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2018년 9월 일상사연 - 서른넷의 새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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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8-09-04 11:20본문
서른넷의 새출발
“정상가족”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되어, 부부 간의 성역할이 어느 정도 분리된 핵가족을 일컫는 개념어입니다. 이 개념은 산업사회의 서구 중산층을 규범적 모델로 한 것인데, 핵가족을 보편적이며 바람직한 것으로 보는 입장이라서 “가족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이분화하고 위계를 만든다”고 비판 받아왔습니다(이재경, 2015: 29).
이른바 정상가족이 아닌 상태를 일컫는 용어 중 “결손가정”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 종종 어린 시절, 신학기 가정환경 조사를 할 때의 경험이 떠오릅니다. 부모님 중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없는 사람에게 손을 들라해서 숫자를 파악하던 장면의 기억입니다. 호기심에 슬쩍 훔쳐본 선생님의 메모에는, 그때 손 들었던 친구들의 이름 옆에 “결손(가정)”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시기였습니다.
시간이 꽤 많이 흘렀습니다. 90년대 이후로 한국사회는 근대적 의미의 정상가족이 눈에 띄게 쇠퇴하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가 힘을 발휘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교회를 비롯한 신앙공동체입니다. 저는 이혼을 경험한 혜민(가명)씨를 만났습니다. 혜민씨는 결혼과 이혼, 육아, 일, 교회 등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올해 55세가 된 혜민씨는 전남편과 6년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한 후 홀로 아들을 키우며, 학습지 교사로 20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한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어렸던 아들은 어느덧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혜민씨는 이혼 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 그렇다고 전에 교회에 일체 발 딛은 적 없는 것은 아닙니다. 중학교 시절 혜민씨는 친한 친구를 따라 1, 2년 정도 교회에 다닌적이 있었습니다.
"딱히 신앙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친구가 좋아서 갔어요."
혜민씨는 웃으며 그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집에는 다른 곳에 간다고 거짓말을 한채 교회의 하계수양회에 참석한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그런데 혜민씨가 교회를 떠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 중등부 전도사의 설교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 전도사님이 학생부 예배 때 다른 종교, 특히 불교를 기독교와 비교하며 비하하시곤 했어요. 설교 중에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게 왠지 귀에 거슬렸어요. 그리고 학생부 친구들(당시 중학생)은 고등부 오빠들 이야기를 자주 했는데, 그것도 불편했어요. 저는 아직 믿음은 없지만 그래도 믿음을 갖고 싶고, 신앙생활을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들던 시점이었거든요. 어린 시선으로 그런걸 보니 점점 실망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친했던 친구랑 다른 고등학교를 갔어요. 자연스럽게 관계가 소원해졌어요. 아무래도 고등학교 시절엔 입시에 쪼들려서 정신이 없었죠. 그렇게 신앙생활은 학창시절의 추억으로 흘러갔죠."
혜민씨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이혼 후였습니다.
"전남편이 경북 사람이었어요. 미신과 유교적 사고방식이 뿌리 깊은 곳이였죠. 남편 일이 잘 안풀리니까 시어머니는 무당 찾아가서 굿하고, 점집 찾아다니며 점보고 그러셨어요. 그때는 제가 며느리 입장이라 시어머니가 시키면 시키는데로 따라 했어요. 친정 어머니도 절에 다니셨는데 당신 딸이 너무 힘들어하니 불공도 드렸어요."
이혼 후 혜민씨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마침 당시 혜민씨의 집 주변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부목사님의 아이와 혜민씨 아이가 같은 유치원에 다닌 것이 고리가 되어주었습니다. 같은 유치원에 아들들을 맡긴 부목사님의 아내와 혜민씨는 친구 처럼 지내기 시작했고, 아이와 단 둘이 살아가는 것이 힘들었던 혜민씨는 '교회라도 나가보자'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하필 그 유치원이 교회 부설 유치원이었어요. 아이 입학 시키려고 면담할 때, 원장님도 제 상황을 듣고는 신앙을 가져보라고 권하셨죠. 그러던 차에 사모님과 친구처럼 지내다가 교회에 가게 되었어요."
