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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영성 2장 영성과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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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다윗
댓글 0 건 조회 5,467 회
작성일 08-01-19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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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IM(월요일을 기다리는 사람들) PNU

2006 9 11일 월요일 부산대 앞 오이코스

정리 : 정한신 협동간사

로드니 클랩의 「사람을 위한 영성」(IVP, 2006)

 

 

2. 천사 흉내내기를 넘어 기독교 영성과 성

 

  인간의 성은 과거나 현재나 큰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불안과 욕구 불만과 실패의 우려를 가져오는 것이 분명하다. 기독교 영성은 몸을 긍정하지만 성이라는 신체적 존재의 한 측면을 강하게 긍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 안에 성적 쾌락이 들어설 자리는 있다.

 

초대 교회 : 성에 대한 의심

 

  신약 성경은 성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다. 신약 성경과 초대 교회의 태도는 대체로 성에 대한 의심과 우려를 자주 표시하고 동정을 가장 고상한 영적 상태로 이상화시키고 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독신과 동정을 1차적 선이라고 보았으며, 결혼이란 동정보다 후순위의 선이라고 보았다. 또한 섹스는 출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지 쾌락을 위한 섹스는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보았다. 요컨대, 결혼 관계 안에서 쾌락을 위한 섹스에 탐닉하더라도 구원 문제를 우려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고 신실해지길 원한다면 성적 쾌락을 멀리해야 하며, 최대한 신실한 삶을 살고 싶다면거룩한 동정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오늘날 카톨릭 사제들의 삶과 수도원 전통에서 지속되는 태도)

 

결혼 관계에서의 간음과 개신교의 견해

 

  종교개혁가 칼뱅은 동정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독신은 소수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고 본다. 하지만 칼뱅도 출산과 무관한 기혼자의 섹스를 악한 것으로 본다. 또한 결혼은 부도덕한 성적 쾌락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이지만 결혼의 신성함을 위해 부부 관계에서도 성적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고 본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그들이 마음을 다해 기꺼이 그리고 즐겁게 쾌락(독일어 원문으로는 정욕) 가운데 연합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라고 하면서도 성적 쾌락을 죄된 것으로 보는 고전적 입장을 따랐으며, 대체로 독신이 결혼보다 더 높은 영적 상태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종교개혁가들의 입장을 보면, 개신교의 등장과 더불어 독신을 결혼보다 이상적이라고 보는 입장이 다소 약화된 것을 알 수 있지만, 기독교 전통의 밑바닥에는 성적 쾌락에 대한 유보적 입장이 강하게 흐르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주류 기독교의 입장은 결혼 관계 내에서의 성적 쾌락을 긍정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정통 기독교 전통을 좀더 깊이 파고들어 성적 쾌락에 대해 유보적 입장을 취한 이유를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그 전통이 우리를 지도하여 그 근본 뿌리요 진리의 궁극적 준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할 것이다.

 

천사와 같이 되는 것

 

  죽음을 늘 대면하던 시대에 출산은 비록 덧없는 것이긴 했어도 죽음에 대한 일종의 반기였다. 이와 반대로, 확신 있는 독신 그리스도인은 몸의 부활을 소망하면서 죽음의 완전한 패배를 증언하는 담대한 증인이었다.

  또한 성감과 성적 표현은 무척 불안정한 것이다. 가정과 친척에게 철저히 의존해야 했던 근대 이전에 성적 욕망이 주는 파괴력으로 인해 공동체가 와해되는 것을 모두가 두려워했다. 성욕은 그 불안정성으로 인해 무질서에 빠지기 쉬운 신체적 취약성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성욕은 근대 이전 사람들에게 무질서와 통제력의 상실 즉 죽음을 시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거대한 힘을 경계하고 우러러보았다.

  근대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생의 약속이 삶과 죽음의 순환을 깨뜨린 것을 믿었다. 또 출산을 통한 일시적인 생명에도 죽음의 얼룩이 번져 있는 것에 대해 영적 가족은 섹스 없이도 생명을 보장받는 제자들의 공동체임을 인정했다. 이 지점까지는 현대 기독교 영성과 일치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근대 이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중간기에 그리스도인들이 벌써 하늘의 천사와 같이 신체적, 성적 욕구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상적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독신의 상태를 천사의 삶으로 보고 이를 추구한 것이다.

 

천사가 아니라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근대 이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에 대하여 실현된 종말론이라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종말(시간과 역사의 끝인 동시에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이것이 전통적 종말론이다. 그러나 마지막이 이미 완전히 도래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만 완전히 만개할 무엇인가를 기다리기 보다 이미 완성이 끝났다는 생각이 실현된 종말론의 오류이다.

