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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롤하이저,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9장 성차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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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 건 조회 5,883 회
작성일 12-05-0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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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롤하이저,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손길, 포이에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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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차의 강

- 구조와 정신, 분노와 슬픔, 남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과 종교

 

오늘날 교회는 아주 근본적인 차원에서 위협받고 있는데, 거기에 성적 소외'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교회를 본인의 여성성이나 남성성에 상처를 주는 곳으로 경험한다는 뜻이다.

여성주의는 교회 구조가 근본적으로 남성적이며, 그 때문에 많은 여성이 교회 내에 남아 있기가 힘들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는데이런 비판이 대개 교회 구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기독교 페미니스트 중에 기독교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겉으로 잘 드러나거나 문제시되지는 않지만 남성의 소외도 만만치 않다. 남성도 교회에서 성적 소외로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지만 남성들은 교회 구조보다는 교회의 정신 쪽에서 더 심각하게 소외당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를 남성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본다. 수많은 남자들의 내면에는 종교는 여성스러운 것이어서 남성성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종교에 깊숙이 관여할 수 없다는 어두운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 서양 기독교 남성 신자들은 종교를 본인의 남성적 에너지와 연결시키기를 아주 힘들어한다.

서구 기독교에서는 이중 소외'를 볼 수 있는데여성은 교회 구조에서 소외되고남성은 교회 정신에서 소외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모든 남성과 여성이 그렇지는 않겠지만심각한 문제인 것만은 틀림없다. 기독교의 구조와 정신 모두가 철저한 성령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

 

좌절한 여신과 슬퍼하는 전사

 

남녀가 성차 문제에 민감해지면 민감해질수록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분노와 슬픔의 만남뿐인 듯하다. 페미니스트 운동권 모두를 아우르는 공통분모가 있었는데그것이 바로 분노다. 여성주의가 해방시키려고 애쓴 것이 (일부 여성주의 운동의 비유적 언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좌절한 여신의 분노이기 때문이다. 좌절한 여신의 분노란 과연 무엇인가?

모든 인간은 '이마고 데이 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신의 자녀로 태어나는데, 이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우리 삶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 몸과 마음정신과 영혼과 감정에 녹아 있다. 인간은 신과 왕과 부모로서 창조하고 명령하며 양육하고 축복하는 소명을 받았다. 인간은 남녀 상관없이 동일한 신성의 표지와 동일한 원형적 특정을 소유하며그 신성의 표지와 원형적 특징으로부터 창조하고 명령하고 양육하고 축복하는 남녀 공동의 소명을 부여받는다.

여성주의 운동에서는 여성들이 이 점에서 오랫동안 좌절했다고 말해준다. 창조와 명령, 양육축복에 대한 소명은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을 때가 많았고기껏해야 극소수의 영역에 제한되었다. 남성들은 여성의 소명을 오용하거나 빼앗았다.

분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비례 분노(특정한 불의에 반응하는 분노), 관념적 분노(정치적으로 조장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분노로밀란 쿤데라의 어법을 따르자면 거대한 행진의 분노”)신경질적 분노(“내 개인의 불행은 모두 정치 탓이야. 정치가 내 행복을 망가뜨렸다고”)원형적 분노(수세기 동안 여성에게 좌절을 일으킨 심리적 각인을 자극하는 분노).

페미니즘에서는 마지막 원인즉 원형적 분노가 가장 중요하다. 남성의 슬픔도 마찬가지이다. 남자들이 모이변 수면 위로 드러나는 지배적인 정서는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남성들이 모인 자리'에는 눈물이 많다.

페미니스트들의 분노가 그렇듯이이 슬픔에도 다양한 뿌리가 있다. 산업혁명으로 가정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들의 슬픔, 어머니와의 원시적 친밀감(남성이 남성 정체성을 찾으면 어쩔 수 없이 멀리하게 된다)을 잃은 슬픔자신의 남성성을 긍정하며 행동하는 방식을 알지 못하기에 경험하는 우울증으로 인한 슬픔수세기 동안 남성에게 좌절을 일으킨 심리적 각인을 자극하는 원형적 슬픔. 수세기나 된 남녀의 곪아터진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유연한 관계를 회복하려면이 두 가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정직한 분노

 

분노와 슬픔은 큰 차이가 없다. 둘 다 상처받은 사랑과 화해에 대한 갈망의 표현인 것이다.

롤로 메이는 사랑의 반대는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 적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진짜로 미워하고 제대로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그 사랑이 상처를 받거나 배신을 당하면 분노와 증오도 깊어진다. 분노와 증오는 (최소한 초기만큼은) 확실한 사랑의 표시이다. 사랑을 잃은 슬픔이 곧 분노와 증오로 표현된다. 슬픔의 핵심이 분노인 것처럼분노는 슬픔의 한 형태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와 슬픔이 다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정직한 분노가 있는가하면 정직하지 못한 분노가 있고정직한 슬픔이 있는가 하면 정직하지 못한 슬픔도 있다.

