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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이야기 3월 일상사연 - 강동호님(목사, 미국 양로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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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 건 조회 755 회
작성일 23-02-28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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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사연 코너는 폴 스티븐스가 제안한 인터뷰 질문에 기초해서, 많은 분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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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일상사연의 주인공은 '일과 신앙의 관계에 대한 7 가지 질문'의 답이 아니라 많은 내용을 담은 이야기를 보내오셨습니다. 특별한 일상사연을 소개합니다.

저는 부산대를 졸업한 87학번 강동호입니다. IVF 활동은 87년 여름 전국 수련회에 참석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95년 침례신학대학원에 들어갔고 99년에 미국 루이빌에 있는 서든 침례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후 2003년부터 미국 LA에서 교회 사역을 본격적으로 했습니다.

사역은 한국에서 전도사로 주일학교를 했지만 미국에서는 목사로서 중고등부 사역을 거쳐 성인 사역을 전임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교구 사역과 행정 사역을 같이 하기도 하면서 교회 전체 사역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2010년 사역을 그만두고서는 갑작스런 생활고에 힘들기도 했지만 다양한 세상의 직업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목사로서의 사역을 못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무엇이든지 봉사하고 싶었습니다. 교회 사역을 하면서 교회의 일이 아니지만 마음이 갔던 사역이 양로 병원에서 말씀 사역을 하던 일에 마음이 갔습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이 자신의 일이 아니어서 인지 잘 하려 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행정 목사로서 다른 사역자들의 순서까지 맡아 양로 병원에서 설교하면서 나이 들어 늙고 힘이 없어 여러 가지 질병과 무기력 속에 죽을 날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에게 마음이 많이 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들에게 마음을 다해 설교할수록 어르신들의 기뻐하며 힘을 얻는 반응이 너무 좋아 오히려 격려가 많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면서도 양로 시설에 계신 어르신들을 돕는 봉사를 찾던 중 한미 치매센터를 운영하시는 목사님과 연결이 되어 매주 토요일에 치매가 있는 어르신들을 돕는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치매를 가지신 어르신을 모신 가정이 토요일 하루만이라도 치매로 인한 힘듦에서 벗어나 자유의 시간을 가지도록 돕자는 뜻을 세우고 치매 어르신들과 함께 예배, 성경공부, 문화 활동을 통해 어르신을 섬기는 활동을 하는 곳입니다. 토요일 오전 9시에 어르신들을 댁에서 차로 모시고는 와 모임 장소에서 점심까지 제공하며 오후 4시 전에 다시 집에 모셔다드리는 활동입니다. 치매 어르신들이기에 만일을 대비해야 하기에 1대 1 봉사를 원칙으로 해서 봉사자가 많을수록 모실 수 있는 어르신들을 더 모실 수 있게 하였습니다. 

물론 치매중증환자는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고 전체모임을 하기에 적절치 못하며 그 중증 정도가 되면 가족들이 집에 더 이상 모실 수 없고 병원에서 24시간 케어가 필요하기에 중증 전의 치매 환자를 중심으로 치매 예방 사역까지 포함하여 사역하였습니다. 그래서 봉사자 모집과 교육이나 치매예방 혹은 치매에 대한 교육도 치매 사역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를 통해서 아내와 세 명의 자녀들도 이 봉사에 몇 년 동안 함께 하였습니다. 

치매 사역을 하면서도 다른 날에는 생활을 위해 직업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각자 다른 교회를 다니시는 몇몇 분과 하는 화요일 성경공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날에는 여러 가지 일로 벌이를 했습니다. 그중 한 가지 일이 우버입니다. 택시 운전과 같습니다. 4, 5년 정도 우버 운전자로 있었습니다. 아찔한 위험한 순간을 몇 번 경험하고 나니 정말 운전하는 것이 무서워 우버를 쉬기도 했지만 생활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하기도 했습니다. 그때가 사는 것이 정말 힘든 때였습니다. 아파트 렌트비를 몇 달 못내 독촉을 받기도 하고 전기가 끊어지는 날도 있었고 크레딧 빚에 파산을 해 빚 청산 절차를 밟기도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길을 찾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었고 하나님의 보여 주시는 새로운 길이 열렸고, 물론 하나님은 모든 삶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아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는구나’ ‘아 하나님께서 아시는구나' 