사실 저는 '이혼'이라는 단어가 갖는 무거움 때문에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지 무척 조심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혜민씨는 그런 제가 본격적인 질문을 하기도 전에 자신의 민감한 부분을 먼저 말해 주었습니다. 저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질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서른넷의 새출발
"결혼은 몇 살에 하셨나요?"
"스물 여덟 가을에 했어요. 스물 아홉 가을에는 출산했구요. 애기 아빠랑은 동갑이었어요."
"어떻게 만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같은 대학에서 만난 친구였어요. 학교 다닐 때 친구로 지낸 시간은 4, 5년 쯤…… 제가 졸업할 때 애기 아빠가 복학했어요. 그쪽 집에서는 제가 나이가 있으니 일단 약혼이라도 하자고 졸랐어요. 엉겁결에 약혼식을하고, 애기 아빠가 졸업할 때까지 약혼한 상태로 있었어요. 그런데 2년 정도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친구가 아닌 배우자로 보니, 제가 친구 때 본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그 기간에 결혼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혜민씨는 나직이 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습니다.
"제가 큰 딸이예요. 양가 어른들 모시고 약혼식한게 동네에 다 소문이 났었죠. (결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는데…… 하지만 상황에 밀려밀려 결혼까지 가게 되었어요. 그렇게 결혼한 후에는 애기 아빠 직장 생활도 마음대로 안되고, 아무튼 힘들었어요. 4, 5년 동안 월급을 세 번쯤 받아봤나? 그래서 '일을 해야겠다'라고 생각했죠."
결혼 생활은 초기부터 순탄치 않았습니다. 혜민씨는 제대로 된 직장생활을 못하던 전남편을 대신해, 학원 강사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남녀로 제대로 만나지 않아서 서로를 잘 몰랐던게 제일 큰 문제였어요. 결혼해보니 시어머니는 일찍 혼자 되어서 재혼을 하신 분이었어요. 애기 아빠는 5남매의 맏이였는데 사춘기 때 어머니가 재혼하며 마음에 응어리가 많았어요. 엄마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고, 빨리 돈을 벌어 일찍 출세하고 싶은 마음도 컸죠. 결혼했을 때 벌써 사고를 꽤 쳐서 빚도 많았어요."
"아…… 속았다는 생각이 드셨겠네요."
혜민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배신감이 들었죠. 그리곤 결혼 후에도 뭐 해보려는 것마다 잘 안되어서 시어머니는 무당을 찾아다니셨어요. 그때 저도 따라다녀야 했구요."
그리고 혜민씨는 결국 이혼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남편은 대구에서 사업을 시작했어요. 저는 부산에서 애기 키우며 학원강사 일을 했구요. 그런데 사업이 계속 마이너스가 나서 저한테 생활비를 보낼 상황이 못되었어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학원강사 일을 접고 대구로 올라가서 남편 일을 같이 했어요."
"어떤 사업을 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대학교 구내 식당 운영하는 사업이었어요. 그런데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올라가서 거들며 어떻게 수입/지출을 좀 맞출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그 학교 운영자의 측근이 밀고 들어올 상황…… 이용만 당할 상황이었죠."
많이 들어본 종류의 이야기였습니다. 세입자가 열심히 일해 가치를 창출하면, 건물주가 세입자를 내쫓고 같은 업종을 그 자리에서 계속한다는 그런 이야기…….
"원래 그 일을 시작할 때…… 그 학교 재단 고위직의 조카 쯤 되는 사람, 재단의 기획실 일을 하는 사람이 애기 아빠 선배였어요. 그 선배 말만 믿고 몇 년만 참으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빚을 내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가 보니 아무리 해도 비전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만 접자'라고 말을 했어요."
하지만 상황은 혜민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했습니다. 혜민씨가 사글세방에 살면서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일을 거든 2년 동안도 계속 손해가 누적되었습니다. 전남편은 사업을 시작하며, 그리고 적자를 메우기 위해 혜민씨에는 알리지 않은채 적지 않은 사채를 끌어 썼습니다.
