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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2018년 6월 일상사연 - 늦게 배운 코바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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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 건 조회 4,149 회
작성일 18-06-0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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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 배운 코바느질


2016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30대 기혼여성 333만명 중 35.2%에 달하는 117만명이 경력 단절을 경험했습니다. 결혼-출산 과정을 거치며 그간 해왔던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여성이 그렇게 많았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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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번에 만난 ‘코바늘’씨는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운 후 새로운 경력을 시작한 분이었습니다. 후덥지근한 어느 날, 저는 차가운 음료를 사이에 두고 코바늘씨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나이와 지금 하시는 일에 대해 듣고 싶네요."
"방년 38세예요."

대안학교 교사인 코바늘씨는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학교의 특성상 아이들이 많지 않아 1, 2학년이 합쳐진 반의 담임을 맡고 있으며, 동시에 전학년을 대상으로도 수업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코바늘씨는 고학년에게는 합창을, 저학년에게는 손공예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대안학교에 관한 '카더라 통신'은 적잖이 접해보았지만 실제로 대안학교에서 일하는 분을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기에 궁금증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음...... 저는 '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동으로 공교육 시스템을 맥락 삼아 생각하는 편입니다. 구체적인 그림이 잘 떠오르지 않는데, 혹 이 일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 혹은 그간의 여정 같은 것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죠? 태어났을 때부터?" (웃음)
"너무 일찍부터 시작하면 말씀하시기도 힘들고 정리하는 저도 힘들어요. (웃음). '일'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해주시면 좋겠네요."

코바늘씨는 미소지으며 잠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결혼하고 처음 몇 년은 다른데 눈돌릴 틈이 없었어요."
"육아 때문에요?"
"그렇죠. 아이들을 좀 키우고 나서야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음...... '자아실현' 같은 거창한 구호를 생각했던 건 아니였어요. 순전히 경제적 상황 때문에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무튼 그 즈음 후배가 하고 있던 유아음악 수업을 소개 받아서 그 일을 삼 년 정도 했어요."

저는 고개를 뒤통수를 긁적거렸습니다.

"무식한 질문이 있는데요, 유아음악 수업은 뭔가요? 아이들 집에 방문해서 음악 가르치는 건가요? 과외나 레슨처럼?"
"그건 아니구요, 회사 소속으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을 방문해서 음악 수업을 하는 일이었어요. 보통 직장보다는 늦게 출근하고 빨리 퇴근할 수 있는 일이라, 아이를 돌보며 하기엔 좋았죠."
"그럼 거기서 삼년 동안 일하시고, 지금 계신 대안학교로 옮기신 건가요?"
"네. 처음엔 아이들 유치원 보내고 일하러 가서, 아이들 마치기 전에 일 끝내고 돌아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어요. 하지만 점점 견디기 힘든 일이 많아지면서 결국 그만두게 되었죠."

코바늘씨는 잠시 말을 멈추었습니다. 저는 코바늘씨가 이야기를 이어가도록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회사의 분위기? 뭔가 회사에서 요구하는 사항들 때문에 거기서 계속 일하기는 힘들었어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다보니 회사에서는 제가 좀 더 예쁘게 하고 다니길 원했고, 또 갑의 입장인 유치원/어린이집 원장들에게 더 많이 숙이기를 원하는 분위기 때문에 많이 지쳤어요. 물론 어떻게든 참고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 버텼는데, 삼년 정도 되니까 더 이상 견디기 힘든 상황이 되어서 이직을 결심했죠. 그때 스트레스를 정말 많이 받았어요. 원래 하던 일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급여도 적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아이들 돌볼 시간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다른 일을 하려고 하니 당장 아이들 케어할 사람이 딱히 없었고......."

코바늘씨가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리고...... 전, 이 나이 먹도록 내가 뭘 잘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몰랐던 거예요. 그저 바라는 건 오래 할 수 있는 일, 나름 안정적인, 평생 직장을 갖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정작 제가 가진 자원, 실력, 뭐 그런건 턱없이 부족하단 생각에 불안하고 초초했어요.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려면 대신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뭐라도 준비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급한 마음? 불안한 마음? 그런 마음으로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인터넷으로 방과후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는 걸 보고 등록했어요."
"보통 그런 자격증 취득하려면 비용이 좀 들지 않나요?"
"맞아요. 마음이 급하고 불안하다보니 남편이랑 의논도 하지 않고 거금 백만원을 덜컥 결제해버렸죠. 인터넷으로 수업을 듣고, 자격증을 땄어요. 그리고 급하게 자료를 수집해서, 방과후 교사 모집하는 공고가 뜬 학교마다 서류를 제출했죠. 서류 제출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은 불안했어요. 그리고 서류 넣은 곳마다 불합격했어요."
"아, 굉장히 낙심되셨겠네요."