  성과 관련해서 성과 성적 쾌락 일체를 반대하는 영성은 천사에게나 맞는 것이며 무리한 태도였다.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사람에게 적합한 영성을 알리신다.

 

성의 신비를 존중하다.

 

  성욕을 천사 같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인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성적 쾌락과 육체적 즐거움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쾌락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이를 전심으로 긍정하고 감사히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몸이 움직이고 반응한다면 몸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성적 쾌락이 도덕적 영적 지위를 저하시키는 것은 아니다.

  근대 이전에는 정액을 가열된 형태의 피라고 생각하고, 정액 속에 온전한 한 인간의 축소판이 있다는 인식에서 출산의 의도 없는 성교나 자위가 죄악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기독교 전통에 귀기울여야 할 다른 측면들도 있다. 즉 낭만적, 쾌락주의적 개인주의로 얼룩진 오늘날의 태도를 깊이 반성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전통은 성과 죽음의 연결성을 인식한다. 낙태나 에이즈와 같이 성과 죽음이 병행되는 경우, 오르가즘을작은 죽음이라고 인식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섹스는 죽음처럼 숨가쁨과 망각, 초시간성, 통제력의 상실, 곧 지성의 감시력의 이완을 포함한다. 이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며, 잠잘 때와 마찬 가지로 섹스 역시 평화롭고 안전한 곳에서 이뤄진다면, 지성의 감시자도 잠시 마음 놓고 쉬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성적 통제의 상실은 저항할 수 없는 거친 열정과 탐닉, 하나님의 선한 설계를 떠난 추구, 우리의 의지를 벗어나는 욕망의 분출로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성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있으며, 모든 신비가 그렇듯 그에 걸맞는 존경과 조심성을 요구한다.

  현대인은 기술과 상업적 아이디어로 성의 신비와 통제 불가능성에 대해 도전하고 이를 장악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상품이나 기술이 성적 욕구 불만이나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다.

  기독교 전통은 성이란 하나의 신비라는 것, 또 타락한 세상에서는 그것이 위험이 잠재된 고통스러운 신비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고전적인 기독교 영성은 우리의 성욕과 성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물어보라고 요구한다. 즉 공동체를 세우는지 무너뜨리는지 자문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사적 문제가 아니라 공적 사안이다.

 

아내가 병들었을 때

 

  강한 성적 욕망은 나 자신과 나의 즐거움만 생각하게 하기 쉽다. 그러면 나의 연인을 즐거워하고 함께 사랑을 즐기는데 성을 사용하지 않고, 나의 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연인을 이용하게 된다. 즉 상대방을 통해 자기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고, 바로 이 욕망이 사랑을 더럽힌다(루터). 성은 하나님이 창조하신타인의 몸의 아름다운 매력에 끌리는 것이다. 그런데 타락한 상태에서는 타인의 몸을 나의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만들기 쉽다. 그런 측면에서 결혼 관계 내에서도 자아가 타인의 욕망이나 행복을 무시한 채 자기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것을 취하고자 하는 강간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깨어지고 혼란한 세상에서 성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이 욕망은 훈련하고 지도할 필요가 있다. 성욕에자연스럽게탐닉해도 좋다는 생각은 낭만적인 헛소리일 뿐 기독교 영성은 아니다.

 

제대로 질서 잡힌 욕망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에서 신체적, 성적 쾌락이 차지하는 정당한 위치는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욕은 아름답고 매력적인 몸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마땅히 발휘해야 할 절세심을 잃고 육신의 쾌락을 부당하게 즐기는 영혼 속에 있다. 절제력을 발휘하여 그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영적인 실재를 맛보아야 함에도 말이다라고 말했다. 즉 악은아름답고 매력적인 몸자체나 그 아름다움과 매력을 인식하는데 있지 않고, 그 몸에다 터무니없는 가치를 부여하는 데 있다. 우리가 몸을 포함한 여러 선한 피조물을 제대로 평가하고 질서를 잡으려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창조 세계의 목표와 목적을 바라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보다 성적 쾌락을 더욱 중시하고 애써 추구한다면, 성적 쾌락에 대한 사랑이 정도에서 벗어난 것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성적 동반자를 포함한 이웃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도록 부름받았다. 인간이 성적 쾌락보다 더 큰 선이다(루터). 그러므로 다른 사람을 내 즐거움을 위해 이용하는 것은 성적 쾌락이라는 선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것은 악이다. 성적 착취이다. 성 중독이다. 정도에서 벗어난 성이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성적 쾌락을 모조리 깎아내리는 전통에 도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착취와 강박성을 지난 성적 쾌락에 대해 경고하는 기독교 전통에 귀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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