"이미 그런 생활을 5, 6년 해왔던 거예요. 그래서 '이건 아니구나'라고 결심했어요. 부부는 믿음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이 사람이 그동안 나를 많이 속였구나. 내가 너무 몰랐구나. 이 사람과 같이 살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 수밖에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뭐 아무 것도 필요없으니 아이만 내가 키우겠다고 하곤 (부부 관계를) 법적으로 정리했어요. 그리고 아이랑 같이 부산에 내려와서 새 출발을 했어요. 우리 아이가 다섯 살 때니까 제 나이 서른넷 정도였어요."
"많이 힘드셨겠네요."
"지금 생각하면 되게 젊은, 아니 어린 나이였죠. 그때는 애기가 있어서 그런가? 삶의 무게를 의식하거나 방황하고 그럴 여유는 없었어요."
#실적 때문에
"일 하면서 아이 키우기 힘들잖아요. 요즘도 그런데, 20년 전이면 훨씬 힘드셨겠어요."
"그렇죠. 그나마 제가 학원강사라서 일반적인 직장과 출퇴근 시간이 달라 가능한게 있었어요. 처음엔 아이를 미술학원에 보냈는데, 원장 선생님이랑 상담해보니 교육의 방점이 아이의 내면이나 뭐 그런데 찍혀 있지 않았어요."
"미술이란 기술을 잘 가르치는 학원이었나보네요."
제 말에 혜민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아이의 인성, 감성을 잘 터치할 수 있는 곳에 아이를 보내고 싶었어요. 그러던 중에 신앙이 있는 선생님이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교원 면담도 해봤어요. 결국은 교회부설 유치원에 보냈죠."
"그 당시 하루 일과를 간단히 요약하면 어떻게 될까요?"
혜민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을 다듬었습니다.
"저는 학원강사라서 출근 시간이 2시였어요. 오전에는 아이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유치원에는 일부러 늦게 보냈어요. 1시쯤 아이를 유치원에 데려다 주고 출근했죠. 근처에 사시던 어머니가 아이를 받아주셨고, 저는 퇴근 후에 어머니 집으로 가서 아이를 데려왔어요. 그 생활의 반복이었어요. 아주 단조로운 삶이었죠. 그러다 우리 아이가 7살일 때 제가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학원에선 어떤 과목을 가르치셨나요?"
"제가 사범대 상업교육과를 졸업했어요. 수학을 좀 해서 수학을 가르쳤죠. 대학교 4학년 때 아르바이트로 학원강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학원을 그만두고 학습지 교사 일을 시작했어요."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교회 생활을 시작하며 학습지로 바꾸신 건 단순히 시기가 그렇게 된건가요, 아니면 둘 사이에 뭔가가 연결되어서 인가요?"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지 처음 1년 동안은 좀 힘들었어요. (예수를) 안믿는 사람들은 주일에 늦잠도 자고, 늦게 일어나 목욕도 한 판 하고…… 그때는 토요일 근무가 있으니까 주일은 쉬어야 하는데, 교회 가는게 참 힘들었어요. 오전 예배만 드리고 와도 한나절을 거기서 보내야 하니까 월요일이 너무 피곤했죠. 그게 몸에 붙을 때까지 1, 2년이 힘들었어요."
혜민씨는 낮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습니다.
"학원이 뭐가 문제냐면, 시험 기간이 되면 그 앞 두 주 정도 주일에도 출근을 해야 해요. 한 두 번은 교회 간다 말하고 다녀왔는데, 점점 눈치도 보이고, 신앙이 자라며 고민이 되었어요. 주일에 쉴 수 있는 직장을 가야 할텐데…… 다른 일은 안해봤는데…… 고민하던 차에 학습지 하는 후배를 만났어요."
"보통은 그런 만남이……."
"실적 때문에 우리 아들 학습지 하나 시켜줬죠."
우리는 함께 웃었습니다.
"학습지는 학생들을 적게 가르치면 토/일요일에도 쉴 수 있었어요. 일하는 시간도 조정가능하구요. 거기에 혹해서 우리 아이 1학년 때부터 학습지 교사를 시작했어요. 이제 만 19년 쯤 되었네요."
