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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톡톡크리스찬 #45 죽음을 준비하는 영성(11월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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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7,692 회
작성일 09-11-18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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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CBS 방송 - 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2009년 11월 9일 방송분 준비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정한신 기획연구위원

주제 : 죽음을 준비하는 영성

* ‘죽음의 준비’에 관한 내용은 폴 스티븐스의 책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죠이선교회), 방선기 목사의 「그리스도인의 일상다반사」를 참고하여 기술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 죽음! 회피에서 준비하는 모습으로

죽음은 일상적인 경험이고 절대로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으며, 다른 사람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누구나 한 번 태어났다가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라고 선언합니다(히9:27). 그러나 대개 노인이 되어 죽음이 바로 코앞에 올 때까지 그것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철학자 조자 산타야나는 “출생과 죽음에 대한 처방은 그 사이를 즐기는 것 이외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죽음을 부인하는 세대가 갖는 실질적인 신학입니다. 이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지 못하고, 그래서 마음이 온갖 몸매 관리, 건강 관리, 재미와 즐거움에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J.I.패커가 말한대로, 그리스도인의 방식은 “삶을 배우는 첫 단계로서 죽음에 대한 준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 중 하나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경에서 이삭과 야곱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았을 때 자신의 죽음이 다음 세대에게 축복이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사역이 되도록 했습니다.

▲ 죽음의 신비, 그리고 부활의 소망

죽음은 하나의 신비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했기(가까운 사람을 잃을 때 슬퍼하는 것을 제외하고)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짧게 끝날 수도 있어 보이는 그 순간에 시간을 초월한 영원을 생각하도록 도전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우리 몸이 부활하고 새 하늘과 새 땅에 완전히 참여하는 것에 대한 소망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고 말합니다(히2:9). 정신적인 결과이든 영적인 결과이든(마27:46) 죄를 통하여 들어온 모든 죽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경험하셨습니다. 죽음은 단지 심장과 호흡, 그리고 두뇌 활동이 멈추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껍데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전체가 죽는 것을 죽음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 이상이 죽습니다. 우리의 감정, 인격 그리고 관계를 형성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능력도 죽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죽음은 단순한 육체적인 현상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 전체가 죽는 것입니다.

바울은 죽음(사망)이 마지막 원수라고 말했습니다(롬8:38, 고전15:26). 이는 죽음 자체도 하나의 생을 가지고서 인간들의 마음을 향해 우쭐거리고 또한 그들을 종 노릇 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마지막 원수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멸망했습니다. 죽음이 죽은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보장되었습니다. 죽음이 사망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죽음의 의미는 아직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은 자들이 이 세상에서 갖는 두려움이나 영원한 결과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죽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갖는 소망은 교체되거나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은 새롭게 변화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빌3:21)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하나의 성례로, 즉 그것을 통하여 신령한 은혜로 들어가는 신체적인 경험으로 봅니다. 이 경우에 그 신령한 은혜는 부활의 약속에 있습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인격도 치유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아야 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1:21-24) 다시 말해서 지금 죽는다면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테니 안타까울 것은 없다, 그렇지만 아직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일이 남았다면 그만큼 더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마치고 죽음이 찾아온다면 주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따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하여 남아있는 사람들과 관계가 단절되는 부분도 주 안에서 한 가족으로 부활하게 될 것임을 소망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땅에서의 혈연관계는 죽음으로 끝이나는 것이므로 지금 가족들과 남은 시간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의 몇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죽음을 부인하는 현대 문화를 거부해야 합니다. 친지들과 친구들의 죽음은 가정 안에서 죽음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그리스도인의 소망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마지막 말과 유언을 생각해보고 준비하는 것 또한 우리가 죽음을 잘 준비하고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간에) 어떠한 유산을 뒤에 남길 것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도록 돕습니다. 또한 죽음을 수용하면서 사람들을 만나 사랑과 용서를 나누고 관계를 회복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지는 것 또한 중요한 죽음에 대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이중 시민권의 개념을 수반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다음 세상에도 이미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수태부터 부활까지 삶의 매순간 우리는 영원한 세계와 항상 같은 거리를 유지합니다. 우리는 삶을 소중히 여기며, 이 세상에서 번성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이 최고의 선은 아닙니다. 우리는 죽음을 악한 것으로 저항하지만, 그것이 최고의 악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음을 통하여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날을 계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선물로 받아들이며 언제든지 우리의 마지막이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과 재능을 끝없이 이 세상에 쏟으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빌려온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일의 염려와 부담을 오늘로 가져오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 날마다 우리에게 충분하시다는 믿음으로, 한번에 하루를,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마6:25-34).

넷째로, 매일의 힘든 일들은 우리가 “날마다 죽는 것”을 배우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고통과 핍박, 그리고 연약함을 통하여, 우리는 부활의 능력으로 살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고후4:10-12,16-18).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4:10-12)

다섯째로, 우리는 포기하는 것을 점진적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일과 건강과 소유와 모든 관계에 대한 포기를 포함하는 과정입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포기하고, 죽음을 통하여 부모님과 친구들을 포기하고, 성장하여 집을 떠나는 자녀를 포기하고, 마침내는 우리의 일과 건강까지 포기합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러서도 양손에 모든 것을 붙잡고 포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우리는 간혹 보게 됩니다. 이는 영생의 소망이 없는 이들이 삶의 끝자락이라도 붙들고 싶어하는 절박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늘 포기하는 것을 훈련함으로써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매일 잠을 자는 것도 일종의 죽음의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 존 노이하우스는 “날마다 잠에 드는 것은 작은 죽음이며, 진짜 죽음을 위한 리허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여섯째로, 자신의 죽음을 깊이 생각하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임종 때에 모인 사람들, 장례식, 매장, 땅 속에서 서서히 부패하는 자신의 몸, 그리고 자신이 완전히 분해되어 완전히 변화된 모습으로 부활하기를 기다리는 광경을 마음 속으로 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회복해야 할 깨어진 관계가 있는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나 갚아야 할 빚이 있는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해줄 수 있는데에도 마냥 미루기만 한 것들이 있는가?

일곱번째로 우리는 죽음 자체를 하나의 신앙 훈련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일생을 거쳐 하나님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시고 인도하신 것을 감사하며 경배하는 것은 신앙의 훈련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통해 우리는 삶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또한 죽음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업적과 성취에 종지부를 찍고 무엇이 계속해서 남고, 무엇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앞두고 잊어서는 안될 것이 주님 앞에 어떻게 설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 삶을 평가받게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5:10) 그때를 대비해서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 죽음에 대한 강요와 미화의 거부

죽음을 수용하는 것과 죽음을 미화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낙태와 자살, 안락사 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는 행동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강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어떤 행동이라도 자기나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부과하는 것을 살인으로 규정합니다. 죽음의 주권을 가진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죽음은 믿음으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방선기)

▲ 죽음을 생각하며 드리는 기도

삶과 죽음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죽음을 준비하는 사역을 잘 감당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에게 죽음은 부활의 새 소망임을 진실로 깨닫고 고백하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지혜를 가져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며, 더욱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인생의 고난 속에서 죽음을 배워가고, 포기하는 삶을 배워가면서 죽음을 준비하게 하여 주소서. 그래서 마침내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하나님을 경배하며 감사하는 아름다운 시간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그리고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축복을 나누는 귀한 사역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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