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적성경해석학 9장 선교적으로 신약성경 읽기(N. T.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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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선약수 작성일 24-06-19 13:45본문
9장 선교적으로 신약성경 읽기(N. T. 라이트)
* Goheen, M. W. (ed.)(2016), 선교적 성경 해석학, 백지윤 역(2023), 서울: IVP, pp. 255-83.
신약성경의 목적은 초기 교회의 선교적 삶을 지탱하고 안내하기 위해 쓰여졌다. 초기 교회는 유대교 유일신 신앙에서 말하는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 새로운 창조의 에너지가 세상에 마음껏 흘러가게 하는 백성이 되는 것을 의식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초기 교회가 그런 백성이 되기를 원했다. 신약성경의 글들은 초기 교회를 안내하고 지탱하고 지도하고 힘을 주도록, 즉 초기 교회를 형성하고, 그들이 갈지도 모를 잘못된 길에 대해 경고하도록 의도되었다. 기본적으로 표현하면, 신약성경이 쓰인 목적은 초기 교회의 모든 선교적 의제로부터 출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성경 읽기는 때로는 ‘묵시적’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교회’라는 이름으로 저항에 부딪혀 왔다.
최근 10여년간 영국에서는 선교로 형성되는(mission-shaped) 교회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되고 있다. 선교를 교회의 부수적 활동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선교를 위해 그리고 선교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선교에 대한 고정 관념을 고치는 것이다. 영국에서 선교는 크게 두 방식으로 오해된다. 첫째,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사람을 데려오는 것, 둘째, 주위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 두 관점은 모두 후기 계몽주의의 유산이며 신약성경의 시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신약성경은 세상을 위한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관한 것이며, 그 초점은 물론 예수님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세계 전체를 새롭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예수님의 부활이 그 출발점이고, 성령을 부어주신 것은 그 수단이다. 우리는 새 창조의 개시과 그 궁극적 완성 사이에 살고 있다. 지금은 선교를 위한 시간, 교회의 성령 충만한 삶과 증언을 통해 열방에 하나님의 치유와 소망을 가져오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시간이다. 나(라이트)는 이러한 관점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례로 사도행전, 요한복음, 바울서신 세 곳을 간략히 설명하고자 한다.
사도행전의 선교적 신학
사도행전은 선교적 신학을 찾기 위한 대표적 본문으로 활용되는 책이다. 하지만 사도행전은 선교에 대한 전형적인 관점 외에도, 선교를 위한 정교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한다. 그것은 성전과 교회의 선교다.
구약성경의 성전은 단순히 제의를 수행하는 종교적 장소가 아니었다. 성전은 하늘과 땅이 실제로 만나는 교두보였다. 성전의 의미가 설명되고 확대되는 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 열왕기상과, 에스겔 등을 거치며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내러티브 아크를 따라 성경 읽기를 배울 때, 그 내러티브는 끝나지 않았으며, 예수님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또한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승천하셨다. 승천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과 땅이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사도행전 2장의 사건(성령강림)은 땅에서 하늘의 숨결을 지니고 살아가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준다. 성전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을 때, 연결된 하늘과 땅이라는 새로운 실재가 만들어내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처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교두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외에도 사도행전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거의 모든 지점에는 성전이 관련되어 있다: 제자들은 성전에서 기도하고 예배; 스데반은 성전이 심판 아래에 있음을 설교함. 후반부 바울의 선교에서도 갈등은 성전이나 예배와 관련되어 있음: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생각하고 제사하려 함; 파르테논 신전이 내려다보이는 아레오바고의 연설에서 유일신 신앙의 비전을 제시함; 에베소의 신전에서 아르테미스 신앙과 정면 충돌함 등.
우리에게 사도행전만 있었을지라도, 우리는 그 내러티브 속에서 완전한 선교적 신학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읽는 1세기 혹은 오늘날의 독자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도록 도전받는다. 만약 선교가 이런 것이라면, 우리 사회에 있는 신전들은 무엇일까? 우리의 삶, 설교, 생각, 주장을 통해 우리는 그것들을 능가하고 있는가? 그 결과로서 야기되는 위험들에 직면하는 법을 어떻게 배우고 있는가?
요한복음의 선교적 신학
우리는 요한복음의 시작에서도 성전신학을 발견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1:14). 즉 그분은 “우리 가운데 성막을 치셨으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바라본다. 기독론적 성전신학은 요한복음 2장에서 다시 분명하게 드러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도성에 도착한다. 이 지점에서 큰 충돌이 예상된다. 예수님인가, 성전인가? 양쪽이 맞붙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나 예상된 드라마 대신 요한은 13-17장에 걸쳐 우리를 다락방으로 데려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한은 이 내러티브를 통해 예수님이 참 성전임을 보여준다. 요한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잘 왔어요. 이리로 들어오세요. 예수님과 함께 머무세요. 그분은 당신이 성전 백성이 되도록 그분의 성령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고별 담화는 세상에서 물러나 안락한 사적공간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닌, 세상으로 나아가는 선교를 위한 준비다.
고별 담화의 중심에서 우리는 이상한 구절을 발견한다. “그가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죄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요, 의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고 너희가 나를 더 이상 못 볼 것이기 때문이요, 심판에 대하여 깨우친다고 함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16:8-11, 새번역) 성령이 오실 때 성령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해’ 이러한 일을 하실 것이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시는 동안 우리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는 진실을 말하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사실 그것이 교회의 임무인 것을 요한복음에서 목격한다. 계몽주의 이래, 우리가 교회의 선교 임무를 개인의 경건과 구원의 차원으로 축소해 온 것은 성령이 오실 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신다는 것을 우리가 잊어버렸음을 의미한다. 성령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 공동체를 통해 이 일을 하실 것이다.
