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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하이벨스 등, 크고자 하면 내려가야 합니다, 헌신(4-5장) > TGIM 자료실

빌 하이벨스 등, 크고자 하면 내려가야 합니다, 헌신(4-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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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윗
댓글 0 건 조회 4,998 회
작성일 08-01-1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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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 부산대 앞 모임] 2008년 1월 11일 금요일 ‘숲’ / 정리 : 정한신


빌 하이벨스, 크고자 하면 낮아져야 합니다


헌신


4. 안전 지대를 벗어난 삶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nothing)가 되셨다. 이 말은 어딘지 거북한 데가 있다.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면, 뭔가 어엿한 사람이 되려면, 뭔가를 획득하거나 성취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나 어울린다.

  예수님은 자신을 비우셨다. 의지적인 행동이 암시된 말이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신의 권리와 특권을-고의로 버리시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어마어마한 간극을 건너셨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이 되셨다. 내려오시기 전에 예수님은 우주의 한복판에 계셨다. 그분은 모든 찬양의 구심점, 만물과 모든 존재의 창조주, 모든 것을 붙드시는 에너지와 능력이셨다. 빌립보서 2:6에 보면 그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라고 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영원 전부터 다스리시는 분, 이사야 6장에 이사야가 본 눈부신 예배의 환상 속에서 천사들이 절하며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외친 대상은 바로 성부와 성령과 동등하게 예수 그리스도였다. 예수 그리스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 그분이 자신하여 신의 권리를 버리시고 내려오셨다. 그분은 문으로 드나드시고, 나귀를 타시고, 음식을 잡수시고, 잠을 주무셔야만 했다. 그분의 근육은 욱신거렸다. 예배와 찬양을 받으실 그분이 대신 욕을 들으시고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하셨다.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신 삼위일체의 제2위께서 육신의 속박과 제약에 따르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하늘에서 땅으로,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내려감은 그것으로도 측정되지 않는다. 그분은 십자가를 겪으셔야 했다.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에 예수님은 한 인간이-하나님으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내려갈 수 있는 데까지 다 내려가셨다.

  그러나 하향성이 하나 더 있었다. 하늘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깊은 내려감인데, 곧 죄 없으신 분이 죄로 더럽혀지신 것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의 노가 그 아들에게 타오르셨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희석될 줄 몰랐고, 예수님은 그 진노의 불바다 속으로 뛰어드셨다.

  이 내려감의 파격을 알고 나면 예수님이 자기를 비우셨다는 구절이 사뭇 더 놀라울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논리에 대한 확고부동하고 의지적인 헌신의 결과였다. 예수님은 만물의 최정상에서 십자가까지 한걸음씩 자진하여 일부러 내려가셨다. 그분은 베풀고 섬기고 잃고 죽는 삶을 알고서 능동적으로 끌어안으셨다.


우리의 힘든 선택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정말 감당하기 어려웠고 지금도 어려운 일은 우리도 같은 삶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자신을 비워야 한다. 우리도 사리사욕에 죽음으로써 예수님을 따라서 한걸음씩 사다리를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하향성은 저절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내려가기로 날마다 의지적으로, 능동적으로 결단해야 한다. 내려가는 일이 때로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것만이 크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이 따르신 길은 이치에 닿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은 ‘사랑’으로 인해 강등되시고, 일부러 잃으시고, 당신과 나의 죄값을 영원히 치르려고 죽으셨다. 그 하나님의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다. 하나님은 사랑 때문에 아들에게 내려가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순종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의 수혜자이자 그분을 따르는 자들인 우리도 똑같이 하도록 부름받았다. 최고의 두 계명이 무엇이냐는 물음 앞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경우처럼 사랑이 요구하는 내려감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종종 큰 대가가 따르는 능동적인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우리 교회의 한 부부는 꿈에 그리던 저택을 장만했으나 관리가 벅차서 마치 덫에 걸린 심정이었다. 그들은 그 집을 팔고 손이 덜 가는 작은 집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목표는 관계를 가꿀 시간과 자원을 더 많이 내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우리 삶의 왕좌에 계셨지만 물질주의가 그분 바로 옆에 앉아서 우리 삶을 먹어버리고 있었다”고 그 부부는 말했다.

