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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상선약수
댓글 0 건 조회 7,715 회
작성일 12-07-0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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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일, 고단한 일
IVF 「대학가」 2012년 7·8월호: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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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눈꼬리가 가볍게 떨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따금 깊은 한숨을 내쉬던 여자는 결국 손을 뻗었다. 여자의 시선과 손이 향한 곳에는 탐스런 열매가 가지 끝에 위태롭게 달려있었다. 여자는 무엇에 홀린 듯 몽롱한 눈빛을 띄며 열매를 입으로 가져갔다. 향기롭고 달콤한 액체가 이빨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여자는 눈을 꼭 감고 천천히 과육을 음미했다.

잠시 후 여자는 열매를 하나 더 따서 남자에게 가져갔다. 남자는 잠자코 여자의 말을 들었다. 과즙의 달콤함과 과육의 부드러운 식감에 대한 여자의 묘사에 눈과 귀를 집중했다. 남자는 여자의 현란한 말에, 다채로운 표정과 손짓에 넋이 나갔다.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여자의 손에 있던 열매를 받아들고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다. 마침 혈당이 떨어진 상태여서 열매를 먹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안 돼!” 나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당연하다. 그들은 책 속의 등장인물이고 나는 책 바깥의 독자니까. 나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읽으며 흥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야기가 지금 내 이야기의 서막(序幕)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금단의 열매를 먹은 남자와 여자는 낙원에서 추방당했다. 그들은 낙원 밖의 세계에서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 가혹한 운명은 남자와 여자의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어리석음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일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마다 더욱 강하게 그들을 원망했다.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아이를 낳으며 그들에게 욕설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의 고단함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하지 않는 삶을 꿈꾼다. 그래서일까? 동서양을 막론한 고대의 신화 속 ‘낙원’은 ‘일하지 않고 편히 즐기는 곳’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천국을 이해하는데도 이 이미지가 강하게 반영되곤 한다.

이런 식으로 낙원을 이해하고 있었을 때, 나는 일을 저주로 받아들였다. 다시 굴러 떨어질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했던 시지프스 처럼, 추방자의 후손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이 바로 일이라고 생각했다.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 그러나 언젠가 주님 계신 천국에 가면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것…… 그것이 일에 대한 나의 이해였다.

그러나 이제는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성서가 일에 대해 그린 것과 사뭇 다른 그림을 그려왔다. 내 그림은 성서보다 다른 신화의 영향을 훨씬 많이 받아왔다. 구약성서와 비슷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고대 근동의 신화들은 울타리나 담장, 가시나무와 사나운 짐승 등으로 폐쇄된 공간이었다. 고대 근동 신화의 낙원은 외부와 차단된 채 편히 향락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었다.1)
 
반면 구약성서의 낙원은 일하는 곳이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남자에게 일거리를 주시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낙원의 남자는 결코 무위도식(無爲徒食)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름 짓기’라는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남자에게 이 일을 맡기셨을까? 혹시 하나님은 만들기는 잘하시지만 이름 짓는 것에는 자신이 별로 없으셨던 걸까? 나의 불경한 상상과 달리 하나님은 이미 낮과 밤, 그리고 하늘, 땅, 바다에 이름을 지어주셨다. 굳이 남자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분께 부족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남자에게 온갖 짐승과 새의 이름을 짓도록 명령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은 일의 신성함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낮과 밤에, 그리고 하늘과 바다와 땅에 이름을 지어주신 하나님은 당신이 하던 일을 남자에게 맡겨주셨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은 그 자체로 창조의 한 부분이며 피조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였다. 남자는 이름 짓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에 동역자로 참여했다. 그리고 남자를 동역자로 초청하신 하나님은 맡긴 일의 결과를 인정해 주셨다. 그가 불러준 이름이 곧 각 생물의 이름이 되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기 직전, 땅을 갈고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서 초목과 채소가 아직 땅에 자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슬쩍 들려준바 있다. 그리고나서 창세기는 하나님이 흙을 빚어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고 이야기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경작하게 하려고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낙원을 경작하고 지킬 사명을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명, 곧 땅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사명은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것이었다. 오직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생기를 불어넣으신 사람,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누리는 사람에게만 주어진 사명이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일하라는 사명을 주신 것이다. 일은 타락의 결과로 받은 저주가 아니었다. 일은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 그 자체이다!

