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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Experiencing the Trinity) Summer School 제5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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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 건 조회 4,402 회
작성일 09-08-1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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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하나님의 미래계획

5. 우주의 미래: 진보인가?, 절망인가?

들어가는 말

1부에서 현재의 세상과 교회는 미래의 희망에 대해 커다란 혼란을 안고 있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그 분의 부활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백성에게 약속하신 미래의 삶에 대해 매우 정확하고 독특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혔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부활절 사건을 기뻐하며 회상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구속자로 믿는 자신들의 유대교 신앙 때문에 그리고 이 신앙이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예기치 못했던 사건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절에 시작된 일이 완성될 앞으로의 사건 또한 간절히 기대했다. 이처럼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는, 미래의 회복이라는 더 큰 그림이 이 책 제2부의 주제다.

지난 이백년 동안 서구 사상은 하나님의 창조라는 더 큰 그림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개인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 게다가 중세 이후로 서구 신앙의 많은 부분이 헬라 철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그 결과 사람들이 갖게 된 미래에 대한 기대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성경적 그림 보다는 영혼이 육체를 벗은 희열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플라톤의 시각과 더 많이 닮게 되었다. 만약 우리가 미래에 대한 희망의 문제를 개인차원에서 거론하기 시작하면 그것을 모든 것의 진정한 중심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고, 창조에 대한 희망은 그저 가장자리의 장식 정도로만 취급받게 될 위험이 함의적으로나마 언제나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논의의 순서는, 미래 세계에 대한 성경적 비전,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위에서부터 아래로 회복되는 현 우주에 대한 비전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 맥락 안에서야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며, 그 다음에 육체의 부활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는, 우주 전체의 거대한 희망 안에서 우리의 작은 드라마들이 연극 안의 연극이 되어버리는 위대한 드라마를 살펴볼 것이다. 이 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매우 인기 있으며 선택 가능한 두 가지 일을 살펴본 후, 다음 장에서 신약성경 자체가 제공하는 그 두 가지에 대한 대안적 선택을 살펴볼 것이다.

선택1: 진화론적 낙관주의

지나친 단순화라는 위험을 무릎 쓰고, 우리는 역사 이래 세상의 미래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이 있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모두 때로 기독교의 희망과 혼돈되었고, 각각의 방식이 자신의 웅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기독교적 희망의 요소들을 일부 사용한 것도 사실이다.

첫 번째 입장은 진보의 신화다.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정치가들과 언론 등에 나오는 세속적 시사 해설자들이 여전히 이 신화를 가지고 살며, 거기에 호소하고, 우리도 그것을 믿도록 부추긴다. 정치가들은 여전히 자신들 나름의 신화를 가지고 대중을 열광시키려 하지만-불쌍하게도 그게 그들이 아는 유일한 담론이다-사람들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섰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가들은 우리에게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근대주의적이고 진보적인 프로젝트(‘우리를 위해 투표하면 살기 좋아질 겁니다!”)를 과장과 자극의 포스트모던적인 기법으로 치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희망이 없다면 남는 것은 느낌뿐이다. 설득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절대로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해 보이는 것, 따라서 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바로 오락이다.

진보의 신화는 현대 서구 문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 그 뿌리 중 일부는 기독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프로젝트가, 그리고 이 우주의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자라고 발전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이 무한히 개선되면서 유토피아를 향해 갈 것이라는 생각은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가 그러한 생각의 결정적인 견인차가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한편으로는 과학적 진보와 경제적 진보가 결합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적 자유와 더 넓은 교육 기회를 누리면서 역사가 놀라운 목표를 향해 빠르게 진전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력했던 19세기의 유럽에서 꽃을 피웠다.