  이 밖에도 물리치료사라는 자신의 기술을 이용하여 매주 한 번씩 도심 빈민들을 지원하며 섬기는 성도의 예가 있고, 비디오게임 업체에서 일하던 한 성도는 자사에서 제작하는 게임이 섹스와 폭력의 도를 넘어서는 것을 보면서 안정과 높은 직위를 버리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진보를 위하여 내려가고, 규모를 줄이고, 강등을 받아들이라는 인도하심을 느낀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나곤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마시고 내 뜻대로 하소서”라는 아담의 기도를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사”라는 예수님의 기도로 바꾸기란 쉽지 않다. 내려가려면 겸손해야 하고 깨어져야 하고 의존해야 하고 섬겨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이 중 어느 것도 우리 모두에게 저절로 오지 않는다. 우리는 다 현 상태가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풍성한 삶인가


  우리는 안전, 무사, 평화, 승리, 보상을 약속하는 성경본문들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들이 우리가 암송하고 액자에 걸어두는 말씀이다. 우리는 우리의 안락을 해치거나 위험할 듯한 본문들은 간과하거나 ‘유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찔러 쪼개서 드러내고 하향성의 길을 걸으라고 도전하는 구절들은 액자에 담기는 일이 거의 없다.

  스캇 팩은 사람들이 부부 관계, 자녀 양육, 직장 생활 등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고통과 불편의 경험을 피할 수 있다면 믿기 힘든 극단적인 일까지도 불사한다고 말한다. 문제게 직면하면 갈등이 생길 수 있으므로 문제를 피하거나 스포츠, 술, 섹스, 쇼핑, 먹기 등 다른 데로 에너지를 돌리기 일쑤이며 그리하여 평화롭고 안락한 인상을 꽤 그럴듯하게 지어낸다. 그러나 그 평화는 거짓이고 그 안락은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것이다. 현실과 개인의 성장을 희생하여 산 것이다.

  시간이 지나서야 우리는 자신이 신중하게 만들어 낸 그 안전 지대가 실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고통의 부재인 안락은 풍성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사실은 방해가 될 때가 많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긍정적 변화, 영적 성장, 성품 향상, 관계의 진보는 고통, 갈등, 긴장을 요한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0:10에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풍성한 삶’은 안전지대를 향한 오르막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전, 힘든 선택, 고통스런 성장, 순종을 향한 내리막길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 주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두 문장이 나란히 나온다! 이는 “나는 너희를 상처와 죽음의 삶으로 보내노라.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평강이 너희를 따라갈 것이다.”라는 뜻이다.

  풍성한 삶은 고통을 피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용감히 고통 속을 통과할 때에 찾아온다. 내려가는 길은 살과 뼈를 깎는 길이다. 하향성은 단순히 돈을 얼마나 베푸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얼마나 내려놓고 우리 삶의 죄와 잉여를 얼마나 기꺼이 털어 내느냐의 문제다. 그것은 삶의 태도이며, 그 태도를 특징짓는 것은 성품의 힘이다. 그리고 우리의 성품은 고통 없이는 자랄 수 없다.


밋밋한 땅인가, 신나는 모험인가?


  우리의 정직성, 친절함, 도덕성, 이기심 등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나 성령의 도전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자기 기만과 부정의 안전지대로 도로 기어드는가, 아니면 성장과 변화의 필요성을 직시하는가? 우리의 옷깃에 땀이, 즉 성령의 열기가 느껴지는 그 결단의 순간들은 중대한 순간이다. 안전지대로 후퇴할 것인가, 아니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전진할 것인가?

  당신은 안전지대에 숨겠는가, 아니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겠는가? 대답하기 전에 알아 둘 것이 있다. 헷갈리는 대답 내지는 적어도 의외의 대답이 있다. 안전 지대는 알고 보면 전혀 편하지 않다. 반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은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다. 실로, 고통이나 실패가 두려워서 안전 지대를 고집한다면 우리는 계속 익숙한 땅에 거하게 된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가도 늘 뻔하고 단조로운 불만의 삶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두려움 속을 통과한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초자연의 영역에 살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성령의 인도로 날마다 예측을 불허하는 모험의 삶, 상상도 못할 기적적인 인도와 경험이 가득한 삶이다.

  안전 지대를 벗어나서 크게 되는 길로 내려가려면 의지적이고 의식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날마다 성령은 따르라고, 내려가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격려해 주라고,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가난한 사람에게 돈을 주라고, 화해하라고, 용서를 구하라고, 친구를 경책하라고, 더 잘 사랑할 수 있도록 자신을 비우라고 부르신다. 바로 거기서 아픔이 올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불편을 감수하고 안전 지대에서 기어 나오라고 하실 때에 그 요구 뒤에는 언제나 가시가 숨어 있다.

  일단 내려가는 걸음을 내딛기 시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보호에 자신을 맡기는 기쁨을 얻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 속에 진정한 풍요가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가 도모하는 편한 삶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신나는 모험에 비하면 그것은 그야말로 밋밋한 땅이다.


5. 짐 저지 박사 : 아프리카 오지로


  짐 저지 박사의 이야기는 미국 도심의 안정된 의사의 자리를 버리고 케냐 의료봉사로 섬기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의 이야기이다.