Gas(휘발유)비가 없어 차 운전 어쩌지… 마음이 무너지며 운전을 하고 있을 때 멈춰선 횡단보도에 작은 개가 산책하며 어떤 여인과 같이 파란 신호에 내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작은 개가 자기 목에 걸린 줄에 자신의 다리가 엉켜 잘 걷지 못하자 몸을 이쪽 저쪽 비틀어 줄에서 벗어나려 했고 여의치 않자 이리 저리 뛰며 줄을 넘으려 했지만 개 주인 역시 개의 형편을 알고 풀어줄 심산으로 줄을 이리저리 돌리는데 서로 맞지 않아 길 중앙에 서로 뱅뱅 돌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꼭 그 개의 모습이 내 같다는 생각에 개를 응원하며 안타갑게 바라보는 순간, 개의 주인이 점점 상황이 여의치 않자더 아애 개를 덥석 안더니 횡단보도를 안은채 지나갔습니다. 그 개를 안아 드는 여인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아시는 구나 지금의 나의 형편을' ‘힘내라 위로해 주시는구나'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누가 Gas비를 주는 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간당간당하게 운전을 해야했지만 힘이 나는 것을 느낍니다. 견딜 수 있게 하십니다. 소망을 품게 하십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십니다. 상황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내가 변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이런 작고 보잘 것은 잔잔한 은혜를 위기의 순간에, 힘듬의 순간에 맞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조련이 나는 계속해서 성장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불과 같고 거대하고 압도적인 것이 아니라 작고 따뜻하고 푸근하며 잔잔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굳고 단단하며 뜨거운 믿음의 뿌리를 만드는 것같습니다. 또하나 늘 깨닫게 되지만 새삼스럽게 경험한 것은 생각지도 못한 것에서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하심이 이루어짐을 봅니다. 교회 사역이 끝나면서 아픈 어르신들을 향한 마음이 치매 사역으로 이어지더니 경험한 적도 생각한 적도 없는 양로 시설에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리셉션이스트로 매니저로 주일에는 시설 안에 있는 교회의 협동목사로. 

