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연구소 ELBiS Club 창세기 19장 1절-38절 요약
페이지 정보
작성자 1391 작성일 09-04-14 23:34본문
ELBiS Club 창세기 19장 1절-38절 요약
오늘 본문을 처음 읽었을 때 본문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어두운 밤에 일어난 일들(1절, “날이 저물 때에”, 11절 “눈을 어둡게 하니”, 33,35절 “그 밤에”)과 밝은 날에 일어난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15절, “동틀때에”, 23절 “해가 돋았더라” 27절 “아침에”)이 대조가 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본문은 어두움의 역사속에서도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절에서 11절까지는 소돔 성문에서 시작하여 롯의 ‘문’(5회사용)간(門間)에서 일어난 일들을 통해 18장 20절 21절에서 여호와께서 언급한대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을 확인하게 되는 장면입니다. 소돔 백성들의 상황에 대해 본문은 이들이 “무론대(노)소”하고 매우 도착적(5절,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이며 폭력적(9절,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이었다고 말합니다. 11절에서 천사가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라는 표현대로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어두운 상태(what about 눈먼자들의 도시?)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 소돔이라는 환경 속에 있는 롯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과 헤어져 산지도 시간이 제법 흘러 롯은 “성문에 앉”아 있는, 말하자면 사회의 지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1절에서 3절의 묘사는 그나마 롯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환대의 정신과 유사한 정신을 갖고(비록 그 강도에는 차이가 있는 듯 하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로서 전체 사회를 의로운 방향으로 끌고 가기에는 오히려 부족하고, 오히려 악한 환경인 소돔의 영향때문인지 그 사고방식이 한편으로는 손님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편으로는 자기의 딸을 성적인 희생양으로 제시하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복잡하고 혼합적인 양상을 보이는(8절) 롯이었습니다.
12절에서 29절까지는 두 천사가 이런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려는(7회 사용) 작정을 롯에게 고하고 롯과 그 가정을 소돔에서 이끌어 내어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는 장면(22절까지)과 실제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과 불을 내려 심판하는 장면까지의 내용입니다. “네게 속한 자(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들을 ‘이끌’어(15절) 심판을 면하라는 말씀에 롯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체하고(16절) 이에 천사들이(하나님이) 직접 ‘손을 잡아 인도하며’ ‘밖으로 이끌어’ 내십니다. 그 이후에도 롯은 ‘소알’까지 밖에 못가겠다고 약간은 떼를 쓰듯 합니다. 이에도 하나님은 그 소원을 들어 주어 비록 들에 있는 소알이지만 멸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로 소돔과 고모라에 불과 유황이 내릴 때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누가복음 17장 28절 이하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하였던 롯의 아내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하는 말을 농담으로 여겼던 정혼한 사위들과 롯이 다를 게 없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자의 강조는 16절에서 19절에서 나타나는 대로 ‘여호와의 인자’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인도’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롯을 구원하셨을까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롯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제일 우선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작정하셨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롯은 멸망하지 않고 도망할 수 있었습니다. 27절에서 29절은 그 아침에 일어나 멀리 멸망의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바라 보는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본문 전체를 요약하는 말씀, 결국 이 말씀을 하려고 저자는 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롯이 구원받은 것은 아브라함과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후서의 저자가 롯을 의인이라고 표현하지만 (벧후 2:7-8,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성경이 말하는 의는 일관되게 그 자신의 행위의 의로움이 아니라, 관계때문에 은혜로 거저 주어지는 의라는 사실을 이 본문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30절에서 38절까지는 다시 ‘밤’의 역사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경험에 의한 외상증후군(?) 때문에 살아남은 자들인 롯과 두 딸은 “소알에 거하기를 두려워하여” “산에 올라 거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일견 원래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앞본문의 주된 사상이 은혜(인자)로우신 ‘하나님의 보존(17,20)’이라면 이 부분은 대조적으로 추한 ‘인간의 보존(32,34 preserve,노력)'의 기록이라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롯의 딸들은 이미 8절에서 아버지의 잘못된 선택의 희생물이 될뻔한 자들이었습니다. 이제 이 구절에서는 딸들이 아버지가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아버지를 희생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소돔에서 배운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after the manner of all the world) 우리의 배필이 될 사람이 없”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며 좁은 소견인지! 그리고 이런 추한 인간의 보존의 노력이 낳은 결과인 모압과 암몬의 출발의 역사를 하나님은 여기 기록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몽매한(어두운) 선택속에서도 역시 일하고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후일의 역사와 성경의 기록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압과 암몬에도 관심을 보이십니다.
행위가 아닌 은혜로 주어지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묵상뿐 아니라 이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의 사회적인 책임과 불의한 사회가 개인과 가정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는 본문이기도 하며, 동시에 가정사역의 관점에서 가장의 역할에 대해, 가정과 사회의 관계등,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할 것이 많은 본문이었습니다. 특히 주제 사라마구 원작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 <눈먼자들의 도시>와 여러 가지 점에서 일맥상통하게 여겨지는 본문이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