그래도 지나간 일이라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코바늘씨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대학 때 따둔 보육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그걸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었어요. 방과후 교사로 일하는데 실패하고, 어린이집 교사를 하려고 문을 두드렸는데 이번엔 그것도 다 안되었어요. 뭐가 계속 안맞았죠. 결국 원래 하고 있던 음악 교사 일을 그만 두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굉장히 답답해했어요. 계속 거절당한 것 때문에 감정이 정말 밑바닥까지 내려가있었죠. 당장 일을 하지 않으면 가정 경제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라 불안감은 더 커졌구요."

코바늘씨는 찻잔을 입에 가져갔습니다.

"남편은 가정 경제가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제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곧바로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면서, 일이 구해지지 않으면 한 학기 정도 쉬면서 천천히 준비해보자고 말했어요. 고마운 말이긴 했는데 여전히 불안했죠. 그러나 남편이 지인에게서 (지금 일하게 된) 학교에서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남편은 제가 이 학교에 잘 맞을 것 같다고 한 번 지원해보라고 했죠. 전 자존감이 많이 낮아진 상태여서 '내가 가진 자원이 쥐뿔도 없는데 또 떨어지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많이 망설였는데요, 남편은 '어차피 많이 거절 당했는데 한 번 더 거절 당한다고 더 잘못되는게 있겠어?'라고 말했어요. 당시엔 되게 웃겼는데, 그 말 듣고 서류 제출할 수 있었고 면접 준비하며 마음이 편해졌어요. 뜻밖에 편안한 마음으로 절차 진행하고 순적히 합격하고 새 직장 생활을 시작했죠."

코바늘씨는 연년생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결혼 초에는 주말부부 생활을 하며 거의 혼자 아이들을 키웠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큰 후에야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결혼과 출산, 그리고 육아 과정에서 경력이 단절됩니다. 저는 결혼 이전에는 코바늘씨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선교단체 생활

"원래는 선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아, 그럼 선교여행이나 단기선교 경험도 있으시겠네요."
"네, 대학생 때 중국이랑 말레이시아에 다녀왔었구요(선교여행), 그때 만난 선교사님과 연락하다가 대학 졸업 후에 1년 간 말레이시아에 있었어요. 현지인들이 생활하는 대학 기숙사에서 두 학기 머물면서 선교사님 사역도 돕고, 방학 때는 말레이시아 여행도 다녔죠. 정말 소중하고 귀했던 시간이었어요. 행복했구요."

코바늘씨의 눈이 촉촉해졌습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Y선교단체에서 하는 D라는 훈련을 알게 되었어요. 그때도 말레이시아에 있었는데요, 호주에 있는 한인 D에 지원서류를 넣고, 합격해서 말레이시아에서 바로 시느니로 넘어갔죠. 시드니에서 10개월쯤 머물며 훈련 받고, 다른 나라로 전도여행도 다녀왔어요. 거기 더 머물면서 건반 반주자로 섬기기도 했구요."
"되게 즐거우셨을 것 같아요."
"맞아요. 너무 좋아서 그게 계속 머물러 있고 싶었어요. 하와이에 있는 예배학교 본부에 가서 더 훈련 받고 건반 연주자로 있고 싶은 마음이 있었죠."
"만약 그랬다면 지금이랑 인생이 많이 달라졌겠네요."

제가 웃으며 거들자 코바늘씨도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당장 들어오라고 했어요."
"아니, 왜요?"
"일단 D가 돈이 많이 들구요......."
"아이고, 어딜가나 이놈의 돈......."
"그리고 결정적으로 엄마가 당장 들어와서 선보고 결혼하라고 했어요. 굉장히 힘든 결정이었어요. 엄마를 이기지 못해서 귀국해서 난생 처음 선을 봤죠."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그때 코바늘씨 나이가...... '선' 보단 소개팅 같은 거 아니었나요?"
"엄마가 선 보러 오라고 말했으니까요. (웃음) 그때 제가 아마 스물 여섯, 일곱 쯤이었어요. 상대는 목사님이었는데, 대머리 목사님이었어요.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아, 그 나이 땐 당황스러우실 수 있었겠네요."

