헌금 액수가 지역 교회나 교단의 성공을 재는 기본 잣대로 여겨진다. ‘최고’ 목회자란, 사람들을 ‘많이 끌어모으고’ ‘교인들을 즐겁게 하고’ 헌금이 많이 들어오게 만드는 목회자를 이를 때가 많다. 최고 목회자가 되려면, 논쟁적인 문제나 사회적 이슈에 대한 예언적 설교는 피해야 한다. 그런 설교에 사람들의 기분이 상할 수 있고, 그러면 다른 경쟁 교회로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기, 권력, 성공을 향한 경쟁에 있어서 교회 교단들 역시 일반 사업체 못지 않다.
많은 방송 설교자들이 재원을 모으는 일에 대단한 수완가일 뿐 아니라, ‘성공 지향성’ 메시지를 전한다.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여기로 돈을 보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인생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넘버 원 강박증
“인간 활동을 움직이는 모든 힘 중에서 경쟁의 힘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헨리 클레이) 경쟁은 그리스도인들이 상대해야 할 ‘권세들’ 중에 하나이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별의별 분야에서 ‘넘버 원’이 되려는 강박증에 쫓기며 살고 있다. 그 악마적 권세에 포로가 된 것이다.
심지어 이런 넘버 원 강박증에 쫓기며 살고 있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한 사람의 가치를 그의 성취도에 따라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가치 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가치 체계이다.
첨부파일
- [월요일을기다리는사람들]2.경쟁사회.hwp (48.0K)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