  짐 저지 박사는 말한다. “나는 계획적인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께도 작업의 청사진을 드리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아프리카에 와 있는 것은 그의 계획이 아니었다. 대체로 그의 헌신은 안전지향적이었으나 그것도 하나님 뜻에 맡겨야 했다.

  저지는 순종과 헌신에 대하여, 안전과 무사함과 안락에 대한 자신의 ‘필요’를 벗는 것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말한다. “그저 단번의 결단이 아니다. 날마다 내리는 수많은 결정들이다.” 그는 갈수록 더욱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그런 식의 순종은 자유로 이어진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저지가 의사가 되기로 한 것은 이타심 때문이 아니었다. 돈이나 지위도 아니었다. 그저 안정감을 얻고 싶은, 적어도 수용받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그러다 대학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된 여자 친구의 모습을 보고 성경을 보던 중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삶의 변화를 위해 예수님을 원한다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

  기독교로 회심한 이후로 짐 저지의 계획들은 바뀌었다. 계획들 속에 하나님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그는 바른 계획을 짜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커졌다. 이제 그에게는 자신이 틀림없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어야 한다는 책임감까지 보태졌다. 통제가 핵심이었다. 그는 신학교로 진학할 계획을 세웠다가 하나님의 인도로 선교의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CCC 사역을 통해 사역의 감격을 느끼게 되었다. 사역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있었고, 짐은 전도와 제자도를 통해 강도 높은 관계들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관계들 중 만났던 신디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다.

  신디는 선교에 애정이 있었고 밑바닥 인생들을 위한 사역에 적극 가담했다. 중상층 신도시 사내인 짐에게 그것은 의외이자 위험한 결합이었다. 그의 안전을 앗아갈 모험과 긍휼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여러 사역을 거치며 저저 부부는 교회에서 가르쳤고 교회의 지도자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짐도 신디로 한때 생생하고 열정이 넘치던 자신들의 기독교 신앙이 하나의 생활 양식으로 귀착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이 다니던 교회는 비록 교육과 성경적인 지혜 면에서 강했지만 내부 지향적으로 보일 때가 많았다. 처음부터 그들 둘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전도의 열기는 없었다.

  이런 괴리 속에서 저지 부부는 신도시 생활의 쌍둥이 역병인 물질주의와 분주한 삶에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신도시 사역을 원한다면 그들도 그에 맞는 수준으로 살아야 한다는 논리가 있었다. 더 큰 집은 투자로 받아들여졌다.

  저지 부부는 오래된 큰 집을 샀으나 머잖아 집안 관리에 기운이 남아나지 않게 되었다. 짐은 수영장을 관리해야 했는데 수영장을 아예 받들어 모셨다고 해야 더 맞을 것이다. 수영장은 소독약을 넣어 달라, 나뭇잎을 치워달라 등등 상전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수영장 때문에 가족들이 몇 달씩 여행을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저지 부부는 결국 집을 팔고 케냐의 열악한 병원으로 사역지를 정하기로 하였다. 짐은 이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안전-빈틈없이 갖춘 외부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진짜 안전-이란 정작 그것을 확보하려고 하지 않을 때에만 온다는 것을 짐은 점차 깨닫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통제권과 계획과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내려놓을 때에만 온다.

  짐은 어렵게 체득하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몰두한 나머지 그는 하나님을 놓칠 때가 많았다. 인생을 허비할까 봐 두려워서 좋은 기회들을 저버렸을 수도 있었다. ‘그것’-언젠가 하게 될 사역의 특정한 자리-을 찾을 욕심에, 그는 때로 ‘그들’-하나님이 날마다 그의 삶 속에 두시는 사람들-을 놓치곤 했다.

  짐은 말한다. “결국 나는 하나님이 내 인생으로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하심은 내 관점이 아니라 그분의 관점에서 와야 했다. 나는 그것을 날마다, 매순간 받아야 했다.” 이것은 지금 여기에서 살겠다는 결단이었다. 자신의 통제를 느껴야만 하는 사람인 짐에게 그것은 신뢰와 순종의 걸음이었다.

  이것을 받아들였을 때 저지 부부는 미국에서 개업했던 병원에서 부부 관계와 재정과 삶의 통제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돕는 사역을 하게 되었고, 믿지 않는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있는 교회로 인도하심을 받아 그곳을 통해 영적 열정을 회복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케냐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모험을 감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봉급없이 일하고 아내와 세 자녀의 생활 터전을 옮기며 에이즈가 들끓는 환경에서 일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저지 가족은 삶이란 얻는 것이 아니라 베푸는 것이며,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하나님과 서로를 새삼 바로 인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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