이 시설은 영어로 Assisted Living Facility 한국어로는 양로 호텔이라 합니다. 양로원과 양로 병원의 중간쯤 되는 시설이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이곳은 병원도, 재활시설도, 요양원도 아닙니다. 더 이상 혼자 생활을 할 수 없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든 어르신들이 들어오는 곳입니다. 치료가 필요한 분은 병원으로, 재활이 필요한 분은 재활병원이나 시설로, 요양이 필요한 분은 요양 시설로 가겠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병원이나 특별한 시설에 가야 할 분명한 분들이 아닌 분들이 혼자 생활이 힘들어, 다른 가족의 구성원들이 늘 돌볼 수 없는 분들이 살기 위해 오시는 시설입니다. 그래서 간호사가 있어 약 관리와 어느 정도의 치료를 하고 조리사가 있어 식사를 관리하고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위해 Caregiver(요양사? 도우미? 한국말로 어떤 단어인지 잘 모르겠네요)가 있습니다. 특정한 분야의 노인 전문 시설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노인 돌봄을 위한 시설이라 여기면 되겠습니다. 저는 그곳 사무실에서 일하며 어르신들을 돕고 있습니다. 단지 어르신들과만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일의 특성상 어르신들의 가족과도 자주 연락을 해야 하며 어르신들을 돕는 다른 직원을 돕고 관리하는 일도 해야 합니다. 또한 바쁘면 간호사 옆에서 그들의 일(치료행위가 아닌 일)도 도와야 해야 합니다. 게다가 원장님 혹은 사장님의 일도 보조해야하고 시설관리에도 관여해야합니다. 관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에 적당한 선이 필요하기에 대화와 좋은 인간관계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교회로 따지면 행정 목사가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세상일에 행정 목사로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여기게 되었습니다. 물론 세상의 직업으로서의 일은 교회 안에서의 일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러나 일을 하는 나라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똑같은 본인이기에 접근이나 모양은 다를 수 있어도 중심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길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그리스도인)을 가지고 일을 해야지 하면서도 직업적인 일의 내용에 나의 정체성을 담는 것이 처음부터 분명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해보는 것이며 모르는 일이었기에 먼저 세상의 일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이 중요하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일은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일을 대하는 태도와 자세는 분명한 나의 정체성을 가지고 나가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기에 이것은 할 수 없고 저것은 반드시 해야 하며 특정한 행동이나 말로 나의 기독교적 특성을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말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나 말이 아니라 그 뒤에 담겨 있는 그 사람의 중심입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느냐, 나의 신앙의 중심이 있느냐입니다. 그것은 저의 일의 처음 시작부터 여기에서 시작하면 전체적인 저의 행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저에게 충고하였습니다. 목사일 때는 목사로, 매니저일 때는 매니저로 일해야 한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는 말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구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분하게 보이는 것은, 다르게 보이는 것은 사실 하나의 중심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후 예수님이 삶에서 이 둘의 차이를 보이며 다르게 접근하나요? 아니라 생각합니다. 법정에 보이신 예수님의 침묵이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임을 더 크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또한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다르게 보이지만 그 중심은 같기에 결국 다른 것이 아니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지금의 일을 통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어르신을 돕는 일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일은 일이지 뭐 일의 중심이 어디 있어? 예, 일은 일이지요.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상황과 형편 속에서, 저마다의 생각과 과거의 배경 속에서 하는 일이기에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같은 일인데 같은 행동과 말이라도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특히 어르신을 돕는 일이 많은 경우에 허드렛일이라 힘들고 더럽고 반복적이며 지루한 일입니다. 거기에서 사람의 중심 혹은 성격이 다 드러나더군요. 성질머리도 그 사람의 중심에서 나오더군요. 게다가 더 많은 인생을 살은 어르신들이기에 같은 말과 행동이라도 다른 사람을 파악하고 눈치를 채고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한 지를 본능적일 정도로 잘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단지 나이 들어 힘없기에 직원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지만 한 성격하시는 분들이 많아 왕왕 갈등이 생깁니다. 게다가 자신의 약함을 무기로 사용하는 어르신들까지 있으니 다른 직장처럼 이곳의 일도 일 그 자체뿐만 아니라 일을 둘러싼 사람을 잘 파악해야합니다.

저는 그것이 저의 신앙의 중심에서 나오기를 바랐습니다. 더구나 주일에는 목사의 역할을 하기에 목사로 비치는 내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때는 하나님이 욕을 먹을 수 있으니 게다가 한 건물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일을 하게 되면 결국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해도 그 중심이 어떤지 알게 됩니다. 이곳의 모든 직원에 대한 호칭이 기본적으로 선생님입니다. 간호사도, 식당 직원도 모두 선생님이라 호칭합니다. 목사님 혹은 선생님으로 불리는 저의 호칭이 결국에는 어떤 호칭이 우세할지가 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에 달려 있겠다 여겼습니다.

