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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하나님의 세계 - 제3장 공동체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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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7,942 회
작성일 08-02-28 22:47

본문

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부산대
2006년 7월 3일 / 부산대 법학연구소 / 정리 : 정태준
 
현실, 하나님의 세계
제3장 공동체 안에서 놀이하시는 그리스도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곳에 우리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곳은 또한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아름답고도 위험한 장소는 또한, 신비스럽게도, 그리고 필연적으로 나의 장소, 우리의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곳에 여행 온 사람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보고 경탄하거나, 보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응답하며 살고 있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응답하기를 원하고,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 놀이하시고, 우리는 그 놀이에 동참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창조와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보며, 거기에 우리 가족, 친구, 이웃들과 함께 직접 동참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곧 어려움이 닥치는데 예수님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처럼 이 일에 동참하고 싶어 하는 다른 남녀들이 있으며 우리는 그 회합의 구성원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들 중에는 위락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부류가 많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공동체에 자신을 담그고 공동체를 끌어안지 않고서는 영적인 삶에서 어떠한 성숙도, 예수님 따르는 일에서 어떠한 순종도, 기독교적 삶에서 어떠한 온전성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만으로는 결코 나 자신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놀이하시는 무대는, 우리 문화가 우쭐대며 자랑하는 개인주의가 아니라, 바로 공동체다.
 
▲ 공동체의 동네 탐험하기

   복음은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재정의해주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거룩한 하나님과의 참여적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는 것이다.
   안수를 처음 받고 한 회중의 목사로 부름 받았을 때는, 나는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설교해서 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의 구원을 이루시는지를 알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들로 하여금 도덕적 결정을 내리도록 돕고, 그래서 그들이 깨끗한 양심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그들을 천지를 창조하시고 예수님을 보내사 그들의 죄를 위해 죽게 하신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모으는 것이 내 임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은, 중요한 것은 삶-그들의 삶, 그들의 영혼, 그들의 공동체적 영혼(souls-in-community)-이라는 것이다.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며 정중하게 예배드리면서도 얼마든지 나쁜 삶을 살 수 있다. 무기력한 삶, 개인주의적 자아 안에 갇힌 삶, 지루하고 무미건조하고 시시한 삶을 말이다.
   이때부터 나는 공동체의 한 속성으로서의 ‘거룩’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거룩’이 내 일터, 내 회중, 내가 목사로서 섬기는 그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나는 거룩의 표지들, 거룩의 증거들-거룩한 삶, 거룩한 공동체, 거룩한 영(성령)-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성령으로 형성된 공동체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경과 신학이 말하는 바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상당한 모색 끝에 내가 발견한 시작점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었다.
 
▲ 케리그마 : 예수님의 부활
 
   복음은 우리의 체험을 중요시하긴 하지만, 우리의 체험에서 시작하지는 않는다. 우리의 거룩한 삶은 예기된 것이며, 그 예기의 방식은 다름 아닌 부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다. 거룩한 삶, 즉 기독교가 말하는 혁명은 다름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 부활을 가리키는 말로 ‘케리그마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와 멀리 떨어져 일어난 무엇,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장인 실재를 현존하게 해주는 무엇에 대한 선언이요 선포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들은 각각의 하나의 선포로서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떠맡아 행할 수 없는, 재생산할 수 없는 무엇이다. 이는 우리를 위해 이루어진 무엇이다. 그중에서도 부활이 이야기하는 바는 우리가 자신을 스스로 일으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일으킴을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문화는 북미의 ‘스스로 하기’(Do-it-yourself) 문화, 자립(self-help) 문화에 너무도 깊숙이 물들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쥐고 흔들 수’ 없는 것, 이용할 수 없는 것에도 곧 흥미를 잃어버린다. 부활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운행이다.
   사복음서 저자들은 모두 그들의 예수님 이야기를 그분의 부활 이야기로 종결짓고 있는데 요한은 그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할 만한 무언가를 덧붙이고 있으며, 그것은 부활 공동체의 중요성을 눈여겨보게 한다. 성령을 받을 것에 대한 약속과 그 성취다. 요한복음의 중간 부분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가장 긴 대화인데, 거기서 요한은 우리를 진정시키면서 우리를 부활에 대해 준비시킨다.
   예수님은 떠나실 것이나 성령이 오실 것이다. 성령이 오셔서 그들 안에 계실 것이고,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서 행하신 일들을 성령이 그들 안에서 행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방식으로 성령은 그들의 삶과 일을 예수님의 삶과 일에 일치하게 만드실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그들에게 임재하시는 방식으로, 이제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임재하시는 방식으로, 이제 하나님은 그들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임재하실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 13-17장의 그 대화에서 발견하는 것은 이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성 형성의 방법, 즉 ‘어떻게 해야 하는지(how to do it)를 말씀하시지 않는다. 대신, 그분은 영성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how it is done)를 말씀하신다. 영성 형성이란 근본적으로 성령께서 하시는 일로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형성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우리를 자족적이거나 자율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는다.
 