코바늘씨는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너무 좋았어요. 대화도 잘 통하고 다 좋았었죠. 다만 그때의 저는 그 외모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어요. 엄마한테 솔직히 말하니까...... 난생 처음으로 엄마랑 단 둘이 커피숍에 가서 한참동안 이야기를 했어요. 엄마는, 제가 왜 그 사람이랑 결혼해야 하는지를 구구절절히 말씀하셨어요. 제가 한 번도 못들어본 이야기가 많이 나왔어요. 아빠가 술을 많이 드시고 가정을 풍비박산 내신 이야기부터...... 결국 엄마의 간청에 못이겨서 세 번쯤 더 만났어요. 하지만 도저히......."
"지금 남편분한테 실례가 되는 질문이겠지만, 만약 지금의 경험과 마음가짐으로 그분을 만났다면 결과가 좀 달라졌을까요?"

제 짖궂은 질문에 코바늘씨는 의외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그때랑 달랐겠죠. 외모보다 성품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대화가 잘 통하는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으니까요. 다만 그때는 제가 그런 걸 경험으로 체득하지 못했어요. 나란히 걸어가는 것조차 힘들었어요."
"어머님은 더 압박하지 않으셨나요?"
"엄마가 교회 권사님들한테 부탁을 해서, 권사님들이 총공세를 하셨죠. "코바늘아, 머리는 검은콩 먹으면 다시 날 수 있다더라"는 말씀을 자꾸 하시고......."
"거, 검은콩이요......."
"엄마랑 권사님들이 그러셨던게, 그분을 당시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이 소개시켜주셨거든요. 같은 교단 총각 목사님을 담임목사님이 소개해주신거죠. 장애인 사역하시는 분이셨는데, 되게 훌륭한 분이셨어요. 가끔씩 그 분이랑 결혼했으면 삶의 방향이 되게 달라졌겠다는 생각을 해요."
"혹시 그분이 결혼하셨는지는 아시나요?"
"하셨어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웃음) 그런데 무슨 이야기하다 여기까지 온거죠?"
"D 중단 사연 잘 들었습니다."

우리는 크게 웃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Y에서 건반연주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처음에는 자원봉사자로 지원했는데, 그쪽에서 기도해보더니 자원봉사자가 아니라 간사로 합류할 것을 권했죠. 결국 권유 받은 대로 찬양사역 쪽에서 간사로 지내게 되었어요.”
“Y가 첫 직장이었다고 봐도 되겠네요.”
“아, 그런가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무급이긴 했지만...... 후원금으로 살았는데요, 되게 좋은 시간이었어요. 삼년 쯤 같이 있었나? 건반 연주할 수 있다는 것도 좋았고, 거기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좋았죠. 그런데 어느날 문득 그곳에서 기도하는 방식, 그리고 간사로서 사역하는 것들에 대한 의심이 시작되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면서 되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노력하는데, 나는 그러한 삶의 치열한 고민이나 일상에서 삶의 고민 없이 너무 쉽게 그 사람들의 문제를 바라보고 별로 공감도 못하고.......”

코바늘씨는 컵을 만지작 거리며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런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되서, 이곳을 나와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저는 대학 다닐 때부터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저 피아노 레슨 같은 거나 조금했었구요, 방학 때면 선교단체 수련회 준비와 참석으로 시간을 다 보냈어요. 전에는 딱히 돈 벌어야겠다는 생각도 크게 안해보다가 그 즈음 고민을 시작하게 되었구요, 비슷한 시기에 남편을 만나서 Y를 그만두고 어린이집 교사 생활을 시작했어요. 한 일년 쯤? 그러다가 결혼하고 아이 갖고 하면서 그만두었죠.”
“Y의 찬양사역은 유명하잖아요. 거기서 삼년이나 활동하셨다니, 피아노 실력이 대단하신가봐요?”

저는 코바늘씨를 슬쩍 추켜 세우며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Y도 그렇고, 많은 경우에 찬양인도자는 주로 남성들이 하잖아요. 당시 그 단체에 몸 담고 계실 때 여성들은 지도력을 발휘할 기회가 좀 있었나요?”
“여성의 지도력이라...... 음...... Y는 여성 리더십이 굉장히 강력한 편이었어요. 여성이라서 특별히 배제되거나 하찮게 보는 면은 없었던 것 같아요.”
“찬양인도자는 다 남자 아닌가요?”

단정적인 제 질문에 코바늘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뇨. 다른 지역 중엔 여성이 찬양인도자로 세워진 경우가 있었고, 우리 지역도 대학생 대상 모임에선 검증된 여성이 찬양인도자로 서기도 했어요.”
“‘검증’이란 말이 인상적이네요.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는 선교단체의 경우 ‘검증’은 대개 ‘세월’이 필요하잖아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자연스럽게 검증이 이루어지게 마련인데.......”

