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예배 : 제3장 소망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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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작성일 08-02-28 15:56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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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소망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의 계속되는 삶은 죄의 저주 아래에서 소망 없는 삶이 되었음
인간과 관계된 모든 것이 악에 오염되어 있으며, 그 안에 죄와 사망의 병균을 가지고 있음
이 투쟁과 걱정, 먹고 살기 위한 단조롭고 괴로운 일과 무의미에 대한 희망은 없는가? 살기 위하여 해야만 하는 이일에 생명이 있는가?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구원하신다! 예수님은 내면 생활뿐만 아니라 일이라는 외적인 생활까지도 구원하신다.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조준하고 있지만, 그 반경은 우리의 일을 포함한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에까지 확장된다.
불화에서 평화로
골1:21-22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리스도가 치른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의 일이 타락한 이유, 즉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는 치유되었다.
고아가 아닌 자녀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될 때, 일과 싸우는 이유와 일에 대한 끊임없는 걱정은 사라진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줄 것이다.
누가복음 12장-가족을 먹이고 입히는 것은 그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 우리의 책임은 단 한가지이다. 아버지께 순종하는 자녀가 되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
그렇다면 굶어 죽어 가는 그리스도인, 실업자등은?-대답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약속된 구속을 여전히 대망하고 있는 무너진 세상에서의 고난과 악의 신비의 일부이다. 다만 맨 처음 예수님으로부터 이 기도를 배운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며 이 땅의 저주받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묵상하면 큰 위로를 받는다. 예수님은 그들이 사정이 그러할 지라도 하나님은 의롭고 사랑이 많으신 우리의 아버지시며 고아와 과부들과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의 대변자이심을 그들과 우리가 알기 원하셨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이다. 하나님 대신 바로 우리가 그 아버지가 된 듯이 느끼고 행동하는 것은 부적절하고 부자연스런 역할 전도이며 심지어 무의식적인 신성모독이다.
일용할 양식의 기적
이것이 일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우리의 안전과 행복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책임은 하나님이 지신다. 일을 제공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며, 우리의 일이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화목될 때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될 때 우리와 일은 적절한 위치에 자리하게 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 자체가 우스꽝스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일을 삶의 지상 최대의 과제로 삼을 때,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일이야말로 우리를 가난이나 무가치나 맹목으로 빠지지 않게 막아주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할 때 일은 우스워질 수 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과 안전이 되신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안전이 되실 때 우리가 하는 일은 기쁨과 경이가 될 수 있다. 각 사람은 다양한 일로-선생으로, 웨이트리스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기술자로, 합자 회사 간부로-기적같은 추수를 거두게 하는 씨들을 매일 심고 있다. 각 사람이 먹고 입는 것은 경제체제를 구성하는 각 부분의 총합보다 훨씬 더 크다. 우리를 먹이고 입히시는 분은 여전히 우리 하나님이시다.
한 여인의 태 속에 자리한 광대함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하심으로써 우리의 일을 구원하셨다. 기독교 신앙의 최고의 신비는 1세기의 유대인이며 목수이자 순회 설교자였던 나사렛 예수라는 사람을 통해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취하셨다는 충격적인 복음서의 주장-성육신의 신비와 기적
마리아의 육체 가운데 있는 작은 공간(자궁)에 하나님의 광대함, 영광이 감추어 있었던 것만 아니라 나사렛동네의 작은 목공소에도 있었다. 나무를 창조하셨던 그 하나님이 톱으로 나무를 켜시고 못질을 하시고 바닥을 치우시고 쓰레기를 버리시고 돈을 지불하셨다.
평범에 영광을 입히다.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평범을 거룩하게 하셨으며 범용을 특별한 것으로 만드셨다.
윌리엄 바클레이의 기도문 “오 하나님 우리 아버지시여, 어떻게 영원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사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지를 우리가 기억하나이다...우리는 예수님이 다른 노동자와 같이 하루의 일을 행하셨음에 감사드리나이다. 예수님이 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문제들을 아셨음을 감사드리나이다. 대중을 섬기는 일의 당황스러움과 분노를 아셨음을 인하여 감사드리나이다. 하루를 벌어서 사셔야 했음을, 그리고 매일의 일과 생활과 삶의 지치는 일상에 직명하셔야 했음을 인하여 감사드리나이다. 그리하여 각각의 평범한 과업에 영광을 입혀 주셨음을 인하여 감사드리나이다.”
성육하신 그리스도는 우리가 세워 놓은 성과 속 사이의 벽을 단번에 영원히 무너뜨리셨다. 물질세계가 하나님편에서는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시고 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매개임을 나타낸 것이다. 성과 속 사이의 담을 무너뜨리심으로써 성육신은 평범한 것들에 영광을 옷입혔다.
성례적 임재
성육신이라는 사실만이 우리와 우리의 일을 어둠의 지배로부터 구원한다. 성육신은 일을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을 섬길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영역으로 만듦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성육신은 일이 성례가 될 가능성을 제공한다.
직장의 작업대나 교회의 성찬대 둘 다 믿음에 접근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중세의 수도사 로렌스 형제-성육신 때문에 수도원의 부엌에서 솥단지와 프라이팬을 닦으면서 그리스도와 교제할 수 있었다.
일을 위한 연금술
17세기의 시인이자 사제 죠지 허버트의 기도문 “나를 가르치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시여. 만물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옵소서 그리고 제가 행하는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하여 하듯 하게 하옵소서” 주님을 위하여 하듯 일하겠다는 기도야 말로 일을 위한 연금술이라고 말함, 기도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을 성찬으로 바꾸어 놓는다.
일상생활의 신학과 영성을 위한 기도를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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