바울의 선교적 신학
에베소서 전반부를 빠르고 신나게 훑어 보려면 1:10, 2:10, 3:10을 중심으로 보라. 1:10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그 안에서 통일시키는 것이라는 요약문을 발견한다. 그러나 서구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일부 사람들을 땅에서 벗어나 천국에 갈 수 있도록 구출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가짜 신학에 근거해 살아왔다.
2:8-10에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예술품, 즉 그의 ‘포이에마’ 인 교회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poem)다.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과 권세의 리듬을 보고 노래하고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에베소서 2장의 ‘선한 일’이란 교회의 총체적인 선교다. 이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다른 방식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교회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초기 교회는 밖으로 흘러가는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었고,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소외된 이들을 환영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된 하나님의 작품이다.
3:10에서 우리는 선교의 명령을 받는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다면적이고 다채로운 지혜가 하늘의 통치자와 권세자에게 알려질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노예와 자유인, 부자와 가난한 자, 젊은이와 노인으로 이루어진 이 공동체의 존재 자체에 목적을 부여하는 선교적 말씀이 있다. 카이사르는 권력과 폭력, 금력으로 그런 통치를 알렸지만, 하나님은 메시아 예수를 통해 성령으로, 각양각색이 이루는 일치 안에서 세상의 권세자에게 예수님이 주이심을 드러내는 표지로 한 백성을 창조하셨다. 에베소서 4장에서 일치에 대한 강력한 호소가, 5장에서 거룩함에 대한 강력한 호소가 나오는 것이 이 때문이다. 6장에서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처음 세 장에서 말하던 선교사 백성이 되기 위해 일치와 거룩함을 추구할 때 교회가 싸우게 될 영적 전쟁에 대한 강력한 경고가 나온다.
바울의 선교 사역 전체는 복음을 통해 새로운 폴리스/공동체, 새로운 사회적 실재가 될 공동체가 태어나게 하고 성숙시켜 가는 것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고대의 일반적 종교적 실천(성전, 제사, 제사장, 신탁 등) 대신 예수님 안에서 알게 된 하나님과 자신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실천들(세례, 성찬식, 기도, 성경공부)을 행했다. 그러한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 고대 로마 단어 렐리가레(religare)가 담고 있는 온전한 의미다. 그들은 주변의 어떤 종교와도 비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종교(religion)를 가졌다. 그들은 선교적 신학에 기초해 세상 안으로 나아가는 특별하고 새로운 공동체였다.
서구 교회는 로마서가 위대한 선교 문서임을 바르게 보았지만, 자주 이 서신의 선교적 함의를 소위 ‘로마서의 길’(구원과 관련된 로마서 구절들을 순서대로 모아 놓은 일종의 전도용 구원 설명서-옮긴이)로 축소했다.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그리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성령에 의해, 메시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언약을 뒤쫓아간다.
로마서 6-8장은 하나님의 선교 내러티브를 들려준다. 6장은 우리가 물을 통과하여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출애굽 이야기를, 7장은 토라를 받는 시내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8장에서 우리는 토라로부터 해방된다. 대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성령은 우리가 받을 유업(상속)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사실상 로마서는 우리에게 거대한 출애굽 내러티브를 제시한다. 로마서는 성령이 이끄시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유일하신 하나님께 위임받은 대리인으로서 그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는 임무를 수행하는 방식을 분명하게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공공 선교적 신학이라 묘사할 수 있는 것이 탄생했다. 신학은 성스러운 소수를 위한 사적 공간으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해석학적 공간을 여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공간은 우리와 주님을 하나로 묶어주는 새로운 렐리기오(religio)를 가지고 예배와 친교 안에서 다 함께 살아가고, 새로운 ‘폴리스’로서 다 함께 기능할 때 나타난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일어나고 있고, 우리는 단지 그것의 수혜자가 아니라 대리자로 부름받는다. 이 창조의 대리자가 될 때, 우리는 오늘날 다른 많은 사회와 문화가 열망하는 사회적/문화적/종교적/윤리적/정치적 실재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안전한 사적 공간으로 물러남으로써가 아니라, 옛것의 한 가운데서 새 창조를 살아냄으로써 이 일을 한다.
세계 각 곳의 사람들, 특히 중동의 사람들은 기독교와 서구를 동의어로 본다. 그들은 기독교가 경제적 착취와 폭력적 통제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기독교가 희화화 된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인지 모른다. 따라 오늘날 중동의 일부 선교사들은 ‘선교사’나 ‘기독교’ 같은 단어를 사용할 수 없다. 그들은 다만 예수님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는 많은 면에서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기독교는 바벨탑을 쌓는 서구의 오만함과 혼동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여전히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이 모든 혼란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요한복음 16장, 에베소서 1-3장, 빌립보서, 그리고 특히 로마서 8장과 함께 용기를 내는 것이라고 나는 제안한다. 바울은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메시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으로의 길이었다. 그것은 우리를 땅에서 잡아채 저 먼 곳의 빛나는 천국으로 데려다주는 영광이 아닌, 시편 8편에서 말한 영광, 즉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인간의 권세다. 바울과 요한을 함께 읽을 때, 우리는 이것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영광임을 알게 된다. 교회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고 있을 때만 선교는 설득력이 있고 효과적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결론, 적어도 그 결론의 일부분이다. 즉, 그가 의롭다고 하신자들을 그가 또한 영광스럽게 하신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방법이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성경을 읽으며 세상을 향한 그분의 선교에 참여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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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람(2016). 비일(G. K. Beale)의 ‘성전신학’으로 보는 선교적 해석학, 선교신학 44, pp.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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