이번에는 코바늘씨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서 여성리더들은 대부분 싱글이었어요. 아니면 Y 내부에서 만나 결혼한 사람이었구요. 그나마도 결혼한 사람보단 싱글인 사람 쪽이 더 많았던 것 같네요. 나이가 좀 있고, 오랜 시간 동안 몸 담은 사람들이 리더로 세워졌는데...... Y 외부 사람과 결혼하고도 계속 리더십으로 활동하는 경우는...... 남자들은 있었는데, 여자들은 그런 경우를 못본 것 같네요.”

#여성들

결혼 전에 어떤 일을 했는가를 묻고 답하다보니 여성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저는 코바늘씨의 이야기 속에서 대단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코바늘씨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비롯해, 영향을 주고받는 주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엄마는 되게 강한 여성이예요.”

코바늘씨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어머니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엄마는 외동 아들인 아빠와 결혼해, 처음부터 몇 년 전까지 할머니, 그러니까 엄마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셨죠. 할머니는 엄마를 많이 미워하셨어요. 아들을 못낳았다는 이유로 많이 구박하셨어요. 저랑 제 동생의 기억 속에서 할머니는 아주 권위적이셨고 한 번도 엄마에게 따듯한 말을 하지 않으셨어요.”
“아버님의 역할이 중요했겠네요.”
“그렇죠. 하지만 아빠는 한 번도 그런 문제에 개입한 적이 없었어요.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다 엄마가 처리해야 하셨어요. 그 시절 많은 아빠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아빠도 집에선 잠만 자고 눈 뜨면 일하러 나가셨죠. 그런데 그때 집이 경제적으로 힘들었어요. 아빠는 열심히 일해서 늘 일정한 봉급을 받아오셨지만, 그 월급을 다 차압당할만큼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엄마는 시장에서 장사도 하셨죠. 할머니 모시고, 집안 일 혼자 감당하고, 시장에서 일도 하시고...... 그 상황을 엄마는 기도하시면서 다 헤쳐나오셨어요. 그래서 전 엄마가 하는 말을 거역하기 힘들었어요. 엄마가 강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기도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헤쳐나온 분이란 걸 옆에서 봐왔으니까요.”

코바늘씨가 말을 멈추고 찻잔을 다시 만지작거렸습니다.

“부모님의 성격이 강한 사람들은 대개 심하게 반발하거나, 아니면 아예 거역하지 못하거나 하는 양극단을 선택하는 경우가 잦던데요, 코바늘씨는 어떠셨나요?”
“저는 거역하기 힘든 경우였어요. 돌이켜보면 당시엔 내 선택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엄마의 조언...... 배후에 깔려있던 엄마의 뜻대로 선택한 것이 많았어요. ‘엄마가 기도해보니 이렇더라’, ‘이건 안되겠다’ 같은 이야기들이 굉장히 강한 영향을 끼치는 바탕 위에서 형식적으로 제가 선택하는 모양이었죠. 그래서인지 결혼하고 나서도 옷이나 신발을 살 때, ‘이거 샀다가 엄마한테 혼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어요.”
“결혼 후에도요?”

코바늘씨는 수줍게 웃었습니다.

“어이가 없죠? 결혼하고도 몇 년 동안 그런 감정이 지속되었어요.”
“지금은 안그런가요?”
“벌써 결혼한지 10년쯤 되었네요. 이젠 제가 결혼해서 엄마와 분리된 존재가 되었다는 걸 엄마도 저도 익숙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결혼 초엔 그게 잘 안되었어요. 결혼 초 삼년 정도 주말부부 생활을 했어요. 결혼하고 곧 바로 첫째를 가졌고, 연년생으로 둘째도 가져서 그 삼년간 엄마가 많이 도와주셨어요. 엄마 영향이 더 절대적이 되었죠. 주말부부 생활을 끝내고, 친정에서 전보다 조금 멀리 이사를 한 후에 의존하는게 많이 해결되었어요. 물론 지금도 자주 만나고 많은 부분을 의존하지만, 전처럼 엄마가 제 삶에 간섭하고, 저는 정서적으로 얽매이는 경우는 놀라울 만큼 없어졌어요. 엄마도 언젠가부터 제가 엄마 곁을 떠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게 되셨죠.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면서 그렇게 서로서로 인정하고 적응하게 되었어요.”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의 순기능인가요? (웃음) 물리적인 거리 확보가 중요하네요.”
“네, 제 경우엔 그랬어요.”

