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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생활 영성 - 제1부 노동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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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1 건 조회 6,622 회
작성일 08-02-2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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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을 위한 생활 영성 (Disciplines of the Hungry Heart), 폴스티븐스,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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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노동의 영성

1장. 믿음:노동의 참된 의미를 발견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는 어떤 일이든 차별이 없다. 물을 따르든, 접시를 닦든, 구두를 수선하든, 사도가 되든, 그 행위에 관한 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똑같다.” 윌리엄 틴데일

 

‘예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의 참된 의미이자 영성의 핵심이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살전1:3)안에서 일한다는 말의 뜻을 깊이 헤아려 본다면 하나님 말씀에 바탕을 둔 노동이 무엇인지를 영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설교라도 사단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될 수 있는 반면, 털실로 웃옷을 짜는 일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가 될 수 있다...노동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노동의 외형이 아니라 노동의 내면 곧 노동의 영성이다.

 

노동의 무익함

“사람이 해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라?”(전2:22)

그리스도인이 노동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복합적-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이지만 저주이기도 하다..노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재는 척도이자 거짓된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준이라는 우상이 되기가 쉽다.

전도자는 해아래서 행하는 노동은 덧없으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며, 결실이 없고, 공정하지 못하며,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을 그만두고 최대한의 쾌락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이 무익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노동이 무익한 것이 되도록 의도하신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복음전도자인 노동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지음받은 존재라는 결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 노동(안)에서 만족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노동을 통해 하나님안에서 만족함을 발견하게 된다.-믿음으로 인해 생기는 미묘하고도 명백한 차이가 있다.)

“한 번밖에 없는 인생, 곧 지나가리라. 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히 남으리라.”-이 시의 원뜻은 가정, 공장, 학교, 사무실에서 믿음으로 행한는 모든 일이 영원히 남을 것이며 본질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 반대로 일 그 자체에서 의미를 찾기 위해 행하는 일은, 특히 우리 자신에게 영광이 되는 많은 ‘기독교적인’ 일은 결국에는 공허하고 실망스런 우상임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노동이 무익하다는 깨달음은 ‘숭고한 좌절감’으로 드러난다. 전도자의 거룩한 회의를 통해 우리는 노동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노동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복음전도자이다.

노동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고 섬기는 하나의 배경이 된다. 노동은 결코 영적인 생활의 기분 전환이 아니며, 그 창조 가능성과 정화의 힘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께 직접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노동의 의미이다.

 

예수님을 위한 노동

일의 결과가 자기의 가치에 대한 척도가 되고 자기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수단이 되는 것-일벌레의 특징. 그러나 믿음안에서 일하는 것은 그 이상이 요구됨, 외부인이나 구경꾼에게는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위한 노동은 비밀이자 신비임 (골3:22-24, 30p)

세가지 믿음의 비밀-①그리스도인은 일을 할 때 남모르는 매력을 발산한다. 보이기 위한 매력이 아님 ②그리스도인은 남모르는 목적을 갖고 일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일한다 ③그리스도인은 일을 할 때 남 모르는 상을 생각하고 있다. 주께서 주시는 유업을 기대

우리의 노동을 받으시는 예수님

믿음의 눈은 예수님이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는 것은 실제로 예수님이 그 자리에 계신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일어남-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의 ‘의외의 놀라움’

우리는 그 일을 예수님을 위해 하는 것이지, 그 일을 ‘믿음안에서’ 함으로써 얻게 될 이득을 위해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목표이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유업이나 심지어 노동의 기쁨이 목표가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섬기는 사역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일에 대한 섬김이나 부르심이나 요청에도 응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위하는 직접적인 길이라고 ‘사역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깨달아야 할 것...기독교 사역이라 할지라도 믿음안에서 행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암담했던 1930년대 대공황기 때 아버지가 그 손으로 생선을 다듬어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파시면서도 불평이나 과거에 대한 미련없이 눈을 반짝이시며 언제나 믿음가운데 주님앞에서 주께 봉헌하듯 생선을 자르시던 모습을 생각할 때면, 나는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손과 지저분한 생선칼의 섬광위에도 임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칼빈 시어벨트

 

 

2장.사랑:그리스도인의 아마추어 의식을 회복하는 것

“하나님이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신다면, 일한다는 건 좋은 건가 봐요”“그래, 일이라는 건 좋은 거란다. 더구나 사랑 때문에 그 일을 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일이되지, 하나님의 일이 바로 사랑의 일이거든.” 죠지 맥도널드의 소설에서