▲ 위협 : 분파주의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늘 좀 더 쉬운 길, 완화된 공동체, 내 취향에 맞게 축소된 공동체, ““출입 통제가 있는 공동체””를 찾고자 하는 유혹들을 마주하게 된다.
분파란 할 수 있는 한 공동체를 배척하면서 공동체를 자신에 맞도록 재정의한다는 것이다.
분파는 비슷한 종류의 자기주의를 추구하는 이들, 같은 음식을 좋아하고, 같은 우상을 믿고, 같은 게임을 좋아하고, 같은 외부인을 멸시하는 이들이 함께 뭉쳐 자신들의 근본적 자기주의를 강화시키는 남녀들의 집단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임을 자신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서 미리 정의해 버린다. 이는 우리의 개인주의를 가려주는 연막에 불과하다. 실은 우리는 그 공동체를 자신의 제국주의적 자아에 잘 맞는 조건들로 축소시킨다. 교회의 모든 교파마다 분파주의적 충동이 강한 이유는, 분파주의는 우리에게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거나, 또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 자신이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어야 한다거나 하는 어려움을 주지 않으면서도, 우리 모임을 마치 공동체처럼 보이게 해주는 편리한 외양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분파는 사상이든 사람이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들, 자기를 화나게 만드는 것들은 다 제거함으로써, 다시 말해 공동체 축소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는 부활 공동체에 들어가는 대신 종교 클럽을 결성하는 것이다.
   부활 공동체를 어떤 분파로 축소시키려는 시도는 늘 존재하는 위협물이다. 그 역사적인 날 하나님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기도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을 때 의도하신 바는 이런 것이 아니다.
 
▲ 근거본문(1) : 신명기

   기독교적 삶은 개인적인 프로젝트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혼자서는 기독교적 삶을 살 수 없다.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이미 공동체 안에서 살아간다. 성경은 혼자 사는 그리스도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형성되어 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에서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는 책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 형성에 관한 책이다. 모세 오경의 마지막인 이 책은 설교조로 하나님의 약속된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 거룩한 삶을 살라. 창조라는, 구원이라는 혁명을 살아내라. 그리고 이 설교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령.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 이야기
   신명기를 텍스트로 사용한 요시야의 개혁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 후 500년 동안에도 계속 예배와 사랑의 공동체로 남을 수 있도록 (재)형성시켰고, 마침내 훗날 성경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공동체로서 다시 재형성될 때까지 숱한 고난을 헤쳐 나가고 숱한 공격을 이겨 내게 만들었다.
 