이러한 유토피아적 꿈은 사실 기독교적 비전의 서툰 모방이다. 그 꿈은 한 마디로 다음과 같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나라가 하나가 되어 목표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비전을 만들어 내게 되는데 이 목표는 어딘가 다른 곳에서 주어지는 새로운 선물이 아니라 그 안에서 부상하는 목표다. 인간은 완전해질 수 있고, 실제로 그 지점을 향해서 불굴의 의지로 진화하고 있다. 이 세상은 우리가 발견하고, 이용하고, 즐겨야 할 대상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대신에 교육을 받고 열심히 일함으로써 우리의 잠재력이 온전히 다 발현될 것이다. 창조와 새 창조 대신 과학과 기술이 이 세상의 원료를 유토피아의 재료로 바꿀 것이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이 세상을 운영하려 한 것처럼 자유주의적 모더니즘은 영광스러운 미래로 가는 위대한 행진이 잘 전진하도록 도우면 이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찰스다윈은 뜬금없이 급진적인 사상을 가지고 등장한 위대한 사상가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자기 시대의 산물이었다. 사람들은 인류와 세계가 멈출 수 없는 내재적 과정으로써 앞으로 위로 행진해 가고 있으며, 그 결과 곧 위대한 미래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진보라고 하는 좀 더 일반적인 의미의 진화를 이미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거대한 산업적, 제국주의적 확산을 정당화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편리한 철학이었다. 다윈은 거기에 과학적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재빠르게 포착해서 불과 반세기 안에 우생학에서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것을 사용했다. 물론 약간의 세부 내용만 수정하면 칼 마르크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시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이 주요 흐름으로 자리 잡아 가는 듯이 보이는 이 진보의 사상에 동조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의 메시지가 약속하는 것을 사회에서 실천하기 위해‘사회 복음(social gospel)이라는 것을 수용했다.

그러나 진보의 신화가 기독교적인 형태로 발전한 것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로 피에르 테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년 출생, 프랑스인 예수회 수사, 기독교 신비가)의 사상이다. 그는 살아 있는 이 세계가 모든 것을 포함하는 ‘우주적. 그리스도적. 신적 환경’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고 믿었다. 이 세상의 혼란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이 ‘생기를 얻어 하나님을 향해 끌려 올라가고 있다’라고 믿었다.

테야르 드 샤르댕의 사상은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고 모호하기도 한데 그가 당대의 진화론적 낙관주의의 약점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제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특히 근본적 악의 문제를 자신의 사상에 포함시키지 못했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진보의 신화가 갖는 진짜 문제는, 그것이 악의 문제를 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신화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심각한 악의 문제를 다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난 이백 년 동안의 진화론적 낙관주의는 세계대전, 마약 범죄, 아우슈비츠, 인종분리 정책 앞에서 그리고 아동 포르노그래피와 그 외의 우리의 오락을 위해 진화론이 20세기에 만들어 낸 흥미로운 부업들 앞에서 무력한 것이다. 진보의 신화를 가지고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뿌리 뽑지도 못한다. “이 세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 시킨다”라고 하는 마르크스 자신의 의제도 성취되지 못한 채 남아있다. 이 세상은 빛을 향해 행복한 전진을 하는 곳이 아니라 여전히 슬프고 악한 곳이다.

진보의 신화는 세 가지 이유에서 악의 문제를 다룰 수 없다.

첫째, 악을 막을 수가 없다. 만약에 진화가 우리에게 히로시마와 강제 노동 수용소를 주었다면 진화를 좋다고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그저 계몽주의의 꿈을 가지고 앞으로 열심히 나아가기만 하면 그러한 문제들이 다 해결되고 결국에는 유토피아에 도달할 것이라고 가정할 만한 이유는 과학, 철학, 생물학적 진화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르건 간에, 이 우주가 황금의 미래를 향해 진화해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꽤 분명히 보여 준다.

둘째, 만약 ‘진보’가 결국 우리를 유토피아로 데려간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이 세상에 일어난 모든 악의 도덕적 문제는 다뤄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일 아침에 황금의 시대가 왔다고 하자. 그것이 오늘 고문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세 번째로 진보의 신화는 악 자체의 성질과 힘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십자가의 핵심적 중요성을 보지 못한다. 십자가는 악에 대한 하나님의 부정인데 그 부정 다음에는 하나님의 찬조에 대한 긍정이 열린다. 우리는 근대성의 세속적 이야기가 아니라 기독교의 이야기에서만 이 세상의 악이 해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악은 빛으로 향해 가는 단순한 상향 운동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궁지에 빠진 인류와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어둠 가운데로 내려가신 사건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진보’의 일반적인 의미에 동조했는데, 물론 그것이 기독교적 희망과 나란히 가기도 하지만 그 기원은 분명히 다르며 나란히 가다가도 매우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튼다.

