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성경공부 창세기 ELBiS Club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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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작성일 09-02-11 17:17본문
일상생활성경공부 창세기 ELBiS Club 11장
본문을 읽고 나자 우리는 본문이 매우 빠르게 진행되면서 한 사람의 집안 즉 아브람의 집안인 데라가문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마치 거대한 서사의 서막, 혹은 예고편을 보는 듯한 느낌인 셈입니다. 또한 그 예고편이 그리 밝지 못하고 복잡다단한 역사의 여정, 가정사의 여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콩가루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요? 바벨의 흩어짐, 그리고 데라가문의 흩어짐 사이에 셈의 족보가 있는 형국이 본문의 모습입니다.
보통 우리는 바벨탑 사건이라 불리는 이 본문은 엄밀히 말하면 그저 바벨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혹은 바벨에 있는 탑 사건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여기 벽돌을 굽고 역청(bitumen: 석유나 천연가스등의 부산물)을 사용할 만큼 문명이 발달되어 있던 이들은 동방을 향하여 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고 거기서 모여서 정착하기로 작정합니다. 이들이 “정착”한 것도, 이들이 “한 언어”를 사용한 것도, 이들이 성읍과 탑을 건설한 것도,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자세와 태도, 방향이 문제였습니다. “그 탑 꼭대기를 하늘(heavens)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 말은 마치 창세기 3장의 타락의 순간과 4장의 라멕의 태도에 비견되는 인간들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아 지려하는 태도, 하나님을 침범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태도를 가진 채 흩어지지 않고 공동체를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문제가 되는 셈입니다.
여기에 공동체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보시고 온 땅의 언어를 흩는 방식으로 대응하십니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대로 그 끝까지 가도록 내 버려 두지 않으시고 매우 급하고 단호하게 사건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지속적으로 수준을 낮추시는 중이십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흩으셨더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흩으시는 것은 이런 은혜, 이런 자비, 이런 교육적 의도가 늘 있어 왔습니다. 흩으시는 것이 정죄함과 징벌같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있는 법입니다.
10절부터 26절까지의 셈의 자손들의 족보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점점 사람들의 수명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처음 셈과 마지막 데라를 제외하고는 30대까지에 이미 첫 자녀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소한 특징을 넘어서서 11장의 셈의 족보는 10장의 기술과 비교할 때 자녀중 오직 한 사람, 특히 데라까지 연결되는 족보만을 보여 줌으로서 데라의 집안에 족보가 수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본문은 27절에서 32절에서 데라집안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데라집안 이야기는 다음 장인 12장의 아브람의 등장을 예고하기 위함입니다. 그 예고의 맥락은 거시적으로는 이 집안이 바벨 사건의 맥락속에 있다는 점을 강조함과 동시에 미시적으로 데라집안의 가계도를 그려보면 매우 복잡다단하고 약간 음울한 기색이 있다는 점입니다. (강조되는 단어가 “죽었더라”“자식이 없었더라”“이런 말들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동시에 이 가족은 갈대아인의 우르에서부터 하란을 거쳐 가나안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가정입니다. 이 움직이는 여정 역시 다음에 나오게 될 아브라함의 여정의 배경이 되는 것 같습니다.
처음 이 성경을 받고 들었던 독자들의 입장에서 본문이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을 향하던 모세의 청중들, 혹은 바벨론 유수 상태에서 늘 가나안 본향을 사모하던 이들에게 오늘 11장은 자신들의 흩어져 사는 삶의 이유에 대해서, 현재의 삶이 하나님의 의도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언약의 조상 아브라함 가족사가 여행과 움직임의 역사임을 보게 되는 점에서 이런 저런 동일시를 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창세기는 적어도 11장까지 지속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방향을 취하고 하나님은 이에 대해 은혜와 자비로 조치 하시는듯 합니다. 아마 이런 흐름은 성경역사 내내, 그리고 우리의 삶과 인류의 역사 내내 반복되는 패턴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공동체!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된 공동체” 언어와 말이 하나인 공동체, 함께 모여 뭔가 꿈꾸고 기획하는 공동체는 일견 우리의 이상이요, 지향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11장 1절에서 9절까지 나타난 바벨 도시의 공동체는 “열정은 있으나 방향이 잘못된” 공동체들의 전형입니다.
데라가족 공동체 역시 가족이라고 더 나을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 처럼 가족이기 때문에 더 많은 상처와 더 많은 문제를 경험합니다. 전반적으로 노아방주에서 구원받고 살림받은 감격은 사라지고 본문전체에 음울한 느낌이 우리 자신의 일상생활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역사속에 내려 오셔서 조치하시는 하나님의 공동체의 일하심, 자비 은혜가 절대적으로 인간 역사에 필요합니다.
오늘 아침 묵상한 전도서의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전도서 3장 10절, 11절 말씀 “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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