○ 모압 평원
   신명기는 하나의 설교-일련의 설교들-다. 신명기는 모압 평원에 서서, 운집한 이스라엘 백성을 앞에 두고 설교하는 모세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설교를 마치면 이제 그는 그 평원의 강단을 떠나 산에 올라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이 설교는 설교가 해야 할 본연의 일을 한다. 즉, 과거에 말해지고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또 듣는 회중의 오래고 인격적인 인간적 경험을 가지고, 그 말씀과 경험을 바로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으로 재생산한다. 설교는 하나님에 대한(about God) 말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from God) 말로 바꾸어 놓는다. 설교는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길에 대해 듣고 읽어 왔던 것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하나님의 좋은 소식에 대한 인격적인 선포로 바꾼다. 이것을 살아라! 바로 지금!
   이뿐만 아니라, 또한 설교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서 언어가 ‘그들’에서 ‘우리’로, ‘그 때 그랬다’에서 ‘지금 그렇다’로 문법적 전환을 하게 하는 주된 수단으로서도 기능해 왔다.
   모압 평원은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약속된 자유의 땅으로 가는 40년에 걸친 긴 여정의 마지막 정거장이다. 지금껏 이스라엘 백성은 공동체로서 많은 것을 경험해 왔고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말씀을 들어왔다. 그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단순히 과거지사로 흘려보내지 않도록 하고 그들의 경험(1-11장)과 계명과 언약에 대한 계시(12-28장) 모두를 현재시제가 되게 한다. 모세는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명령, 하나의 축복의 말로 감싸, 그들을 오늘 순종하고 오늘 믿는 삶으로 발전시킨다(29-34장).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를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을 받아들이는 데 대한 반항, 무응답, 주저함 때문임을 상기시키면서 40년 전 그가 시내 산에서 그들을 출발시키면서 주었던 가지고 다시 시작한다. 바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조건들을 제시하는 ‘열 개의 말씀’이다. 거기에 그는 앞으로 그들 모두의 공동의 초점이 될 한 가지 간단한 신조를 덧붙인다.
- ‘열 개의 말씀’ : 공동체의 조건들
   이 ‘열 개의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유롭고 서로 사랑하며 정의로운 공동체로서 발전하고 번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밝혀 준다. 이 세 가지 형용사-자유로운, 사랑하는, 정의로운-는 공동체의 기본이다.
   공동체는 복잡다단하다. 공동체는 다양한 성격, 사상, 필요, 경험, 은사와 상처, 욕망과 실망, 복과 상실, 지성과 우둔함을 가진 많은 이들이 서로 가깝게, 서로 존중하며,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며 사는 것이다. ‘열 개의 말씀’에 제시되는 조건들은, 이러한 공동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모두 필요한 것이고, 타협 불가능한 것들이다.
   이 ‘열 개의 말씀’은 하나님과 관련된 조건(첫 번째부터 다섯 번째 말씀)과 인간과 관련된 조건(여섯 번째부터 열 번째 말씀)의 두 세트로 배열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이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더 우선적인 일이다. 그러므로 숙고하라. 깨달으라. 상상하라. 껴안으라. 경배하라. 또 공동체를 이루어 살자면 우리는 매일 접하며 사는 사람과의 관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 바르게 명명하라. 존중하라. 귀 기울이라, 공경하라. 받아들이라. 섬기라.
첫 번째 말씀: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신 5:6-7).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는 결코 강제적으로 형성될 수 없다. 누구도 하나님이 구원하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여기 살도록 강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면, 이는 첫 번째 조건이다. 하나님에게 경쟁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즉, 우리에게는 하나님 말고, 우리가 따로 은밀히 의지하는 다른 선택안이 있어서도 안 된다.
두 번째 말씀: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신 5:8-10).
   우상은 신이 아니며, 바로 그렇기에 하나님보다 훨씬 더 우리 취향에 맞는다. 그것들을 우리 맘대로 갖고 노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하여 우리 자신의 신이 되기 위해 하나님적인 것들을 다 빼내어 버린 신이다.
세 번째 말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신 5:11)
   하나님을 그저 다른 이름들과 다를 바 없는 한 이름으로 축소시키면, 결국 모든 이름이 비인격화되며,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 안에 내재해 있는 존엄성이나 위엄과 아무 상관없는, 그저 어떤 것의 기능이나 역할을 말할 뿐인 단순한 부호들이 되고 만다. 공동체로 사는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들 중의 하나는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에 경건하게 유의하는 것이다.
네 번째 말씀: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육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
   공동체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서는 결코 흥왕할 수 없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로 하여금 일주일에 적어도 하루 동안은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준다. 안식일은 우리가 서로에게 하고 있는, 감정적인 혹은 물리적인 목조르기를 풀어 준다. 사랑과 희생의 자발성을 가로막는 그런 온갖 목조르기들을.
   신명기에서의 안식일 준수에 대한 이유가 출애굽기 때와 다르다. 여기서는 안식일 준수가 아주 단순한 정의의 문제라는 말을 듣는다. 공동체 내의 모두에게, 유용성이나 기능이나 지위 등과 아무 상관없이 그저 자기 자신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는 하루가 주어지는 것이다. 심지어 개들과 고양이들에게도 말이다.
다섯 번째 말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왜 부모에 대한 밀씀이 ‘열 열개의 말씀’의 첫 번째 세트에 속하는 것일까? 우리가 맺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들 중 가장 우선적이며 가장 지속적인 관계가 바로 부모와의 관계다. 부모에 대한 불순종과 몰이해의 삶이, 적절한 훈련을 통해 부모를 공경하는 삶으로 발전할 경우,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 역시 그 ‘열 개의 말씀’ 중 첫 네 말씀들에 명령된 방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리의 이해력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우리 길에 간섭하시기로 유명하신 그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가 히브리 공동체 내에서 그렇게 심각하게 취급된 이유다.(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돌로 쳐 죽임을 당했다.)
여섯 번째 말씀: ““살인하지 말지니라””(신 5:17)
   생명은 신성불가침의 것이다. 나의 생명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의 생명도 그렇다.
일곱 번째 말씀: ““간음하지도 말지니라””(신 5:18).
   결혼은 신성불가침의 것이다. 언약을 맺고 함께 사는 두 사람의 친밀성은 성적 강탈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성적 욕망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생명을 허락받지 못한다. 성은, 단순히 사적인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것이다.
여덟 번째 말씀: ““도적질하지도 말지니라””(신 5:19)
   사물은 신성불가침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우리가 각자 책임지고 관리하고 돌봐야 할, 하나님이 우리 공동체에 주신 선물이다. 그것들은 약탈의 대상이 아니다.
아홉 번째 말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도 말지니라””(신 5:20)
   말은 신성불가침의 것이다. 이웃에 대해, 이웃을 향해 사용되는 말들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을 향해 사용되는 말들만큼이나 신성한 것이다. 언어는 공동체의 생혈로서, 만약 혈액 순환계가 탈이 난다면 공동체는 병이 든다.
열 번째 말씀: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도 말지니라””(신 5:21)
   이 마지막 명령은 이전의 모든 명령들처럼 사람의 행위를 표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성향에 대한 말씀이다. 탐심은 앞의 아홉 가지 말씀들 모두를 허물어 뜨릴 수 있는 만큼 교묘하고 은밀하게 해악을 입힌다. 공동체 전체의 주의가 요망되는 일이다.
- ““들으라 이스라엘아”” : 신조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 6:4)
   그들의 신조는 그들을 실재에, 하나님-실재에, 하나님-진리에 계속 묶여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들의 신조는 그들 공동체에 중심을, 중추를 부여해 준 것이다. 한 야웨, 한 분이신 야웨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의 신조는 하나님에 대한 무미건조한 도그마가 아니라, 이는 증언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암송할 때 우리 또한 증인들이 된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가 믿는 것, 우리가 증언하는 것은 또한 즉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5-6).
   이 신조를 살아내는 유일하게 적합한 행위는 사랑이다. 우리 삶 전체는 하나님의 임재와 본질과 명령들로부터 나와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의 신조를 왜곡한 것이며, 거짓을 고백한 것이 된다. 사랑 없이 믿는 것의 결과는 우리가 믿는 대상을, 삶을, 신조 자체를 왜곡하고 파괴한다.
- ‘규례와 법도’ : 삶을 위한 가르침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제시된 이전 가르침들과는 대조적으로, 신명기는 위반 행위들 각각에 대한 보상금 액수를 규정해 주는 시민 법전 같은 내용이 아니다. 신명기의 전체적인 취지는 ““개인의, 특히 보호가 필요한 이들의 보호를 확보해 주려는 것””이다.
 