"와…… 계신 곳에선 제일 오래하신 편이겠네요?"
혜민씨는 손을 가볍게 내저었습니다.
"아뇨. 우리 사무실엔 환갑 다 되신 분도 있어요. 그 언니는 서울에서 시작해서 결혼 후에 부산에 내려와서도 계속했어요. 거의 30년 가까이……."
예상을 뛰어넘는 근속기간에 놀라는 한편, 언젠가 TV에서 본 학습지 교사의 어두운 면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했습니다.
"언젠가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봤는데요, 학습지 교사하시는 분들 중에 실적 압박 때문에 자기 돈을 너무 많이 밀어넣어 일을 하고도 돈을 거의 못버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혹시 그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혜민씨의 미간이 좁혀졌습니다.
"우리 회사는 아니고 다른 회사 이야기였어요. 그 회사는 우리보다 좀 더 그런게 강했을거예요. 거기는 책을 팔아야 해서. 아무튼…… 일을 하다보면 매달 그만두는 아이도 있고 새로 시작하는 아이도 있어요. 새로 시작하는 아이보다 그만두는 아이가 많으면…… 회사에서는 당연히 마이너스를 좋아하지 않죠. 하지만 숫자를 채우지 않았다고 눈에 띄는 불이익을 주지는 않아요. 월급은 자기가 담당하는 아이 숫자에 비례해서 나오는데, 회사랑 이번 달엔 몇 명이나 담당하겠다고 협상을 해요. 그걸 못채워서 간혹 자기 돈을 넣는 경우가 없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건 경우에 따라 다른 거 같아요. 매달 300만원을 받는 사람이 자기 돈 30만원을 넣는 건 감내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하지만 150만원 벌면서 50만원씩 넣겠다, 이러면 안되요. 어리석은 거예요. 안해야 해요. 그런데 사람이 좀 유약해서 영업 압박을 못이겨내는 사람이 간혹 그래요. 매스컴에 나오는 정도는 아니지만……."
목이 탄지 혜민씨는 찾잔을 입에 가져갔습니다.
" 우리는 다 개인 사업자로 되어 있어요. 19년을 근무했지만 직원이 아니예요. 2년 이상 일하면 사대보험을 들어줘야 하는데, 그걸 피하려고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죠. 이 일이 참 힘든게, 다른 일은 10년 이상 하면 전문가가 되잖아요. 하지만 이 일은 신참이나 고참이나 업무 자체가 똑같아요. 신참부터 고참까지 모든 교사가 다 같은 스트레스를 받아요."
저는 의자를 바싹 당겨 앉으며 물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는 구체적인 상황을 하나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음…… 우리가 일하는 흐름이요…… 매달 중순, 그러니까 15일 경에 이번 달에 몇 명이 그만두는지를 보고하고 다음달에 필요한 수량 만큼 교제를 신청해요. 그런데 엄마들 중에 월말이 다 되어서 이번 달까지만 하고 그만두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물론 엄마는 다음달 수업을 안하겠다고 하는건데 왜 그만두지 못하게 하느냐고 항의하는 분들이 있어요."
"교사랑 회사 입장에선 15일 이전에 다음달 수업을 계속할건지를 파악해야 책을 주문하는데, 그 날짜 지나서 통보 받으면 확실히 일이 복잡해지겠네요. 사전에 고지해도 그런 일은 계속 생기죠?"
"그렇죠. 어떤 분들은 본사에 전화해서 막 시끄러워지는 경우도 있어요. 시끄러워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 선생님들이 그 교제 대금을 부담하는 경우가 많아요. 신참이 아니고 고참이면 더 그래요. '이런 상황은 그냥 내 선에서 처리해야 하는데'라는 부담감이 작용하는 거죠. 아무튼 그런 문제로 클레임 걸릴 때면 이 일을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업 스트레스는 많이 안받으셨어요?"
혜민씨의 표정이 조금 펴졌습니다.
"저는 하나님 은혜로 일을 잘하는 편에 속했어요. 젊을 때부터 학원에 있다보니 가르치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게다가 학습지는 학원처럼 오래 가르치지 않아요. 10분쯤? 주로 스스로 공부하게 만드는 시스템이죠. 교사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가르치구요."