코바늘씨의 얼굴이 환해졌습니다.

“엄마 말고 요즘 정기적으로 만나 영향을 주고 받는 여성들이 있나요?”
“우리 가족은 작은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데요, 주일 예배 드리고 점심 식사 후에 자연스럽게 남녀가 다른 테이블에 모여서 대화를 해요. 아주 사소한 이야기로 시작하죠. 아이들 이야기, 직장 이야기...... 그러면서 책을 한 권씩 정해 읽고 나눠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깊어지죠. 기도제목도 나누는데, 때로는 큰 변화 없이 반복되는 일상 때문에 특별한 기도제목이 없을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시급하고 진지한 문제를 두고 기도부탁하기도 하구요.”


‘책 나눔’을 한단 소리에 귀가 번쩍뜨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읽고 나눈 책 중 인상적인 것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코바늘씨는 부끄러워하며 딱히 추천할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전 교회에서 책 나눔할 때마다 제대로 읽어간 적이 거의 없었어요. 하루하루 허덕거리다가 책 읽어야 한다는 것 자체를 까먹을 때가 많았구요, 제가 발표해야 하는 날이면 그 부분만 좀 읽었구요. 그래서 부끄럽지만 추천할만큼 기억하는게 없어요.”
“워킹맘으로 사시면서 책 읽는게 쉽지 않으시겠네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 아니란게 제일 큰 이유겠죠. 시간이 나도 책보단 리모콘 잡는게 더 좋구요. 퇴근하고 집에 오면 짬이 없긴 해요. 가방 내려놓자마자 밥해야 하고...... 남편이 늦게 오는 날은 애들 씻기고, 설거지에...... 다음날 아침에 먹을 것도 미리 준비해둬야 하죠. 그래야 출근 시간에 덜 허둥거리니까요. 퇴근하고 잠들기 직전까지 주방에서 시간을 거의 다 보내요. 사이사이에 간단한 청소와 빨래도 하구요. 그러다보면 보통은 바로 잘 시간이예요. 책 볼 여유가 거의 없고, 여유가 생겨도 책이 눈에 안들어오죠.”
“교회 자매 모임에서 책 나눔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부분은, 독서 자체라기보단 책을 매개로 해서 함께 이야기 나누고 서로 공감해주는 시간 자체라고 이해해도 될까요?”
“네, 책을 가운데 두지만 책보다 사람에게서 배우는 시간이죠.”

코바늘씨의 솔직한 이야기를 들으니 오래 전 읽었던 <리처드 포스터의 묵상 기도>(IVP, 2012) 한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포스터는 “나는 갓난아기의 엄마다. 나도 묵상 기도가 가능할까?”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 그래서 당신 자신에 대해 관대해지라고 제안하고 싶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아시고 이해하신다. 결국 애초에 엄마와 아기의 관계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당신이 아기를 돌보고 있다면, 생명이 이동하는 것에 대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작디작은 아이가 당신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을 때, 당신은 주님께로부터 생명을 받기 위해 조그만 소리로 기도할 수 있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p. 146)

#일터의 어려움

“일반적인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시나요?”
“아침 7시쯤 일어나요. 씻고 출근준비를 하면서 아이들 등교 준비도 같이 하죠. 아이들 아침 먹을 것만 챙겨주고 저는 샌드위치 같은 것 간단히 챙겨서 8시쯤 집에서 출발해요. 운전하면서 아침을 먹어요. 8시 40분쯤 학교에 도착하면, 20분 정도 동료 교사들과 커피 마시면서 이야기를 좀 하구요, 9시부터 우리반 아이들(1, 2학년)과 한 시간 반 동안 수업을 진행해요. 그 다음에 30분간 휴식 시간을 갖구요, 11시부터 한 시간 반 정도 5, 6학년 수업을 진행하구요, 그 후로 2시까지 점심 시간이예요. 점심 먹고 남은 시간 동안엔 주방 선생님이랑 코바늘로 뜨개질을 하면서 수다를 떨어요. 그런 후에 오후 2시부터 한 시간 반동안 수업을 하구요, 그 시간 끝나면 청소 시간이예요. 아이들이 청소를 마치면 하교 시키고 학교에 다른 일이나 모임이 없으면 저도 퇴근해요. 일찍 오는 날은 바로 집에 오면 4시 40분쯤 되요. 아이들 오기 전에 저녁 식사 준비하고, 오면 씻는 것 도와주고, 저녁 식사 후에 빨래랑 집안 정리...... 그러고도 시간이 좀 남으면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요. 간단한 놀이를 같이 한다거나하는 식으로. 9시 반에서 10시 사이쯤 아이들을 재우는데요, 보통은 아이들 재우다가 저도 같이 잠들어요. 아이들보다 제가 더 일찍 잠드는 날도 많구요.”
“그렇게 하셔야 몸이 버틸 것 같은 스케쥴이네요. 아, 수업시간이 보통 학교보다 좀 기네요. 한 번에 한 시간 반씩.......”
“네, 우린 대안학교라서 일반적인 공교육 기관이랑 시간 운영이 좀 달라요. 교과서도 따로 없구요.”
“교과서가 없으면 무얼 기준으로 가르치나요?”