○ 모세
   창조/구원의 삶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어려움, 실패, 실망, 비통의 조건 아래서-죄와 죽음의 조건들 아래서-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주신 사랑의 자유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성경에서 실패와 비통을 보여주는, 죄와 죽음의 조건들이 어떻게 공동체 일반에, 특별히 하나님 백성 공동체 안에 필연적으로 내재하는가를 보여 주는 특별한 예들 중 하나다. 
  
▲ 근거본문(2) : 누가복음/사도행전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쓴 네 명의 저자들 중에서 오직 누가만이, 다음 세대 사도들과 제자들이 그 이야기를 살아내는 이야기로까지 그것을 계속 확장시킨다. 즉,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재현되는 것이다.
   두 권의 책, 누가복음/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의 삶과 기독 공동체의 삶을 서로 나란히 둔다. 누가의 임무는 두 가지 ‘보냄’, 즉 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을, 풍부한 상술들을 통해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예수님으로 끝나지 않고, 예수님 이야기는 회개하고 믿고 따르는 남녀들의 공동체 안에서 계속된다. 초자연 적인 역사도 그러하고, 하나님의 구원도 그러하다. 계속해서 천명될 뿐 아니라 구체화된다.
 
○ 성령
   누가는 신약 성경의 유일한 이방인 저자로서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유일한 복음서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오직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예수님을 알았던 독특한 경우였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성령이 누가의 사상에서 크게 부각되고 그의 어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된다.
- 예수 수태
   성령에 대한 언급은 사가랴에게 곧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는 가브리엘 천사의 메시지에 처음 등장한다. 여섯 달 후, 마찬가지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 집에 나타나 그녀에게 이제 곧 아기를 갖게 될 것이라고 알려 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그 이후에도 성령에 대한 언급은 계속 이어진다.
- 공동체 수태
   33년의 세월이 흐른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운명적인 유월절이 지난 50일 후, 그리고 그분이 하늘로 승천하신 지 열흘 후, 마침내 성령이 예루살렘의 신자들에게 임하셨다.. 그날, 지금 우리의 이 거룩한 교회 공동체가 수태된 것이다.
   예수님은 성령의 오심에는 능력이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능력은 성경에서 문맥을 따라서만 그 의미를 파악 가능한 단어다. 복음의 모든 것은 인격적이고 관계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몇몇의 예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만일 공동체가 예수 이야기와 동떨어져 능력을 행사한다면, 인격적 관계와 친밀성을 무시한 채 사람이나 일들을 좌지우지 하려 한다면, 이는 분명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는 마귀의 일이다.
 
○ 기도
   성령이 예수님의 삶과 예수 공동체의 삶 사이의 연속성이 유지되게 하는 방식이라면, 기도는 공동체가 그러한 현존과 일하심과 말씀하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참여하는 주된 방식이다. 기도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주의 깊게 현존하는 방식이다.
- 다섯 기도
‘피아트 미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눅 1:38)
   마리아의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기도가 먼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실 때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이에 대한 응답이 우리 기도다.
‘마그니피카트’: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6-55)
   여기서 마리아의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수태케 하실 때는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방식에 세 가지 거대한 역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눅 1:51-53). 마리아의 기도는 성취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라는 그 거대하고 광활한 세상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베네딕투스’: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눅 1:68-79)
   사가랴의 이 기도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행하시기 위해 사용해 오신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사용하실 사람들의 무리 속으로 우리를 받아들인다. 기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 주위로 둘러 모이는 그 다세대적 대화들 속으로 인도해 준다.
‘글로이아 인 엑첼시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평화로다.”” (눅 2:14)
   천사들의 기도는 사가랴의 ‘베네딕투스’처럼 우리를 ‘성도의 교제'속으로 들여 놓을 뿐 아니라, 나아가 우리를 ““수많은 천군”” 속에 들어가게 해준다. 우리 기도는 우리가 하는 일들이 하찮은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를 하늘을 이루는 모든 멜로디와 화음을 표현하는 찬양대원으로 만들어 준다.
‘눈크 디미티스’: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 2:29-32)
   시am온의 이 기도는 완성의 기도다. 마리아와 시므온, 각각 첫 번째 기도자와 마지막 기도자로서 서로를 보완하는 한 쌍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시작하는 어린 소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마치는 노인.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기도의 시작일 뿐 아니라, 기도의 문법과 어휘를 제공하며, 모든 기도를 온전함으로, 완성으로 이끈다.
- 기도 이야기
   누가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의 본질과 필요성을 가르치실 때 사용하신 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서, 이웃과 과부와 죄인의 기도들에 대한 이야기다.
   간청하는 이웃 이야기(눅 11:5-13)는 기도를 우리의 자연스런 일상 속으로 엮어 넣는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우리 이웃과의 관계처럼 예측 불가하고, 비계획적이며, 예행연습이 없는 것이다.
   청원하는 과부 이야기(눅 18:1-8)는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하고 영향력 없는 이들에게 우리 사회의 힘 있고 이름 있는 이들과 동등한 정당성과 지위를 부여하는 이야기다. 과부와 같이 오랫동안 무시당하고, 거절당하고, ‘보류’되는 데 익숙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네 말에 귀 기울이신다는 사실에 익숙해져라.
   세 번째 이야기(눅18:9-14)에서, 죄인의 기도는 최저 심층부까지 내려간다. 기도의 근본적인 필수조건은 자신의 곤궁에 대한 절박감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어떻게 해주실 수 있다는 절실함이 바로 그것이다. 기도는 긴박한 것이며,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기도의 문에 늘 웅크리고 있는 큰 유혹은 기도를 하나님을 피하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 하나님과의 관계를 피하기 위해 하나님과 관련된 언어를 사용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숨는 막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기도 아닌 기도들은 보통 상투적인 말들에서 탄로 난다.
- 기도하는 공동체
   기도. 공동체의 공통어는 기도다(행 2:42). 사도행전 이야기 전체에 걸쳐 기도의 언어는 그 예수 공동체에 빈번하고도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지시받거나, 기도의 모범을 제시받은 것도 아니다. 기도는 그 공동체의 너무나 자연스럽고 비자의식적인 언어다.
 