"예를 들면 어떤 내용인가요?"
"초등학생은 사칙연산과 배경지식…… 계산을 정확하고 빠르게 할 수 있도록 반복 훈련해요. 아무튼 가르치는데 있어서는 스트레스가 전혀 없어요. 학원 경험 때문에 상담도 좀 되구요. 엄마들이 그만두려 할 때, '어머니 이왕 학습지를 했는데 적어도 이 단계까지는 해줘야 4, 5학년 때 차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중에 이 부분의 몇 문제 때문에 등급차가 날 수 있으니 지금 완벽하게 해두는게 좋습니다' 등…… 상담은 잘 하는 편이예요. 그리고 나이가 있어서 어머니들이 소개도 많이해주셨어요. 교회에서도 교사를 오래 했는데요…… 유치부, 초등부를 13~14년했어요. 그때 같이 교사 했던 엄마들이 저한테 학습지 관련해서 많이 물어봤죠. 같이 아이 키우는 입장이라 초창기에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감사하게 영업 때문에 크게 스트레스 받은 적은 없었어요. 한 번씩 일이 잘 안풀릴 때면 그만두고 싶긴 하지만요."
#삼세대 연합예배
"교회 생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교회 만큼 가정을 강조하는 곳도 드물잖아요. 혹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 때문에 움츠러든 경험이 있으세요?"
무례할 수 있는 제 질문에 혜민씨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제 자신 보다, 제 아이를 색안경 끼고 보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아이가 어릴 땐 아빠를 1년에 한 번씩 봤어요. 어릴 땐 상처 받을까봐 이혼했다는 걸 알리지 않았죠. 대신 외국에 일하러 가서 가끔씩 만날 수 밖에 없다고 말했어요."
"그럼 언제쯤……?"
"중 2나 중 3쯤 이야기했던 거 같아요. 그나마도 제가 말한게 아니라 제 여동생이 말해줬어요. 동생 집에 가서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동생이 아이한테 간단하게 말해줬어요. 엄마, 아빠의 가치관이 달라서 그렇게 되었다고. 아이는 그냥 '이모, 내가 몇 살 때 그렇게 된거야?'라고 물었다더군요."
혜민씨의 손은 이미 비어버린 찾잔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습니다.
"살면서 문득문득…… 후회는 아닌데…… 아들 생각할 때면…… 제 인생에는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아이를 생각할 때면 '좀 더 참고 살았어야 했나?'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성(性)이 다르니 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잖아요. 목욕탕을 같이 간다거나……. 저한테는 빵점 남편이었지만, 제가 참고 살았다면 '우리 아이가 그런 걸 누리며 살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가끔해요. 그래도 지금 아이 아빠를 보면 별로 변하지 않았어요.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참 다행이다, 라고. 그런 면에서는 후회는 없어요. 다만 '아이가 혼자라서 외롭지 않았을까? 형제가 하나 더 있었다면 행복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저는 혜민씨의 빈잔에 물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보수적…… 나쁘게 말하면 폐쇄적이예요. 일가친척들이 많고, 젊을 때부터 오랫동안 언니, 오빠 해온 사람들이 많아요. 제가 처음 들어갔을 때만 해도, 청년회에서 결혼한 부부들이 다함께 모였어요(20~40대), 남녀 전도회가 아니고(나중에 바뀌긴 했음). 간혹 혼자이신 분도 계셨지만 이혼은 아니었고 배우자가 교회에 안나오는 분이었어요. 저처럼 이혼으로 혼자된 가정은 없었죠. 그래서 처음엔 적응하기 좀 어려웠어요. 그 분들이 잘해주시지만, 뭔가 극복하기 어려운 경계 같은게 있었죠. 물론 제가 초신자라서 어려운 것도 있었겠죠. 어쨌든 처음에는 많이 불편했어요. 특히 부부 모임…… 부부 단위로 모든 걸 같이 했어요. 여자 집사님들이랑은 괜찮은데, 남자 집사님들이랑은 어색했어요. 함께 보낸 시간이 길었으면 괜찮았을텐데, 다가가는데 시간이 꽤 걸렸죠."