 

아마추어-어떤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을 뜻하는 말인데 현재는 전문직업인에 반대되는 비전문적이고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곡해되고 있음

기독교 사역이란 본질적으로 아마추어의 활동임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법을 더 잘 아는’ 유급 전문 직업인에게 사역을 맡겨 버리는 경향이 생겨남. 사회에서도 근로자들은 전문 직업 의식으로 인해, 평범한 노동을 성스러운 섬김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영적 동기 하나를 잃게 됨. 그 동기는 사랑

사랑이 없는 노동이 어떻게 될 것인가? 노동에는 탁월한 성과보다 더 탁월한 것이 있다. 바로 사랑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직업을 묻지 말고 그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또 그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만 물어 보면 된다.” 어거스틴

 

아마추어의 원형

아담과 하와는 사랑이라는 유일한 소명을 세가지 직무로 늘려 수행함

①하나님과의 교제-아담과 하와는 웃는 중에도(이 역시 예배행위였다), 코뿔소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중에도 자신의 피조물됨과 하나님을 기뻐하고 있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도록 하는 훈련은 직업적인 사역자나 수도원의 수도사에게만 해당되는 소명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를 시간제 직업으로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다른 종교로 만드는 일이다.

②공동체 건설-인류를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 불가피하게 성적 존재로 만드신 사실, 두성(性)이 함께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의 사회적인 체험과 언약의 관계를 신비롭게 드러낼 수 있다.(엡5:32)..따라서 인간의 의무이자 운명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이웃됨을 표현하며 함께 인간이 됨을 기뻐하는 것, 한마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시간제 활동으로 격하시켜서는 안된다. (시간제남편? 시간제 아빠?)..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언제나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한다...우리의 소명(vocation)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바쳐야 하지만 직업(occupation)에 대해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③공동 창조성-땅을 경작하고 문화를 가꾸는 인간의 사명, 통치자요 섭정으로 지음받음...땅을 유지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전임직무, 그러나 이것이 공동체건설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일과 분리되면 우상숭배가 될 것이다. 그것은 설교나 다른 형태의 기독교 사역이 가사나 환경보존과 분리될 경우 우상숭배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지음받았다. 우리가 처한 곳에서 평상시의 일을 하면서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고 앞의 세가지 전임직무를 수행하고 하나님을 발견할 때 온전해진다.

 

사랑할 만한 일을 찾아서

‘사랑의 수고’(살전1:3)-모두가 자기 일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판에 박힌 일이라도 달리 일하는 방법을 찾아내든가 떠오르는 착상을 결합함으로써 그것을 사역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어떤 직업이라도, 심지어는 완벽하게 맞는 것 같아 보이는 직업이라도 우리의 영적인 노력 없이는 그 일에 대한 사랑이 오래 유지되기 어렵다.

소위 ‘회색지대’에 속하는 직업에도 이웃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있을까?...세상이건 교회건 어디에도 안전한 피난처는 없다. 이웃 사랑을 위해 일하는 것은 어느 곳에서나 쉽지 않다.

언제나 이웃 사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없다...우리는 은혜와 끊임없는 회개로 산다. 그러나 사랑의 기회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직업은 거의 없다...오로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일하는 주부와 같이..

 

사랑과 게으름과 일중독 증상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그리스도인이 노동을 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자신과 가족에게 사랑을 공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데살로니가의 게으름뱅이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것은 오늘날의 일벌레도 마찬가지다.

일벌레는 세가지 전임직무(교제, 공동체건설, 공동창조성)가운데 어느 한 가지에서만 자신의 정체성과 성취감을 찾으려 한다. 대체로 사회의 ‘공동 창조성’에만 모든 정력을 쏟아 붓는다. 일벌레의 모든 생활은 끊임없는 업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이들이 외부에 미치는 영향은 게으름뱅이와 마찬가지이다. 주위의 모든이들에게 짐이 된다. .일벌레들은 남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데 모든 사랑을 다 써 버렸기 때문이다...이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정서와 관계의 도둑이다.