제 질문에 코바늘씨는 눈을 빛내며 대답했습니다.

“교사의 행동과 말이 바로 교과가 되죠. 그래서 교사가 더 많이 연구해야 해요. 우리 학교는 기본적으로 교사가 아이들게에게 많은 지식을 제공하는 걸 지양하는 방침을 갖고 있어요. 지식 자체를 가르치기보다 아이들이 배움의 욕구를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걸 더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교사가 배움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배움을 주도하도록 하죠.”
“좋은 말씀인데, 무척 어려운 일일 것 같네요.”

쑥스럽게 웃으며 말하자, 코바늘씨는 마주 웃었습니다.

“되게 어려워요.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이 있고, 욕구의 방향이 다 달라서 되게 힘든 일이예요. 만약 아이들의 개별성을 존중하면서 거기에 맞는 교육내용을 마련해서 따로따로 넣어주려고 했으면 진짜로 힘들었을거예요. 다행히 우리 학교 교육방침 덕에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제공해야 한다는 부담은 좀 덜해요. 그 시간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 고민은 늘 있지만, 고민하는 것 자체로 인해 너무 힘들거나 고통스럽진 않아요.”
“일터에서 주로 부딪히는 문제가 있다면 어떤 걸까요?”

코바늘씨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향했습니다. 마치 그 시선 끝에 아이들이 있는 것처럼.......

“1, 2학년을 케어하다 보니까 아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들을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조금 있어요. 어...... 우리 반이 총 여섯 명인데, 그 작은 집단 안에서도 어떤 아이는 굉장히 영악하고 어떤 아이는 순해요. 개성 강한 아이들이 섞이며 서로서로 제게 찾아와 신문고 두드리듯 이야기를 해요. ‘선생님, **가 내 발을 밟았는데 그냥 지나갔어요’, ‘**이가 나랑 같이 놀기로 했는데 그냥 가버렸어요’ 등등...... 사실 듣다보면 너무 지쳐요. 일일이 반응해주기 힘들죠. 지혜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늘 들어요. 사랑도 필요하구요. 그런 이양기를 듣고, 교실 안팍에서 아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면 저도 모르게 편견이 생기거든요. 어느 순간 색안경을 쓴 채 아이를 바라볼 때가 있어서 힘칫흠칫 놀라요. 미워하는 마음, 귀찮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있긴 한데, 한 아이를 온전히 사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은 참 어렵네요. 특히 몸이 피곤하거나 아플 때, 아니면 기분이 안좋을 때 스스로 경계해야 해요. 늘 스스로 경계하고 마음을 살피면서 다잡지 않으면 안되네요. 마음 공부가 되는 것 같아요.”
“그런 문제를 다룰 때 신앙은 어떤 도움이 되나요?”
“신앙이 도움…….”

코바늘씨는 나즈막이 중얼거리며 창밖 하늘을 흘끗 보았습니다.

“도움이 되죠. 문을 나설 때마다, 운전을 할 때마다 ‘오늘도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해달라’고 늘 기도해요. 아이들 때문에 힘들고 짜증날 때도 그때마다 수시로 ‘사랑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요. 따로 시간을 떼서 기도하기보다 그렇게 수시로 기도하고 구하는게 큰 도움이 되요.”

저는 짖궂게 미소지으며 물었습니다.

“동료 교사를 두고 기도하신 적은 없었나요? ‘저 선생님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해주세요’라고.”
“아, 학교 선생님들끼리 분위기는 정말 좋아요. 그런 문제라면 여기 오기전 삼년 동안 일했던 직장에서 많이 겪었죠. 결혼 전에 어린이집 교사 생활 할 때는 딱히 이야기할만큼 어려운 일은 없었어요. 결혼하고, 아이들 좀 키워두고 본격적으로 돈을 벌어야 해서 새로 직장생활 시작하면서 마음 고생을 호되게 했죠. 사회생활이라고 할만한 걸 전엔 별로 해보지 않다가 뒤늦게 시작했으니까요. 그 삼년 동안 정말 많이 생각했던게 ‘참 많은 직장인들이 이렇게 힘겹게 살고 있구나. 진짜 치열하게 살고 있구나. 매일매일 때려치고 싶은 마음을 이겨내며, 매일매일 비굴해지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거였어요.”

