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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1391
댓글 0 건 조회 5,695 회
작성일 08-11-12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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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 장 무엇을 예배하는가?

 

4장은 표면적으로는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낳은 세아들 가인과 아벨과 셋에 대한 이야기이고 특히 가인과 그의 자손들의 계보가 실려 있는 장입니다. 전체적으로 3장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인류 역사 속에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점과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한줄기 빛이 비취고 있다는 암시가 느껴졌습니다. 9절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시는 하나님의 질문과 3장 9절의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는 질문이 괘를 같이 하고 있고 아담에 대한 저주와 유사하게 가인에 대한 저주도 땅과 관련되고 있다는 점은 인류의 죄와 죄책이 대를 이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합니다. 동시에 가인의 생명을 보전하시기 위한 조치라든지 가인의 자손들의 문화적 성취의 흔적이라든지 종국에는 아벨 대신 주신 자손 셋의 존재는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으로 여겨집니다.

 

ELBis Club이 주목한 것은 가인과 아벨의 문제의 발단이 제사 혹은 예배의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비록 타락하여 에덴에서 추방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예배하는 존재였습니다. 성경은 가인과 아벨이 원하여 제물을 드렸는지 하나님이 드리라고 했는지 아니면 부모들의 교육으로 그렇게 하였는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타락한 인간 역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예배하는가? 누구를 예배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라는 말의 어근 자체가 worth+ship 이라서 누구를 가치있게 여기는가하는 것이라며 이문제는 오늘 본문 전체에서 명확해 진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지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에 따르면 가인의 제물이 피 없는 제물이었다는 견해나 가인의 경우 지극정성이 부족했다는 견해 혹은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니까 어쩔 수 없다라든지(모임중 특이한 견해가 나왔는데 원래 인간은 육식을 이때는 하지 않았는데 아벨에게 가인이 나누어 주지 않아서 아벨이 할 수 없이 양을 드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추론이거나 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제를 이 본문안에 집어 넣어(eisegesis) 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히려 본문 전체를 통해 우리는 몇가지 단서를 발견합니다. 우선 7절에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제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는 말씀이 첫 번째 단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선을 행함”을 예배의 전제조건으로 이해하게 되면 조금 전 언급했던 신학적 혹은 윤리적 접근을 강화하는 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선을 행함”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본문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단서는 17절에서 가인이 쫓겨난 후 성을 쌓고 아들 에녹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는 장면과 이와 대조적으로 26절에서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고 그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씀에 주목하는 데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대조를 중요한 포인트로 삼으면 전체적으로 4장에서 처음 이 말씀을 대한 청자(혹은 독자)들은 가인(혹은 가인의 자손들의 삶과(의) 예배)의 예배(제물)가 자기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제물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때의 가인의 반응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가인의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말하는 데 이런 분노는 대개 자존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런 자존심에서 분노가 나오고 이 분노가 아벨을 계획적으로 살해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만족적인 의도를 가진 예배인가? 자신을 내세우고 드러내기 위한 제물인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예배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예배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예배인가? 가 문제의 핵심일 것입니다.

 

가인의 자손 라멕의 이야기는 이런 자기 중심의 높아져 있는,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개인과 문화의 언어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23절, 24절 말씀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배이리로다.” 여기 “나”라는 말이 얼마나 자주 반복되는 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높아진 국가정신인 앗수르와 같은 제국들이 이런것과 비슷한 태도를 가졌었습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마음속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습2:15 a)"

 

라멕의 자손들에 대한 묘사중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던 야발이나 그 아우 유발 즉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 그리고 구리와 쇠와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인 두발가인같은 이들의 언급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깊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분명히 이 묘사는 이 말씀을 처음 대하는 청자(독자)들에게는 어떤 족속을 의미하는 지 어렵지 않게 파악될만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막강한 경제력, 문화, 기술력을 가지고 있던 당대의 어떤 부족, 족속의 조상들에 대한 언급이라고 생각한다면 창세기 저자의 의도는 확실합니다. 이 본문이 출애굽 당시 이집트와 그 주변 문명을 바라보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이든 아니면 바벨론 포로 당시 유프라데스 문명의 화려함에 압도당하여 있던 하나님의 백성이든 간에 이런 화려한 문명과 문화의 힘이 자기중심성에 경도된 잘못된 예배로 출발했던 가인의 자손의 유산이라는 점과 이에 반해 소박하지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하나님의 백성 셋의 후예로서 어떻게 현재의 삶을 바라봐야 하는 지 상상력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배의 현장에서 인류최초의 살인이 나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자 충격입니다. 며칠전 예루살렘의 성묘교회에서 그리스정교와 아르메니아정교 소속의 수도자들이 서로 예배를 하겠다고 하다가 폭력충돌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극단적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서조차 예배를 둘러싼 충돌(battle)의 예는 많습니다. 오르간을 사용할 것인가 드럼과 기타를 사용할 것인가 전통적인 예배인가 시대에 맞는 예배인가 하는 화두는 문화적인 화두일 뿐 아니라 깊숙이 들어가면 오늘 본문이 드러내는 자기 이름을(자존심) 예배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예배하는가 하는 질문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삶과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의 삶으로서의 예배와 의식과 제의로서의 예배가 자기중심성의 문화(필요중심적인가?)에 젖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일,삶,구원 지성근간사 [이 게시물은 웹지기님에 의해 2008-12-06 11:02:53 공지사항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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