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21장 1절 27절 나눔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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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5-06-28 01:31본문
엘비스클럽 요한계시록 21장 1절 27절 나눔 요약 250627
하늘로 가는 천국인가? 하늘에서 오는 하나님의 백성인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린 새 예루살렘을 일컫는 도성(city)이라는 단어가 17회 이상 반복 강조되고 있는 21장은, 17장의 “큰 바다 물 위에 앉은 큰 창녀”의 심판과 18장의 도시 바빌론의 패망과 대조되는 신부 새 예루살렘의 영광에 집중하고 있습니다(17장 1절과 21장 9절에 공통적으로 재난이 담긴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중 하나가 등장하는 것은 심판과 구원이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도성 새 예루살렘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미 19장 7절과 8절에서 “어린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라고 예고한 바 있는 데 본문 2절에서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와 같이 차리고”라고 했고 이에 상응하는 9절에서는 “어린 양의 아내인 신부”라고 한 점을 종합하면 그리스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진 교회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cf.엡5:23). 이 신부인 새 예루살렘에 대한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묘사(11-21절, 주로 보석으로 꾸며진)는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완전한 영광과 빛에 반응(보석)하기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춧돌과 대문에 새겨진 12사도와 12지파의 이름은 이 신부인 새 예루살렘이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을 포괄하며 측량한 숫자들 역시 숫자 12와 관련되어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함 광대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사방이 광대한(2400km) 정방형의 일종의 지성소 모양을 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드러내기에 합당함을 시각화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3절의 “하나님의 집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실 것이요.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라는 말씀은 임재를, 그리고 22절과 23절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영광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는 그안에서 성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전응한신 주 하나님과 어린양이 그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도성에는, 해나 달이 빛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 주며, 어린 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시기 때문입니다.” 에스겔 40장에서 42장의 성전 측량 장면은 오늘 본문의 새 예루살렘 측량 장면과 유사하기 때문에 두 본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짧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에스겔의 성전이 장차 올 실체의 그림자였다면,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실체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의 측량 장면은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배경을 제공하며, 두 장면을 함께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얼마나 점진적이면서도 완전하게 성취되는지를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gemini).”
이 본문은 너무나 자주 우리가 미래에 경험할 (죽어서 가게 되는) 천국에 대한 묘사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초점은 천국이라는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새 예루살렘 도시에 있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2절, 9절, cf.골3:1-4)). 그리고 이 도시는 신부라는 관계적 언어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에 신랑인 어린양, 하나님과 새 예루살렘이 관계적으로 상호 내주(페리코레시스)하고 엮여 있음을 다양하게 본문이 그리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절은 분명히 이 묵시가 최종적이고 미래적인 실체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과거와 현재에 누리게 되는 새로운 현실인 새로운 창조(new creation 고후 5:17 5절-“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와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우리 안에 시작된 이 새로운 창조,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가 장차 어떻게 온 우주적인 영광 속에서 완성될 것인지를 보여주는 궁극적인 희망의 파노라마가 여기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역동적인 관점을 가진다면 우리가 하나 더 본문에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24절에서 27절까지 도성에 “들여오고”“들어가”는 것에 대한 묘사조차도 고정적으로 이해하기 보다 역동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25절 “그 도성에는 밤이 없으므로, 온종일 대문을 닫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은 민족들을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 도성안으로 부르시는 삼위 하나님의 부르심이 열려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6절이나 27절에 묘사되는 악한 사람들도 고정된 것이라기 보다 빛과 영광에 지금이라도 이끌리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도록 초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죽어서 가게 될 천국이라는 공간의 모습이 이렇게 화려하니 지금 여기서 구차한 현재의 삶은 견디고 참는 것이 최선이다 라고 본문을 통해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본문을 보아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빛에 걸맞는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을 사모하고 그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창조가 완성되는 때,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있다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와 이런 영광과 빛에 걸맞고 그것을 통해 빛나는 보석과 같이 드러나게(나타나게 cf.골3:4)될 것이라는 확신을 본문이 주고 있습니다. 비록 구차한 현실을 살아간다 할지라도 이런 영광스러운 자기 이해의 전망, 소망을 가진자들이 누릴 최고의 선물은 소위 천국이라는 보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이 친히 함께 계시는 그 상호내주하는 페리코레시스 관계 바로 그것입니다.
삶,일,구원(3191)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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