코바늘씨의 목소리에서 회한이 느껴졌습니다.

“어떤게 힘드셨나요?”
“제일 힘들었던 건 외모에 대한 지적이었어요. 저는 나름대로 수업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았죠. 사장님은 좀 더 예쁘게 꾸미고 다니길 대놓고 요구했는데, 전 옷 살만한 여유가 없었고,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들어본 적도 없어서 어떤 방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전혀 몰랐어요.”
“대놓고 요구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했다는 건가요?”
“어떤 날은 제 옷을 보고 이런 옷은 입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하구요, 화장을 좀 하고 다니라는 말도 들었어요. 그리고 제일 데미지가 컸던 건...... 매년 11월이 되면 수업 재개약을 하는데, 최선을 다해 수업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원에서 교사를 바꿔달라는 요청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원장들 보기에 나이가 많고 너무 뻣뻣해 보인다는 이야기를 사장이 돌려서 했죠. 그런 평가를 받으니 자존심이 엄청 많이 상하고 자존감이 무너졌어요. 내가 이것밖에 안되는 사람이람이란 생각에 너무 부끄럽고 서러워서 한달 동안 많이 울었어요.”
“그때가......?”
“2년차 때였어요. 아이들보기도 부끄럽고, 너무 마음이 바닥까지 떨어져서 그만두겠다고 남편에게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남편은 위로해주기보단 현실을 이야기해줬어요. ‘다 그렇게 일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환경에서 참고 일하며 살아간다. 여기서 그만두면 나중에 어딜 가서도 명함 하나 제대로 내밀 수 없다. 기본 삼년 이상은 해야 나중에 어디로 이직할 때 이력서에 한 줄 쓸 수 있다”라구요.”
“아이고, 더 서운하셨겠네요.”

코바늘씨는 입꼬리를 올렸습니다.

“그때는 되게 미웠어요. 지나고 보면 필요한 말이긴 했는데....... 결과적으론 남편 말 때문에좀 더 독한 마음 먹고 일년을 이를 악물고 버텼죠. 되게 모욕적인 원장을 만났을 때도 이를 악물고 바닥을 설설 기었어요. 을 입장에서 철저히 갑 대접을 해주고, 수업도 최선을 다해서 하고...... 진짜 그렇게 하니까 나중엔 너무 진이 빠져서 정말로 그만둬야겠다라고 마음을 먹으니까 그제서야 회사에서 저를 잡았어요. ‘원에서 평가가 너무 좋다. 선생님이랑 계속 하고 싶어하는데 그만두면 어떡하냐?’라구요. 원장들도 ‘선생님이 너무 좋다고 우리 선생님들이 이야기하는데 왜 그만두냐?’고 말했어요.”
“박수칠 때 떠나신거네요?”
“안좋은 소리 듣고 떠났으면 다른 사람들 기억에도 그냥 그런 사람으로 남았을테고, 저도 패배의식을 가지고 살았을텐데, ‘선생님 너무 잘하는데 그만둬서 아쉽다’라는 소리 듣고 그만둬서 되게 감사하고 감격스러웠어요. 그 시간 거치면서 모든 직장인들에게 존경심을 갖게 되었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멸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지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죠. 그 후론 눈물 섞인 하소연을 듣고 가볍게 ‘괜찮아, 기도하면 괜찮아 질 거야’라는 말로 위로할 수 없게 되었어요.”

저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습니다.

“아, Y를 그만둘 때 고민했던게 그 회사에서 보낸 삼년으로 조금 채워진거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러게요. 지금 생각하니 그렇네요.”

#엄마는 꿈이 뭐야?

“하루 일과를 알려주실 때, 점심식사 후 뜨개질을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원래 뜨개질을 취미로 좀 하셨나요?”
“전혀요.”

코바늘씨는 과하게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런 종류의 일을 전혀 할줄 몰랐어요. 아니 저는 제가 똥손인줄 알았어요. 피아노 치는 거랑 요리하는 거 빼곤 손으로 하는 일은 제대로 할 수 있는게 별로 없었어요. 심지어 동그라미도 제대로 못그려요. 큰애 임신 중에 문화센터에서 머핀 만드는 걸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보통 강사들이 그런 말 잘 안하는데요, 제가 만든 머핀을 보고 ‘이렇게 못만든 사람은 처음본다’고 말할 정도였죠.”
“정말요? 그런데 어쩌다 뜨개질을 시작하셨어요?”