○ 소외된 이들
   예수님과 예수 공동체에 대한 누가의 통합적인 서사가 보여주는 또 다른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는 배척당하는 이들-주변인들, 내쳐진 이들, 초대받지 못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것을 무척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쓰기까지, 아마도 누가는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의 고결함과 거룩함을 수호하겠다는 이들에 의해 예수 공동체에서 배척당하는 경험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환대가 넘치는 곳이어야 할 부활 공동체가 사람들을 잔인하게 냉대하는 곳으로 돌변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또 지속적으로 일어나는지를 목도했던 것이다.
   자신의 복음서에서 누가는 당시 사회에서 전형적으로 배척당한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와 그 공동체의 문을 활짝 열어 주는 예수 이야기 세 가지를 연속적으로 들려준다. 이 세 이야기는 모두 환대 뒤에 숨어 있을 때가 많은 냉대를 폭로하는 이야기들이다.
   예수님은, 전에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하셨던 이사야 본문의 표현들로 당시 전형적으로 소외되던 이들을 지칭하신다.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눅 14:13과 14:21). 누가는 자신의 이야기들에 사마리아인, 문둥병자[기타 의식(儀式)적으로 부정한 병을 가진 이들], 미움 받는 세리, 이방인 그리고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시킨다.  
 
○ 재판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모두 재판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데, 이 재판들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공동체가 세상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 또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해주는 일차적 자료를 제공한다.
   재판받으시는 예수님, 재판받는 바울. 이 두 재판에서 놀라운 점은 예수님도 바울도 그 ‘권력자들’에게 그다지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바르고 순종적으로 살아가는 기독 공동체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세상의 경탄과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 공동체를 이어가고 있다고 자임하는 우리가, 만일 지금 우리 사회나 문화와 아무 갈등 없이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면, 어떻게 우리는 예수님과 예수 공동체가 해 내지 못한 일을 그렇게 잘 해 내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중요성은 결코 수에 달려 있지 않다. 교회의 메시지는 좀처럼 (사실, 거의 전혀) 힘 있고 권력 있는 이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왔다. 물론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정치적으로 놓은 지위에 있고 사회적으로 유명 인사인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지위와 위치는 하나님 나라의 견지에서는 전혀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지 못한다. 이것은 성경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아무 근거 없는 생각일 뿐이다.
- 재판받으시는 예수님 &  재판받는 바울
    각각의 재판 때마다 헤롯 가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예수님의 재판 때는 헤롯 안티파스가, 바울의 재판 때는 헤롯 아그립바 2세가. 비록 그 재판들에서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하는 단역들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우리에게 깊은 생각거리를 던져 준다. 즉, 그 예수 공동체는 세상(the World)에 대해 놀라우리만치 무관심했다는 점이다. 헤롯은 세상의 헛됨, 때로 우리가 ‘세속성’이라 일컫는 것, 즉 지위와 권력, 화려함, 방종, ‘세상에서 잘나가다’라는 말에 담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나타내는 본보기였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후 예수 공동체가 이런 헤롯 같은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쓸 때가 많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인정을 받고, 그들을 동지로 삼고, 그들의 영향력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겠다며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바울은 그들에게 매혹되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초연한 무관심이었다. 그들에게서는 그런 유력한 이들에게 아부하는 태도나, 우리가 흔히 갖는, ““와, 이 얼마나 중요한 기회인가! 이 기회를 잘 활용하자.……이들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이니까”” 같은 태도를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은 사실상 그들을 무시하신다. 바울은 성실히 자기 변호를 하지만 그들에게 순응하거나 그들의 환심을 사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미혹하는 곳이다. 일단 우리가 세상의 관심사들에 영합하고, 세상의 호기심들에 호소하고, 세상의 관용어와 문법에 따라 말하고, 세상이 제시하는 현실 적합성 기준을 수용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가야 할 근본적인 방향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없이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예수님과 바울은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the road less traveled)을 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십자가 처형, 바울의 경우에는 투옥과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그런 길을 말이다.  
 