첫째, 마음의 중심을 드러내는 삶이 더 행복한 삶입니다. 이것은 일하는 내내 저를 괴롭힌 문제입니다. 마음의 중심에 신앙이 있고 그 신앙에서 나오는 선한 삶이 선함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나는 향한 판단의 도구가 되는데 처음에는 긍정적인 효과보다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또 이것을 시험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나쁘게는 이 선을 선으로 포장한 악함으로 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두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과 함께 일하면서 이들은 끊임없이 나를 시험하거나 도전합니다. 어떤 때는 이용당해 화가 나기도 하고 비참해지기도 하고 스스로를 미련하다 책망하기도 하곤 했습니다. 내 일이 아니지만 도와달라는 요청에 선한 마음으로 함께 했더니 결국 내 일이 되고 그 일에 대한 책임도 내가 져야 할 상황이 되고 나아가 잘못한 그 앞의 일까지 바로잡아야 할 상황에 직면하기도 하고 직원만이 아니라 어르신들의 가족도 나를 이용하려 합니다. 교회 집사라는 사람이 자기 어머니의 일을 나에게 미루고는 그 책임을 나에게 물을 때 ‘본인이 한다고 했잖아요? 왜 빨리 안 하시는 거예요?’라며 달려들 때 점점 나의 쓸데없는 일은 많아지고 그에 따른 책임과 평가도 많아집니다. 

저를 길들일 심산인지 부당한 요구에 신경을 건드리는 말투와 표정 게다가 미안한 표정이지만 전혀 미안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일을 부탁하는 심지어 이 일은 본래 나의 일이었다고 말하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어떤 어르신은 자신의 필요한 것을 조금씩 조금씩 더 요구하며 길들이려 합니다. 그러다가 안될 것 같으면 화를 내며 비난합니다. 앞에 도와드렸던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집니다. 다른 어르신들보다 나은 대접과 서비스를 받고 싶어 교묘히 이용하려는 어르신들도 있습니다. 구별되는 것, 차별되는 것을 좋아하는 그렇게 인생을 살아오신 분들인가 봅니다. 네가 목사니까 이 정도는 도와주어야하지 않느냐며 도전하는 동료, 어르신, 그 가족도 있고… 