정직한 분노는 다음 세 가지 법칙을 따든다

첫째정직한 분노는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다. 정직한 분노는 진짜 분노라서 잘못된 것을 느끼고 지적해내지만과거에 좋았던 일이나 지금 좋은 일까지 부정하지 않는다.

둘째정직한 분노는 격노가 아니다. 겉으로는 다소 격하고 평화를 깨는 것처럼 보여도정직한 분노는 결국에는 관계를 세우고새로운 온전함에 이르며깨어진 것과 화해를 추구한다. 격노는 막무가내로 상대를 낙담시키고 관계를 깨뜨리며 철저한 파괴만을 바란다. 격노의 상처는 너무 깊어서 연합이나 회복을 바라는 마음이 전혀 없다.

정직한 분노는 시한부이다. 영원하지 않다. 괴로워한 다음약속의 땅으로 나아간다.

정직한 분노는 변명거리를 찾지 않는다(“나는 불행해. 불행할 만도 하지!"). 정직한 분노는 깨진 관계를 치유해줄 출구와 화해수용을 찾는 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

정직한 슬픔도 같은 법칙을 따른다. 이 법칙들은 현재의 분열을 극복하고 새로운 화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남녀 모두에게 중요하다.

 

남자들에게 없는 트럼펫

 

교회는 이중 소외 문제로 괴로워하고 있다. 많은 여성이 교회 구조에서 소외당하는 반면남성들은 교회 정신에서 소외당하고있다.

교회 다니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출석을 그만둔 여성들을 여러 명 알고 있다. 교회에는 남성 성직자뿐이고그들이 보기에는 건전하지 못한 가부장적 제도가 건재하다. 비록 교회는 떠났지만(교회 출석을 그만두었다) 종교와 기독교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남성 교인 가운데 교회 구조적으로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종교에서 소외감을 경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기도도 하지 않고 영성에도 무관심하며 교회에 대한 관심도 없다시피하다. 의무감으로 또는 마지못해 교회에 나올 뿐이다. 더군다나 종교에 관심도 없고 교회에도 나오지 않는 남자들은 얼마나 더 많은가.

우리가 더욱 건강하고 온전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애쓰는 사이요즘 보기 드문 용기와 정직함을 발휘하여 남녀 모두가 교회에서 어떻게 소외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 구조와 정신을 동시에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 구조가 얼마나 가부장적인지 검토할 만한 용기를 발휘하지 못한다면수많은 여성 신도를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반대로교회 정신이 얼마나 모계 중심인지 검토할 만한 용기를 발휘하지 못한다면 훨씬 더 많은 남성 신도를 잃어버릴 위험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수많은 이중성을 유지하며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부드러움과 강인함경건함과 완고함불과 불정신과 구조여성과 남성 ... 하나님은 이 모두를 포괄하신다.

 

하늘의 결혼 상담

 

우리는 하나님의 남성성과 여성성과 화해해야 한다. 하나님을 위대한 왕뿐 아니라 위대한 여왕으로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의 남성성이 하나님 안의 여성성에 능력을 부여하여 그 여성성을 온전히 유지시키는 그림을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또 반대로하나님 안의 여성성이 하나님 안의 남성성에 능력을 부여하여 그 남성성을 온전히 표현하게 하는 장면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야훼를 믿는) 기독교와 유대교이슬람교 내에서 여성성이 하나님의 속성으로 통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남성성과 여성성이 조화를 이루면 서로 위협하는 일도한쪽이 무작정 상대방에게 굴복하는 일도한쪽이 다른 한쪽의 궤도를 도는 위성이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서로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상대방을 통해서만이 비로소 본인의 진정한 정체성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하늘의 신비로운 결혼 상담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성

 

현대 신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분분한 주제 중에 하나님의 성이 무엇이냐는 것이 있다. 오랫동안 흔히 하나님은 남성이요하나님 아버지라는 개념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남녀 양측 모두 그 부분에 격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여성주의 진영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사고방식을 전환하여 하나님이 여성도, 남성도 아니라는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나선다. 하지만 전통 개념을 고수하겠다는 시도도 만만치 않다.

하나님은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시고, 아버지인 통시에 어머니이시다. 이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기독교 전통특히 창조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 모두 똑같이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학은 하나같이 하나님이 형언할 수 없는 분이라는 확신에 기초하며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하나님은 한계가 없는 무한한 분이시기에 우리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로는 하나님을 어떤 개념으로 담을 수가 없다. 그분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적절하기보다는 부적절하고정확하기보다는 부정확할 때가 많다. 하나님은 남성도여성도 아니시다. 중성이나 무성도 아니시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언어는 그 신비에 미치지 못한다.

 

"내니아버지의 힘과 선함이라. 내니어머니의 지혜라. 내니거룩한 사랑의 빛과 은혜라. 내니삼위일체라 하나된 나니라"

 

그 하나됨 가운데 우리 존재와 움직임이 있다.

 

포괄적 언어를 재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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