○ 아콜루토스_‘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unhindered), 행 28:31, 표새)
   누가복음/사도행전은 평온한 어조로 끝난다. 로마에 가택 연금된 바울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아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로 마친다. 이 때 마지막 문장이 종결될 때 사용되는 단어가 ‘아콜루토스’였다. 어쩌면 ‘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라는 말은, 성령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형성해 가시는 수단이 무엇인지를 말하기 위해 누가가 신중히 선택한 단어였던 것은 아닐까?
   지금 바울은 갖혀 있고, 로마의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일도 실패할 것이다. 게다가 얼마 후면 그 도시에 그리스도인들은 난폭한 네로의 손에 대대적인 순교를 당할 것이었고, 바울도 그렇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방해 없이””라니?
   누가가 단어 선택에 얼마나 신중한 사람인지를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가 이 단어를 상당히 의도적으로 썼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바울 그리고 예수 공동체 이야기를 쓰는 누가, 두 사람은 예수님의 방식, 성령의 방식, 십자가의 방식, 부활의 방식에 대해 많은 실습을 거쳐 왔고, 그렇기에 이제 하나님의 일이 어떤 식으로 되는지를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 이런 ‘복음’과 ‘행전’이야기를 몸소 살아 온 그들, 기도하며 순종하며 거기에 동참해 온 그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마침 단어로서 꼭 맞는 말임을 알았던 것이다.
   창조와 구원에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해 오셨고 또 하고 계신지를 배웠다면, 이제 기독교적 삶에서 남은 가장 어려운 일이지 가장 중요한 일은 이것이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도 기꺼이 동참해야 한다.
   ““아무런 방해 없이””란 정확한 말이다. 이는, 세례 받지 않은 상상력에게는 크게 다가오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들도 하나님 나라의 일에서는 전혀 중요한 것들이 못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부활, 곧 예수님을 현재화하는 성령의 활동에 의해 수단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 ““아무런 방해 없이””는 누가가 바울과 예수 공동체의 성격을 최종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사용한 놀랍고 기억해 둘 만한 단어다. 그리고 이는 예수님의 일을 세상적인 수단으로 하려는 유혹을 받고 있는 오늘의 예수 공동체가 특히 주목해야 할 단어다. 아무런 방해 없이-자족하며 긴장 풀기, 예수 생명을 예수 방식으로 살아내는 일에 훈련되고 분별력을 갖추기, 부활 실재와 우리가 그것을 증거하고 그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수단들이 일치되게 하기.

▲ 공동체 안에서 주 경외함 기르기: 세례와 사랑

   기독교적 삶은 예수 부활의 삶, 성령께서 이루시는 삶이다. 그러나 창조와 역사의 장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 공동체라는 장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셨고 또 하고 계신 일에 ‘동참’하지 못하고 거기에 부적절한 응답을 하게 될 때가 참으로 많다. 하나님이 이미 하고 계신 일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무시하고 회피하거나 방해할 때가 많은 것이다.
   우리가 세례 받은 평범한 성도들이 아니라 예수님 나라 사역을 위해 훨씬 더 잠재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모아 나름의 모임을 꾸릴 때, 우리는 예수 공동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어떤 비전을 갖고 신속하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 정력적이고 재능 있는 지도자들을 뽑는다. 우리는 성경의 말씀과 아무 상관없이 사역자의 직무 내용 설명서를 작성하고 그에 따라 후보자를 찾는다. 우리가 공동체에서 구경꾼 자리를 자처할 때, 우리는 예수 공동체를 회피하는 것이다. 우리가 공동체를 자기 식으로 움직이려 할 때, 우리는 성령께서 창조하신 이 공동체를 방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옳은 일을 잘못된 방식으로 해서 망치고 만다.
   이러한 무시와 회피와 방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세례 받은 이들로 하여금 성령의 인도를 받는 참여적 삶을 사는 것을 가로막는 지속적인 주요 장애물이다.
 