선택2: 이동하는 영혼

서구 역사에서 플라톤은 여전히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로 남아있다. 부처와 마찬가지로 플라톤은 시간-공간-물질로 구성된 현 세상은 환상이며 동굴 안에 어른대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장 적절한 임무는 현상 너머에 있는 진정한 실재와 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에게 그것은 영원한 형태(Forms)였고, 부처에게는 영원한 무(無)였다.

다시 한 번 단순화 시켜 말하자면, 플라톤은 물질과 현상을 거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봄과 여름 후에는 가을과 겨울이 오고, 노을이 지면 어둠이 찾아오고 성장과 번영은 고통과 죽음의 전주곡에 불과하다는 사실, 이것은 세계를 망가뜨리는 악이 아니라 물질이 경험하는 변화와 부패, 덧없음일 뿐이었다.

여기에서 각각의 세계관들이 근본적으로 갈라진다. 낙관주의자, 범신론자, 진화론자, 진보 신화 학파는 모두 이것이 단지 더 크고 나아지기 위한 성장통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이다. 플라톤주의자, 불교도, 힌두교도, 그리고 플라톤주의 계통의 영지주의자, 마니교도, 그리고 기독교와 유대교 전통의 변형에 속한 수많은 사람은 이것이 바로 우리가 무언가 아주 다른 것, 즉 시간-공간-물질로 만들어진 세상이 아니라 순전한 영적 존재가 사는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고, 그러한 영적 존재인 우리는 기쁘게 이 세상의 족쇄를 단번에 벗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 세계관에 의하면 필멸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부패하여 죽는 것, 즉 우리의 물질적 존재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것이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영지주의자들은 물질 세계가 열등하고 어두우며 모든 면에서 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원래 이곳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특정 사람들이 있다고 믿었다.

영지주의 신화는 우리가 궁지에서 탈출하는 길은 원래의 원시적 상태, 즉 이세상의 창조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관점에 의하면 진짜 악인 물질을 만들어 낸 창조 자체가 ‘타락’이 된다. 이 관점이 기독교의 몇몇 측면들을 얼마나 비슷하게 모방하는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깊이 그리고 철저하게 기독교와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기 바란다.

영지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는 작가인 스튜어트 홀로이드의 주장에는 우리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한 가지가 있다. 기본적으로 유대교나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에서 물질주의적 낙관주의를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든 영지주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낭만주의 운동의 특정 요소들에, 그리고 좀 더 최근에 나타나는 낭만주의의 일부 유산에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서구 그리스도인들은-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서구 비 그리스도인들은-기독교가 어느 정도 플라톤의 입장을 취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많은 기독교의 찬송가와 시들이 생각 없이 영지주의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창조된 세계는 궁극적인 세상과 무관한 것이고, 최악의 경우 어둡고 악하고 음침한 곳이기 때문에, 원래 다른 차원에 존재하던 우리 불멸의 영혼들은 허락되는 한 빨리 그곳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식의 태도다. 그 결과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주된 목적은‘천국행’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그 결과를 서구 교회와 서구 기독교가 발생시킨 세계관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세계 곳곳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적 미래관을 창조 질서의 궁극적 소멸과, 완전히 비물질적이라는 의미의 ‘영적’운명으로 이해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소망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교회 안에서든 밖에서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와 같은 내용을 믿는다고 인식하고 있다.

대중적이면서도 잘못된 이 두 가지의 관점에 맞서서 기독교가 주장하는 핵심 내용은, 창조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부활 안에서 하신 일을 이 세상 전체를 위해서도 하시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세상’이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역사를 포함하는 우주 전체다. 바로 이 희망이 내가 다음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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