부부 단위의 모임이 많았다는 이야기에, 교회가 얼마나 가정을 강조하는지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혹시 설교 등 메시지에서도 가정을 강조하는 편이었나요?"
"몇 년 전에 새로 오신 지금 목사님은 교회 봉사를 하더라도 가정에 소홀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시죠. 그리고 다섯 번째 주일에 '삼세대 연합예배'를 드려요. 3개월에 한 번 정도 돌아와요. 같은 좌석(사람이 많으면 한 좌석을 중심으로한 주위)에 할머니, 할아버지, 며느리, 아들 딸이 같이 앉아요. 제가 이 교회에 출석한지가 20년쯤 되었는데, 지금 목사님이 오신 후부터 삼세대예배를 시작했어요. 처음 삼세대예배 드릴 땐 '외가정도 있을텐데'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어요. 그리고 둘러보면 장의자 하나가 모자라서 몇 줄에 걸쳐 앉아야 하는 가정도 있었어요(교회 안에 친인척이 많음)."
평소부터 이 주제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지 혜민씨는 물 흐르듯 말을 이어갔습니다.
"두, 세 줄에 걸쳐 앉고 웅성거리면 되게 부러워요. 억지로 따지면 저도 3세대긴 해요. 친정 어머니를 전도했고 아들이 있으니까요.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예요. 아무튼 교회에서 그런 거 할 때마다 특별한 마음이 들 때가 있어요. 우리 목사님 처음 오신 후로 젊은 분이라 새로운 것 많이 하셨어요. 첫 번째 삼세대예배가 마침 어버이주간과 겹쳤어요. 부모, 자식 간에 서로 편지 적어서 낭독하는 순서가 있었어요. 목사님이 저를 지목해서 편지를 써오라고 하셨어요."
"아……."
"편지를 읽다가 눈물 흘렸어요. 그런게 부담스러웠어요. 목사님의 의도는 이해되지만…… 뭔가 평범한 가정보다는 질곡이 있고 이겨내는 걸 간증하는게 특별한 느낌을 준다는 건 이해되지만…… 저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안한다고 말 했는데 담당 부목사님이 너무 간곡히 부탁하셨어요. 결국 목사님 오시고 처음 하는 행사라 순종하는 마음으로 했죠. 사실 저는 그런 특정한 걸로 노출되는 것, 그렇게 보통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이 불편해요.
#거기가 어느 자리라고 권사가 일어나서
"가정 문제를 제외하고 여성이라서 교회 안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은 없으셨나요?"
혜민씨는 한참을 망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앞의 목사님이 사임하시는 과정에서 교회가 한창 시끄러웠어요. 제직회 같은 걸 하면 늘 옥신각신했죠. 어느 날은 한 장로님의 부인 권사님이 일어나서 강하게 발언하셨어요. 사실 제직회하는 걸 보면 보통 장로님이 주도하시고, 젊은 안수집사님이 세게 이야기하시잖아요. 권사님이나 여자 집사님들은 조용히 듣고. 그날 말씀하신 권사님이 저보다 서너살 많으세요. 아마 그때 지금 제 나이 정도 되셨을거예요. 권사님이 떨리는 목소리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그 모임이 마친 후 당회에서 권사님 문제가 다뤄졌어요."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거기가 어느 자리라고 권사가 일어나서!'라는 이야기가 당회에서 나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장로님, 권사님 부부가 치리 대상이 되었어요. 그 장로님은 참 좋은 분이셨어요. 젊은 집사들에게 신망을 받는 분이셨죠. 그런데 치리 대상이 되어서 몇 달 동안 당회에 참석하지 못했어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벌어져서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어요."
"음…… 두 분은 치리를 받아들이셨나요?"