게으름뱅이나 일벌레나 도덕적인 게으름이라는 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둘 다 그리스도인으로 일하는 것이 자아의 표현이나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다....게으름뱅이나 일벌레는 묵상하는 근로자가 되어야 한다.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자기 노동의 원천으로 삼는 진정한 아마추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랑을 받은 일꾼

루터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사랑의 관계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 사이의 사랑의 관계를 비교하면서 노동의 영성과 그리스도인의 아마추어 의식을 생생히 그리고 있다.(47.48pp)

어떻게 예수님은 목수의 일터에서 그런 천한일을 계속 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아직 한마디의 설교도 하시지 않고 하나의 이적도 일으키지 않으셨는데도 하나님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3:22)고 말씀하셨다. 이 사랑의 확증을 통해 예수님은 아마도 보잘 것 없는 일이라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할 수 있는 자유함을 얻었으며, 나중에는 이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하시게 된 것이다.

 

 

3장.소망: 하늘에 우리의 흔적을 남기는 것

기독교사역만 영원하지 이 세상의 모든 노동은 그리 의미있거나 영속적인 것으로 여져지지 않는 현실

 

마지막때의 게으름

살후3:6-15 게으름에 대한 경고-바울이 상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들, 헬라세계에서는 노동이 저주요 순전한 악이기에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특별한 행운이었다.

이런 가운데 바울은 사람들이 현재 있는 곳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은 노동을 한층 넓은 구도에서 다루고 있다. 노동은 전적으로 당신과 그 나라를 위해 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모든 사람이 부르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은 삶의 모든 국면에 관계된다.(엡4:1-6:20)

바울은 이중직업선교사가 아니었다. 자신의 섬김의 생애 전부를 예수님의 포괄적인 부르심에 대한 단 하나의 열정적인 반응으로 통합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거룩함과 세속적이라는 구별이 없었다.

마지막때임을 강하게 느낀다고 해서 우리의 노력을 걷어 치우고 기도하는데만 급급할 까닭이 없다...그리스도인에게는 가치있는 목표가 기다리고 있으며, 현재의 고단한 역사는 이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천상에 마음을 두면 이 세상의 불가해한 문제도 소망가운데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 있게 되며, 동시에 우리 자신의 노력에 어리석은 확신을 갖거나 완전한 미래를 추구하다가 실망 가운데 지쳐 나가 떨어지지 않게 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도래했고 또한 지금 도래하고 있다.

 

장거리를 뛰기 위한 준비

믿는자들은 먼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오늘의 일을 믿음으로 해야 한다.

고전15:58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일차적으로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있던 여러 사역을 가르키지만 여기에도 ‘돕는일’이나 ‘섬기는 일’과 같은 세속적인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주의 변모

가장 큰 소망-그리스도께서 피조계의 주님이시라는 것(골1:15-23)

그리스도께서는 종내에는 만물을 구원하실 것이.

롬8:19-23 피조물이 그 완성을 위해 ‘신음’하는 현재와 미래의 연속성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가는 시간을 두고 첫 번째 피조계의 재료를 사용하셔서 세상을 다시 만드실 것이며, 이 피조계의 재료에는 인간의 노동도 포함될 것이다. 우리는 공력가운데 어떤 것이 지속될 것인지 생각해보라는 권고를 받는다.(고전3:12-15)

 

우리의 흔적을 하늘에 남기기 위하여

우리가 매일의 노동을 통해 우주와 환경, 정부와 문화, 이웃, 가정 그리고 정사와 권세에 우리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예수님의 부활한 육체는 현생이 다음 생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가, 특히 물리적인 환경과 연관하여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가를 강력히 일깨워 주는 성경적 상징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고 있는 선과 악, 이 모든 것이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변모될 것이다. 그래서 ‘새’하늘과 ‘새’땅이 될 것이다.

 

사라지지 않을 노동의 흔적

만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요 또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라면, 모든 노동은 그 일이 집안 청소든 증권매매든 영원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우리의 소망은 놀라운 변모의 때를 자신있게 기대하는 것이다.

그 소망을 적용하는 길은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또 현재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과거의 결과를 다 돌려 놓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우리의 노동을 통해서 남겨 놓은 환경의 상처, 사회,문화,정치적 상처를 그 분이 언젠가는 다 변모시켜 주시리라고 믿는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 곧 지나가리라/그리스도를 위한 일만이 영원히 남으리라.”

 

생활영성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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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jpaul님의 댓글

jpaul 작성일

어제 모임때 이자료를 가지고 했었는데요 참 좋더라구요...ㅋㅋㅋ
좋은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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