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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T(Experiencing the Trinity) Summer School 제7장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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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한신 댓글 0건 조회 2,806회 작성일 09-08-3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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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라이트 지음, 양혜원 옮김, 『마침내 드러나 하나님 나라』, IVP, 2009.

7.예수님, 천국, 새 창조(183~202)

승천

부활과 승천은 매우 밀접하지만 별개의 사건으로 초대 교회에서 두 사건은 매우 다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잘못 이해되거나 사라질 시에는 기독교 신앙에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한다.

예수의 승천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문자주의,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적 회의주의적 해석이 교차하면서 문제를 잃으키고 있다. 혹자는 예수가 수직적 이륙을 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사라짐’이 그가 죽은 후 자신의 추종자들 가운데 영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사라짐의 해석은 재림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의 현존에 대한 은유에 불과한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서구에서 승천이 어려운 질문이 된 것은 승천은 기존 우주 전체의 구성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게 함과 동시에 교회와 구원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자주의와 회의주의는 모두 우주를 ‘저장소(receptacle)'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다. 승천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신학자들은 그것을 이해하려면 일부 사람들이 ’관계적‘ 관점이라고 부른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과 땅은 물질계 안의 두 개의 다른 장소가 아니다. 이것은 차라리 두 개의 다른 영역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운데 하늘의 특징을 알아보자면, 먼저 하늘은 땅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하늘에 있는 존재는 동시에 땅의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승천이란 사람들이 예수를 어느 때나 만날 수 있고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하늘은 땅의 통제실로써, 땅에 대한 지시를 하는 장소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성경에서 말하듯 예수가 육체를 가지고 하늘에 있다는 것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는 현제의 문화적 기준에서 온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또한 예수가 궁극적으로 미래만이 아니라 지금 현제도 그리고 하늘뿐만 아니라 땅도 ‘지휘하고’ 있다라는 생각엔 반감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새로운 통치자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다양한 소명을 통해 이 새로운 통치 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발견했다. 이는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지니고서 예수의 생명 또한 나타나게 되는 방식이다. (이는 3장에서 설명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승천을 경시하거나 무시하게될 경우, 교회가 확장되어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이는 예수를 그 백성들 가운데에서만 존재하는 존재로 축소시킨다. 20세기 영국의 자유주의가 바로 이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합리주의와 타협하고 승천이라는 ‘사실’ 예수가 어느 곳에서든 우리와 함께 한다는 말로 주장함으로써, 예수를 자신의 주로 그리고 자신을 이 세상의 종으로 재시하지 않았다. 대신 교회는 자신의 구조와 위계 관습과 기벽을 사용하여 자기 자신을 효과적으로 제시하게 되었다.

만약 교회가 자신의 구조, 지도력, 전례, 건축물 혹은 다른 그 어떤 것을 자신의 주님과 동실시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직위의 오만”과 같은 현상, 그리고 이러한 것이 효과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의 절망이 나타날 것이다. 교회는 예수가 아니고 예수는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할 때에, 즉 승천의 진리를 굳건하게 붙잡을 때에만,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이상하게 부재하시고, 이사하게 우리와는 다른 존재이고, 이사하게 우리와 대조되는 주님, 즉 막달라 마리아에게 자신을 붙잡지 말라고 말씀 하신 그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건하게 붙잡을 때에만 우리는 텅 빈 승리주의로부터 그리고 다른 한편 얄팍한 절망으로부터 구출될 것이다.

역으로 예수가 우리보다 앞서 하나님의 공간,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 이미 합당한 주인으로서 이 반란의 세상을 다스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오른 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붙잡고 축하할 때에만, 우리는 세계 역사에 대한 잘못된 관점으로부터 구출될 것이고, 현재에 이루어야 하는 정의의 임무를 맡을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예수 대신 다른 중보자들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들로부터 구출될 것이다. 승천을 제대로 이해하면 교회, 성례전,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관점이 다시 초점을 맞추게 될 것 이다.

이 모든 것을 요약해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진실, 특히 예수님에 대한 진실뿐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려면 삼위일체의 교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삼위일체란 예수가 하나님 그리고 성령과 동일시되면서도 하나님과 구분되고 성령과도 구분되는, 예수만의 인간성을 이해하고 축하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오만에 종지부를 찍는다. 만약 승천이 사실이라면 18세기 유럽과 미국의 사상이 대변하는 인간의 자기 확대 프로젝트 전체가 비난을 받고 굴복 당하게 될 것이다. 승천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며,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씨름을 포기하고(아울러 우리가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데 따르는 불가피한 절망도 그만두고), 피조물로서 우리의 지위를 즐기는 것을 의미한다.