○ 세례
   공동체 안에서 주 경외함을 기르기 위한 핵심적 실천은, 사랑의 실천을 통한 성숙한 형성을 가져오는 세례다.
   세례는 우리 각자의 우일무이하고 인격적인 이름을 성부, 선자, 성령의 삼위일체와 결정적으로 관계 맺어 준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듯 부활 생명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기도 전에, 또 무슨 일을 했는지와 무관하게 우리에게 그저 선물로 주어지는 것으로서, 이 생명에 의해 우리는 참된 우리가 된다.
   우리가 부활 공동체에 들어가는 순간, 이제 우리 삶은 거룩한 세례를 통해 삼위일체의 견지에서 재규정된다. 세례는 죽음이자 동시에 부활이며, 포기이자 동시에 포용이다. 세례 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the Name)-성부, 성자, 성령-과 함께 이름 불리게 되며,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 삶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녀로서 폭넓게 공동체 안에서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삶의 방향을 전환하여, 더 이상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의 지체로서 살게 된다.
- 삼위일체 : 그 이름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활 공동체로 사는 삶을 위한 필수적인 개념적 토대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특징이 세 가지가 있는데, 먼저, 세 위격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다는 것은, 우리의 핵심 정체성은 그분의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무엇보다 인격적(personal)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또, 아버지 하나님, 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온전한 참여자로 환영받는다는 의미다. 또,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훨씬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어떤 신비 속으로 세례 받아 들어가는 것이다.
- 삼위일체 : 이름 부르기
   세례는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 기본이 된다. 세례시 우리는 ““……의 이름으로……”” 이름이 불려진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며,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특히 혼란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용하다. 지금 우리 시대가 분명 이런 혼란의 시대다. 이러한 시대 속에서 삼위일체는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들과 계속 맞닿아 있게 해주는 가장 실질적인 신학 교리다. 즉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엄청난 광대하심에, 또 동시에 하나님의 친밀한 인격성에 늘 맞닿아 있게 해준다.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은, 우리를 작고 궁색한 존재로 만들기 위해 마귀가 온갖 전략을 다 쓰는 이 시대에 우리 삶을 크고도 인격적으로 유지해 주는 필수적인 일이다.
   부활 공동체 안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세례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길이 되어주는 두 가지 명령이 있다. 둘 다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으나, 따라 살기 위해서는 평생에 걸친 주의와 훈련이 필요한 명령들이다. 바로 ‘회개하라’와 ‘따르라’는 명령이다. 세 번째 명령인 ‘기도하라’는 그 둘을 결합하고 내면화한다.
   회개하라는 세례받은 삶의 ‘아니오’이다. 그것은 행동에 대한 말이다. 방향을 바꾸라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잘못된 길을 가고 있고,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으며, 그릇된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 안의 삶을 시작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지금껏 우리가 하고 있던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삶에 무언가를 더함으로써가 아니라, 광란적인 자아 중심적인 삶을 버림으로써 부활의 삶을 시작한다.
   그리고 따르라. 예수님을 따르라. 따르라는 세례시 ‘아니오’ 뒤에 나오는 ‘예’이다. 우리는 주도권을 주장하기를 단념하고 대신 순종하기로 결정한다. 우리는 시끄러운 자기 주장을 단념하고 조용히 듣는 편을 택한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며,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고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 하나님께 반응하는 삶으로 들어가게 된다. 바로, 기도의 삶이다.
   기도는 세례받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학습되고 말해지는 세례의 언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우리 안으로 들어와 내면화되고, 우리 근육과 신경에 자리잡는다. 즉 기도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반응은 언제나 물리적인 것, 즉 뒤따름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 우리는 모든 것이 주의 깊음과 찬미, 희생과 환대(친교), 순종과 사랑인 삼위일체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 사랑
세례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놀이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부활 정체성을 갖도록 해주는 핵심 실천이라면, 사랑은 그 정체성에 어울리는 삶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명명해 준다. 세례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를 형성시킨다. 그러나 이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골라 쓸 수 있는 카탈로그의 상품이 아니라. 이는 삼위일체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고 요약하는 삶의 방식이다. 세례/사랑은 공동체 안에서 주 경외함을 길러 주는 핵심 실천이다.
그러나 ‘사랑’은 가장 파악하기 힘든 말들 중 하나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 어떤 다른 인간 경험에서도 우리는 사랑에서처럼 그렇게 자주 실패하고, 그렇게 심하게 상처 입고, 그렇게 심하게 고통 받고, 그렇게 잔인하게 기만당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랑을 계속 고대하며, 사랑을 꿈꾸며, 사랑을 시도한다. 따라서 서로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그분이 우리 모두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말할 책임이 있는 우리 기독 공동체는, 그리고 사랑의 삶에 대해 지도와 가르침을 줄 책임이 있는 우리는, 이 사명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이보다 더 힘겹고, 더 불가능해 보이는 임무를 상상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러나 우리 삶의 방식에 이것이 갖는 엄청난 중요성을 생각할 때, 여기에 대해 우리가 바른 생각을 갖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사랑이라는 말의 참 의미들을 바르게 분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모든 대화에 주의 깊게 귀기울이며, 모든 책을 신중히 읽을 필요가 있다.

기독 공동체에서 사랑이 얼마나 어렵고, 그러나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요한의 첫 번재 서신서를 안내서로 삼아 살펴볼 것이다.
- 사랑의 정체성 세우기
   가끔은 영광스러운 예외들도 있지만, 모든 기독 공동체는 공동체이며, 사랑의 삶에서 다양한 발전 단계에 있는 세례 받은 죄인들의 모임이다.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는, 평생에 걸쳐 우리가 사랑받는 자들의 공동체로 형성되어 가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하는 백성으로 형성되어 가기 위해서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굳이 사랑하려고 애쓰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 안에서 창조하셨고, 사랑의 행위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으며,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이다.
   예수 공동체의 주된 임무들 중의 하나는 모든 번잡한 가족, 이웃, 회중, 사역 가운데서 사랑이 평생에 걸쳐 지속적으로 길러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사랑은 복잡하고, 힘들고, 영광스럽고, 지극히 인간적이며, 또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은 결코 완성품이 아니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이것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언제나 신념이나 행위로 새로운 기초를 삼으라는 유혹을 받게 되지만, 이 때 반드시 기억할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주시고 성령이 형성하시는 우리의 정체성, 즉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은 사랑받는 존재로서의 우리 정체성의 중심은 다름 아니라 관계적 개별성과 인격적 친밀성이기 때문이다.
  