그렇기에 “먹고 살려고 일한다”라거나 혹은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일한다”는 말은 결코 자조적 냉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먹고 사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신 생(生)을 이어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하나님이 마련해 두신 인간의 존재 방식, 곧 일함으로 생을 이어가는 것은 두 말 할 필요 없이 고귀하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의 가치는, 자아를 실현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가꾼다는 식의 뜬구름 잡는 이야기보다 앞서 존재한다. 땀 흘린 수고의 대가로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중요한 방편이다.

하지만 일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일의 고귀함을 외쳐도 실제로 일하는 것은 여전히 고단하다. 일 그 자체로 고단할 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성품의 상사·동료가 주는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게 사람을 고단하게 한다. 또한 일터의 관행에 몸과 마음을 맞추라는 압력은 때때로 심각한 윤리적 고민을 안겨주기도 한다.

나는 그런 일의 고귀함과 고단함을 번갈아 경험하며, 사도 바울이 말한 ‘정사와 권세’에 대해 조금씩 눈을 떠갔다. 본래 ‘정사와 권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지탱하고 운영하는 선한 질서였다. 그러나 현재의 ‘정사와 권세’는 “주어진 한계를 벗어나 타락”했다.2) 그리고 에베소서 6장이 보여주듯이,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타락한 권세들과 마주치고 있다. ‘정사와 권세’는 인격성을 띄고 다양한 형태로 인간을 짓누른다. 영적인 존재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거나 겁박하는 한편, 사회 구조와 제도·조직 등의 모습으로 같은 일을 하고 있다.3)
 
일의 고귀함을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사와 권세’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의 고단함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할까? 아니다! 우리 왕 되신 예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정사와 권세에 대하여 승리를 선언하셨다. 빌립보서는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께서는 모든 권세들을 이기셨으며, 우리는 이기신 그분과 더불어 권세들을 정복하는 일로 부름 받았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떻게?”라는 질문이다. 폴 스티븐스는 역사 속의 신앙 공동체가 권세와 싸워왔던 방법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귀신의 문제로 보일 때에는 중보기도를 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사탄에게 점령당한 구조의 문제로 보일 때에는, 제세례파와 메노나이트가 하듯이 무력하게 고난당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문제가 깨어지고 타락한 악한 구조일 경우에는, 하나님의 섭정으로 거기에 들어가 정치·사업·경제·정부·미디어 등의 영역에서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그런데 그 악한 구조를 고치는 게 도무지 불가능하다고 평가되면(마르크스주의의 자본주의 분석이 그렇듯이), 의로운 혁명을 일으켜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할 것이다.”4)
 
기도, 무력하게 고난당함, 변혁적 참여, 구조 교체의 네 가지 방법 가운데 우리는 어떤 것을 선택 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답은 각자가 처한 정황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며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행위이다. 거기에는 아르바이트(part-time job)와 상근직(full-time job)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일의 고귀함을 깨닫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만 일의 고단함에도 단호하게 맞설 수 있다.
 
홍정환 | IVF 일상생활사역연구소 자료개발위원
 

<함께 나눌 이야기>

●“일은 고귀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읽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나누어 보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고단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권세와 싸워왔던 네 가지 방법 중에서 일의 고귀함을 회복하기 위해 지금 내게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고 그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추천 도서>

●폴 스티븐스.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홍병룡 역. 서울: IVP, 2009.
일이 하나님의 사역임을 설명하는 한편, 일터에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조언을 제공한다.
●벤 패터슨. 「일과 예배」. 김재영 역. 서울: IVP, 1997.
일과 예배는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두 영역을 통합해서 생각하고 살아내도록 돕는다.
●레이몬드 바케 외. 「일의 즐거움 워크북」. 정희원 역. 서울: 디모데, 2010.
일과 관련된 인간의 목적에 대해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지를 10주간 공부할 수 있는 소그룹 교재. 강의 DVD가 포함되어 있다.

<각주>

1) 엄원식, “고대 근동의 잃어버린 낙원 회상에 대한 비교 연구,” 「복음과 실천」 제15집(1992년 가을호), 158.
2) 마르바 던, 「세상 권세와 하나님의 교회」, 노종문 역 (서울: 복 있는 사람, 2008), 51.
3) ‘정사와 권세’에 대해서는 마르바 던의 책 제1장 “정사와 권세_ 창조, 타락, 그리고 그 이후”를 참고하라. 혹은 필자의 블로그에 게시된 요약지를 참고하라.
http://seekerjh.tistory.com/182.
4) 폴 스티븐스,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홍병룡 역 (서울: IVP, 2009), 15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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