혜민씨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주 순한 분들이세요. 기도하고 우는 분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어요. 어느 장로님은, 남편 장로가 집안을 건사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발언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또, 교회 안에서 여자 전도사님을 뽑았는데, 원래는 맡은 부서에서 사역하고 심방해야 할 분으로 뽑았는데 예전 목사님이 그 여자 전도사님을 비서 처럼 온갖 일에 부린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그렇지 않은 교회도 있겠지만…… 보통 남자 전도사님은 신학대학원을 다니고, 여자 전도사님은 나이 들어서 전문적인 신학공부를 하지 않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남녀 전도사를 대하는 것이 조금 다르게 느껴졌어요. 좋은 말로 하면 친근하게 대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사역의 전문성이 떨어지는 존재로 대우한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물론 안그런 교회도 있겠지만……."
혜민씨의 말을 듣다보니 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여성 목사 두 분도 함께 안수를 받았습니다. 두 분은 수십년 전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사로 오랫동안 헌신해온 분들이었습니다. 통상적으로 목사 안수식을 겸한 예배의 축도는 그날 안수 받은 목사 중 연장자의 몫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두 분 중 한 분이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수식이 시작되기 직전, 행사 진행을 담당하던 목사님 한 분이 제게 다가와 귓속말을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어른들 보시기에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축도할 준비를 하십시오."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저런 이야기였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상황에서 "아니오, 못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머리 속에 복잡한 중에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혜민씨에 마지막으로 질문했습니다.
"인터뷰를 하시며 어떤 생각을 들었나요?"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과거 이야기를 했어요. 내 인생의 전반부에 대해 말하다보니…… 그때는 나이가 어려서 잘 몰랐던게 많았던거 같아요. 저는 3, 40대 때 빨리 늙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뭔가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현실적인 삶의 무게랄까, 아이에게 부모로서 물려줘야 할 신앙적인 것들이랄까, 늘 그런 부담감들이 있어서 빨리 늙고 싶었어요. 빨리 50대 후반이 되면 좋겠다. 그러면 공부도 다 시켜놓고, 결혼도 시키고…… 자기 가정을 이루게 할 수 있겠다. 평범한, 저처럼 특별한 가정이 아니고, 우리 아이는 평범한 가정을 이루게 하는게 부모로서 내 사명을 다한게 아닐까라고 생각했었죠. 그래서 빨리 나이들고 싶었어요. 그때쯤이면 더 이상 치열하게 살지 않고 삶에 여유가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지금도 저는 아들이 서른에 장가가길 바래요. '엄마 육십 전에 장가가고, 예쁜 아이도 낳고하는거, 그게 엄마 소망이다'라고 이야기해요."
혜민씨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습니다.
"물론 제가 뜻한대로 다 살아지진 않았어요. 열심히 살긴 했지만 자식 키우는 것은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앞으로도 하나님이 만들어가실 것은 믿고 살아요. 어찌되었든 세상적인 시각에 비춰보는 것보단 행복했던 것 같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다."
환한 미소가 혜민씨의 얼굴에 걸렸습니다.
"서른넷, 진짜 어린 나이였죠. 그런데 크게 두렵지는 않았어요. 뒤돌아보니, 아…… 진짜 감사한 것 밖에 없구나…….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교회 와서도 좋은 분들 진짜 많이 붙여주셔서 그분들 바라볼 수 있게 하셨고, 또 좋은 생각들 품고 살 수 있게 해주셨어요. 교회는 어려운 시기를 거쳤지만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았어요. 감사해요. 다만 조금 아쉬운 건…… 치열하게 살면서 아이랑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게 아쉬워요. 그리고 저는 30대 때 교회생활을 시작했는데, 우리 아이는 청년 시절에 뜨겁게 신앙생활하는 걸 바랬어요. 그런데 별로 그런거 같지 않아요. 그래서 신앙 좋은 돕는 배필을 꼭 만났으면 좋겠어요. 가정 안에서 서로 도전 받을 수 있는…… 남자들은 엄마 말은 안들어도 부인 말은 들으니까요."
"무서워서 말을 잘 듣죠."
"그렇게 변해가기를 바래야죠."
혜민씨의 미소가 깊어졌습니다.
* 이재경(2015). 가부장제 이후의 한국 가족 - 정상성에서 유연성으로. 한국문화연구, 29(0), pp. 28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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