- 사랑의 해체
죄.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 죄인들이다. 이것을 인정하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길러주는 참된 실천들을 해나가야 한다. 우리를 사랑하도록 자유롭게 해주며, 그 자유 안에서 우리에게 사랑을 명령해 주는 것은 죄의 용서이다. 귀 기울이는 우정이다. 자비로운 이해이다. 프로그램들이 아니다.
   죄의 본질은 상대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는 빈번히 자신에게 죄가 없다고, 자신은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는 삶을 훨씬 단순하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관계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죄는 어떤 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죄는 인격적 관계의 문제인 것이다.
   죄 문제 다루기를 거부하는 것은 관계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최고의 관계적 행위이며 최고의 탈관계적 행위이다.
   요한이 죄를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키는 것은, 그는 사랑을 중요한 문제로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관념으로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인격들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 그리고 정한신, 이소영, 김혜련, 정태준이라는 구체적 인격들.
   그런데 우리는 공동체를 개선할 때, 죄 문제에서부터 출발하는 겨우는 거의 드물다. 대신 우리는 무지를 해결하기 위한 학교를, 나약함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를,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킬 돈을 벌어 주는 비즈니스를 의지한다. 부활 공동체도 주변 세상을 본받아, 무지를 쫓는 배움을 추구하거나, 힘없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추구하거나, 더욱 만족스런 삶을 살도록 해주는 돈을 추구하는 일 등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할 때가 꽤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요한은, 우리는 죄라는 거대한 현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부인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깨끗하게 하다……사하다……화목 제물……. 공동체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때 비로소 서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우리가 교육이나 정부나 비즈니스를 통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셨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는 토대, 유일한 토대다.
   죄에 대한 부인, 그리고 여기에 뒤따르는, 죄 문제에 대해 소홀하거나 무관심한 삶의 방식을 양산하는 프로그램이나 전략들은 너무 흔해서 이름이 따로 하나 있을 정도다. 바로 완전주의(perfectionism)라는 것이다. 이는 부활 공동체에서 가장 치명적인 죄들 중 하나다. 이것이 치명적인 이유는, 이런 방식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조금만 더 열심히 애쓰고 올바른 원리나 기술을 발견하기만 하면 죄 없이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 없이 산다는 것은 실은 불가능하기에(바울과 요한만 해도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한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 죄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거나, 아무 죄 없어 보이는 겉모습을 꾸민다. 또 이것이 치명적인 이유는, 이는 개인적인 죄에 대한 인식을 마비시키고, 예수님의 근본적이고 핵심적 사역인 십자가 위에서의 용서, 즉 화목제라는 그 미증유의 기적 사건에 대한 인식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완전주의자가 일 중독자가 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그들 중에는 대단한 프로젝트를 성취하고 놀라운 업적을 이뤄내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친구도, 어떤 경우 가정도, 용서도(필요로 해 본 적이 없기에), 사랑도 없는 삶을 살고 만다. 이 완전주의가 공동체 전체에 전염된다면 이는 참으로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 낸다.
   기독교의 방식은 공동체 안에서 죄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죄 없는 사람들이 되지 않는다. 죄에 대한 유일하게 건전한 접근법은 사랑에 의해 움직이는 용서다. 고백되고 용서된 죄는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그리고 서로와 사랑의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해준다.
   이렇게 사랑받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이루게 되면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바로 부주의하게든 고의적으로든, 죄 짓는 일을 습관처럼 계속 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 요한 목사가 지금 예수님에게서 인성을 제거하고, 그분의 인성을 완전히 부인하고, 그분을 순전히 신적인 존재로만 말하는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요 1:14)는 것을 부인한다. 이 성육신, 즉 하나님이 육신이 되었음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진수요 중심 특징임에도 말이다. 예수님이 이렇게 탈인간화 되는 순간, 사랑받는 이들의 공동체는 곤경에 처하고 만다. 그러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 속의 사람들과 아무 관계없는 사랑의 실천을 계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요한은 마지막에 돌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낸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왜 그렇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우상이란 완전히 하나님이 제거된 신이기 때문이다. 우상은 탈인격화된 하나님, 탈관계화된 하나님이다. 우리가 사랑을 주고받으며, 그 안에서 부족하게나마 우리의 인간미를 최대한 꽃피워 살아가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이용하고 써먹고 공상할 뿐인 신이다. 우상은 하나님/피조물의 관계를 뒤집는다. 내가 신이 되고 우상이 피조물이 된다.
- 사랑의 공동체
    크게 볼 때, 기독교적 사랑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이 사랑은 명령된다는 데 있다. 촉구되거나, 장려되거나, 목표로서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은 명령된다.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는 오직 자유 가운데서만 흥왕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 공동의 삶을 정의하는 사랑은, 비록 명령된 것이지만, 비강제적이고, 인격적이고, 공동체의 지체들이 자유롭게 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평생에 걸쳐 사랑의 행위를 축적해 가야 한다. 나 자신을 극복하는 사랑을 충성스럽게 말이다.
   세례를 받은 후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세례받은 이들의 공동체가 그저 우리 같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이는 사랑받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삶을 사는 일에 늘 따른 어려움이다. 우리는 여기에 익숙해져야 한다.
   요한이 하는 한 가지 다른 일은 사랑에 대해 설명이나 정의나 일반화를 하는 대신, 그저 어떤 이름과 이야기, 즉 예수님을 제시해 주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우리 각자로 하여금 사랑을 행하는 예수님의 방식을, 우리 각자만의 특수한, 그러나 인격적이며 관계적인 방식을 찾게끔 만든다. 우리는 사랑받음으로써 사랑받는 법을 배운다.
   요한은 처음에는 ‘사랑’을 이렇게 말했다가, 뒤집어서 다시 말했다가, 시제를 바꾸어 말했다가, 부정문으로 말했다가 긍정문으로 말했다가, 또 다시 부정문으로 말한다. 그는 우리 경험에 호소하고, 복음서들을 암시하며 우리 기억을 새롭게 해주며, 이 모두에서 예수님의 현존하는 권위를 주장하며,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 ‘거짓말쟁이’, ‘살인자’, ‘미움’, ‘적그리스도’ 같은 말들을 던진다. 그러나 이 모든 문장이 말하는 바는 결국 하나다. - 하나님은 당신을 살아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사랑이 어떻게 일하는지를 당신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이제 당신도 사랑한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 그것을 행하라.

<일상생활의 영성을 위한 기도문을 작성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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