코바늘씨는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우리 학교 교과목 중에 ‘손공예’가 있었거든요.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해서 배우기 시작했죠.”
“아, 그럼 손공예 수업을 맡았을 때 부담감이 컸겠네요.”
“그렇진 않았어요. 제 스타일이 일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저지르는 쪽이라 그런 것도 있었고, 처음에 연수 받을 때 뜨개질을 배웠는데 제법 재미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아이들 가르칠만큼은 금방 할 수 있겠지’란 마음도 좀 있었구요. 아, 그런데 생각보다 아이들이 너무 잘해서 처음엔 좀 당황했어요. 그래도 계속 노력하니까 지금은 아이들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은 된 것 같아요.”
“노력해서 나아지셨으면 똥손은 확실히 아니네요.” (웃음)
“‘기회가 없어서 못했나?’ 싶다가도, ‘일찍 접했으면 지금처럼 집중하진 않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가르쳐야 하니 더 열심히 하신거네요.”
“그렇죠.”

저는 씩 웃으며 질문했습니다.

“20대 때 학교 커리큘럼에 뜨개질이 있었다면 어떠셨을 것 같아요?”
“온갖 핑계를 대며 절대 안하려고 했을 것 같아요.” (웃음)
“‘가르치기 위해 배운다’는 걸 제외하면 그때와 지금의 차이로 어떤게 있을까요?”

코바늘씨도 씩 웃었습니다.

“그때는 앉아서 뜨개질만 하기엔 너무 재미있는게 많았어요. 뜨개질 자체가 굉장히 정적인 활동이잖아요. 가만히 앉아서...... 20대 때 전 가만히 앉아 뭔가에 몰입할 수가 없었어요.”
“재미있는게 너무 많죠.”
“맞아요. 특히 친구들 만나는게 너무 좋았어요. 여기서 친구 만나고, 저기서 친구 만나고, 수업 끝나면 동아리방 가고, 시내에 놀러가고, 소개팅도 하고...... 그때는 몇 발자국만 떼도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학교가 워낙 작아서 매점에 앉아만 있어도 아는 사람들을 금방금방 만날 수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딱히 재미있는게 별로 없어요. 아이들과 같이 보내는 시간은 정말로 굉장히 행복하지만, 생활 자체는 그때에 비해 정말 단조로운 일이 반복되는 패턴이예요.”

단조로운 일상의 반복을 말하는 코바늘씨의 얼굴에는 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러니 했습니다.

“지루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신 시점에 뜨개질이 찾아온 거네요.”
“그렇네요. 뜨개질 수업 덕분에 스스로 한계 지었던 것을 넘을 용기가 조금 생긴 거 같아요. 전에는 절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것들을 조금씩 해내면서 미래의 삶에 대한 기대도 조금씩 커져 가는 것 같아요. 결혼하고 몇 년 동안 육아에만 매달려 있어서, 아이들이 크고나서 더 이상 제 손이 필요 없게 될 때 찾아올 허무감 때문에 미리 두려워했었어요. 남들이 취미 활동으로 뭘 한다는 말을 들어도, 전 원래 딱히 취미란게 없어서 무얼 해야 할지도 몰랐구요. 그런데 마흔 가까이 되어 뒤늦게 취미가 생겨서 기분이 좋아요. 시기적으로도 적절한 것 같고.”

코바늘씨는 뜨개질이라는 취미를 미래와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질문으로 미래를 묻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어…… 우리 아이들이 가끔씩 저한테 ‘엄마는 꿈이 뭐야?’라고 물어요. 되게 난감하고 당혹스러운 질문이죠. 사실 나는 꿈이 없는데. 결혼한 후로는 하루하루 살기도 빠듯해서 미래에는 어땠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지 오래되었죠. 기껏 생각하는 미래는 ‘여름 휴가는 어떻게 보낼까?’ 정도죠. 미래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뒤늦게 뜨개질이라는 취미를 갖게 되면서 식탁보나 수세미 같은 것을 만들고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하며 살 수 있을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어떤 자리에서 어떤 역할을 하건, 자잘한 취미 하나로 일상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어요. 평범한 일상에 생긴 취미 하나가 소박한 꿈을 만들어 주네요.”

저는 짖궂게 웃었습니다.

“뜨개질도 싫증날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럴 수 있겠죠. 그땐 재봉틀을 배워볼까요?”

코바늘씨도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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