그러나 결국 서로를 몰라서 그렇지 사람의 마음의 중심 곧 선함을 알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도 자신의 중심을 드러내며 선하게 다가옵니다. 일은 여전히 많고 분주하지만 저에게 지혜가 생겨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은지 점점 더 잘 알게 됩니다. 의식하지 않았는데 어느날 명령조였던 한 선생님이 저를 목사님으로 부르며 다가오는 것을 볼 때 '아 많이 나아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설은 100여 명의 어르신들이 들어와 생활하시고 매월 5명 정도의 어르신들이 시설을 나가시고 새로 들어옵니다. 물론 좋아져서 나가시는 분들은 없습니다. 돌아가셔서 혹은 아프셔서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매번 새로 오신 분들과 그 가족들과 서로 맞추는 과정에 일들이 벌어집니다. 반복되는 것이지만 선함으로 다가가는 것이 행복한 사회생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혹은 여러 가지 경험이 쌓이면서 그 사람의 중심을 보게 하기에 결국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물론 끝까지 가면을 쓰고 살 수도 있겠지요. 사람이 한 가면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가면을 쓴다면 다 알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4년 정도 이 일을 하면서 지내보니 대부분의 경우 그 사람의 중심을 결국에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마음 중심의 선함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죄 많은 세상의 일이라 하더라도 언젠가 그 일에 합당한 풍성한 열매를 거두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벧전 2:20]) 최소한 선을 행하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실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어르신들을 잘 섬길 수 있는지 찾을 때 발견한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신다하시는 데 그 사랑이 무엇인지, 예수님이 내 사랑 안에 거하라 하셨는데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어르신들을 돌보는 세상일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일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람을 섬기는 일이기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내가 가진 능력, 힘과 지혜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명한 한계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한계를 경험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인내심의 한계가 이르게 하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치매를 가진 어르신의 특징중 하나는 무엇인가에 집중하게 되면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줄기차게 요구하게 됩니다. 자신의 요구를 들어 줄 때까지 찾습니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요구나 필요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차라리 상대를 안 하면 되는데 괜히 선한 마음으로 도와주려다가 크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막무가내 가족도 있습니다. 자신의 부모가 치매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모의 말만 믿고 선생님들의 육체적, 정신적 수고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멸시하는 언사도 서슴지 않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조금만 틈이 있으면 재판을 걸려는 미국 문화의 특성으로 오히려 아무런 수고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현실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만큼 공허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이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적용하고 실천하려 노력하다 보니 그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에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시고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에 십자가의 고통을 감당하시고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주님의 말씀(요 13-15장)이 십자가에 죽기 전 남겨질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새로운 삶의 길을, 결코 세상에서 승리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하시고 여기에 더하여 성령을 보내겠다 하시는 이 모든 사랑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일터에서 저는 긍휼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 사랑이 나의 신앙의 눈을 더 뜨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고 그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나도 또한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야 한다 여기기에 이것을 또한 적용해 보았습니다. 긍휼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힘없고 연약한 어르신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으로, 몸을 가누지 못해 버둥거리는 어르신들을 불쌍히 보는 것으로 나아가 저는 괴롭게 하는 어르신들과 가족들을 긍휼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드는데 옆에서 자는 아내가 코를 곱니다. 어느 날부터 드르렁 거립니다. 피곤한가보다 하면서 자려는데 그 소리에 잠이 오지 않습니다. 좀 더 있으니 짜증이 납니다. 빨리 자야 되는데 조급해집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사랑에 저를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속에서 올라옵니다. 부족한 나를 만나 고생하며 그래도 옆에서 잘 버텨 주었구나. 젊은 시절에 안 하던 것을 하는 것은 나로 인한 것이구나 하니 아내에 대한 긍휼의 사랑이 나의 마음속을 가득 채웁니다. 아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가만히 있질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아내를 붙잡고 기도합니다. 축복합니다. 간구합니다. 그리고 아내의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며 쉽게 잠이 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나를 바꾸는 것을 느낍니다. 이 긍휼을 모든 관계에 적용해 보니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음을 느낍니다. 어르신들의 괴롭힘을 사랑으로 또 한 번 인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족들의 불평과 잔소리를 한 번 더 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료 선생님들의 여러 요구에 정신줄을 놓을 때에 정신을 차리게 해 줍니다. 실패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나의 무기를 놓쳤을 때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그 긍휼하신 사랑이 나를 사로 잡음을 느끼며 나의 무기를 되찾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배웁니다.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삶이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주신 말씀이 삶에 적용되며 그 말씀의 의미와 복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보통 그 말씀은 그 삶과의 연결점이 얼마나 큰가에 따라 그 말씀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얼마가 되는지 결정합니다.

최근 저를 사로잡은 말씀이 한 달이 넘도록 나의 묵상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한국에 계신 어머님이 넘어져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뼈가 부러졌다느니 수술을 해야 한다느니 말이 오갑니다. 마음은 타고 속이 뒤집어 집니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힘이 빠집니다. 미국에서 내 어머니 같은 어르신들을 섬기는데 내 부모 내 엄마를 내가 도울 수 없다는 것이 나를 미치게 만듭니다. 내 엄마도 못 도우면서 남의 어르신들을 돕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합니다. 어머니를 향한 긍휼의 마음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실질적으로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기도하며 이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미국에서 여기 있는 어르신들을 내 엄마와 같이 섬기겠습니다. 한국에 계신 내 엄마를 누군가가 나와 같이 대접하게 하여 주소서'하고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었습니다.

교회 사역을 그만둔 지 10년이 넘어가지만 지금 일하는 이 일터가 저의 교회되었습니다. 신앙이 없는 분들도 있고 믿음이 있지만 믿음 없는 분보다 더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분들도 있고 참 신실한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한 가지는 모두들 죽음을 가까이 두고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어르신들을 도와 믿음 어린 삶으로 이끌어 무엇보다 주님의 품안에 편안히 안길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여러 가지 일을 감당하고 어려움 상황을 만나도 인내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하여 그 사랑 안에서 모두가 함께 기쁨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요 15:1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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