승천은 진정한 인간으로 남아 있는 예수를 이야기 하는 것이며, 한편으로 성령에 대해서 부각시키는 한 측면이기도 하다. 왜나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가 임재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가 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 이 세상의 주도권을 잡은 인간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위해 지금 중보하고 계시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보다도 우선이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을 우리가 느끼는 것 보다도 더욱 더 우선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알기에 앞서, 우리는 새롭고 더 나은 우주론이 필요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1세기 유대인 동료들은, 많은 근대 사상가들이 가정한 것과는 달리, 천국은 저 하늘 위에 있고 지옥은 자기 발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3층 우주론에 갇혀 있지 않았다. 그들이 ‘위’ 그리고 ‘아래’에 대해서 말할 때, 너무 자명해서 굳이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은유들을 사용한 것이었다.(마치 학년이 올라간다고 쓰는 것 처럼...) ‘올라간다’는 의미가 단순히 땅으로 몇 미터 더 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 일 것이다.

승천의 신비는 말 그대로 신비이다. 성경이 이야기 하는 하늘과 땅은 우리가 ‘공간’이라고 부른 것의 두 가지 다른 종류, 우리가 ‘물질’이라고 이야기하는 두가지 다른 종류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다. 승천을 통해 우리가 정학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은 비록 매우 다르지만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간과 우리의 공간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맞물려 있고 교차하는데, 심지어 그 두 개가 각각 구분되는 정체성과 역할을 유지하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서로 맞물려 있고 교차한다. 그 둘은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 서로 합쳐질 것이고, 서로에게 열려 있고 서로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영원히 결합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 하나님이 조성하신 공간의 핵심 인물인 예수님이 우리가 현재 아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고 우리도 그 분 앞에 나타날 것이다. 승천에 대한 다른 절반의 진실은 사도행전 1:11절에서 천사들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이 돌아오신다는 것이다.

‘재림’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우주 전체를 새롭게 하실 때 예수님이 자신이 새로운 세계의 중심이자 핵심으로 직접 나타나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점에 대해 기독교 신앙이 가르치는 바는 무엇인가? 지난 세기 동안 이 질문은 더욱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되었다. 이는 재림이 곧 임할 것이고 이 세상이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흐름과 그분의 재림을 세상의 회복을 뜻하는 일반적인 희망으로 재해석하는 흐름이다. 전자의 경우는 보수적인 교단에서 주로 이야기되며 이러한 관점은 세상이 곧 멈추게 될 것기에 세상의 여러 모순들에 대해서 눈 감게 한다. 후자는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적 성향과 관련되어 그분의 재림과 심판의 의미에 대해서 무심하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소위 ‘휴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울이 쓴 두 개의 구절을 오해한 데서 비롯한 것이며, 그것을 해결하고 나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자 중심인 예수의 재림에 대한 교리가 바로 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재림 시의 ‘심판’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이다.

이렇듯 현재의 기독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종말론(eschatology)’이다. 종말론은 초기 기독교와 관련해서 그 세대 안에 예수가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의미로 종종 사용되었고, 그 일이 일어나지 않자 재림을 다시 정의한 것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그러한 기대는 머지 않아 세상에 종말이 오리라는 1세기 유대인들의 기대에 기초하고 있었다. 또 그 기대에 새롭게 초점을 맞추어 주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 세대 안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걱정한 것은 아니며, 그들이 물려받은 유대교가 가졌던 기대는 오히려 이 세상의 끝이 아니라 현재 세계 질서 안에서 일어나는 극적인 변화였다. 이렇듯 종말론은 단순히 죽음, 심판, 천국, 지옥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종말론은 대부분의 1세기 유대인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강력하게 믿었던 내용, 즉 하나님의 인도 하에 이 역사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이 가는 방향은 정의, 치유 그리고 희망이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라는 믿음에 대한 것이다. 현재의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으로의 이동은 현재 시공간의 우주가 파괴되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치유의 문제가 될 것이다.

신약성경의 저자들, 특히 바울은 그 때를 기대했고, 예수의 부활을 그 첫 열매로 보았다. 그러하기에 종말론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이며 그 미래가 이미 현재에 우리를 만나러 오기 시작했다는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자신과 초대 교회의 가르침에서 보게 되는 내용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유했던 유대교의 종말론적 신앙을 변형시키기는 했지만 저버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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