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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6과 - 깊은 데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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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열정이
댓글 0 건 조회 5,178 회
작성일 09-12-07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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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CEO 6과  - 깊은 데로 가라                                    by 요약 김종수

  이제 신학에서 영성으로, 의미에서 동기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가 일하러 갈 때 몸과 정신과 영을 모두 가져간다.

바쁘지만 깊지 않는 모습
  사업은 스트레스가 많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많다. 그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원인은 우리를 정신없이 바쁘게 만드는 내면의 충동이다. 영어로 사업(business)이란 단어와 바쁨(busy-ness)이란 단어가 비슷한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전도서에는 분주한 일상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4:4, 표준 새번역)

  그토록 바쁘게 사는 이유 중에 하나는 무엇가를 성취해서 남의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인은 자기 속에 깊이 뿌리 박힌 이런 부정적인 동기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해 보아야 한다. 왜 나는 비판에 그토록 민감한가? 왜 나는 일정표를 빈 칸 없이 꽉 채워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나는 장소, 지위, 사역을 포기하는 게 무척 어려운가? 왜 그토록 경쟁적인가? 내가 성공하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왜 나는 타인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 수 없는가? 왜 나는 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늘 사람들이 필요한가? 왜 나는 그토록 불만족스러운가? 왜 나는 남을 통제하고픈 마음이 드는가? 왜 나는 그토록 바쁜가? 왜 나는 인간관계를 다 태워 버리는가? 왜 나는 때때로 동기가 유발되지 않는가?

기독교 영성
  기독교 영성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생활방식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뿌리박고, 공동체에 근거를 두고, 교회의 풍부한 전통의 조명을 받아, 삶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일이다. 그것은 단지 경건과 기도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영역과 관련이 있다. 또 개인과 집단, 교회와 세상, 내면과 외면,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 및 세상에서의 정의와 모두 연계되어 있다. 더 나아가 기독교 영성은 성경적이고 삼위일체적이다.

  성경적 영성의 특징은 성경이 우리를 읽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 일러주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밝혀 준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한다. “ 성경적 이란 말은 인간의 작고 답답한 ‘어림짐작’의 세계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크고 광대한 계시의 세계를 지향하고 그 속에 푹 잠기는 것을 뜻한다.  온전한 기독교 영성은 또한 삼위일체적이다. 삼위일체적 영성은 5 차원을 가진다. 첫째 삼위일체 영성은 우리의 교제와 공동체가 다른 구도자와 제자들과만 공유하는 게 아님을 의미한다. 우리는 사실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사이의 사랑의 교제와 삶 속으로 인도되었다(요일1:3).
  둘째, 삼위일체적 영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나님은 멀리 하늘에 계시지 않고 거룩한 장소와 시간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씨줄과 날줄 속에서도 내재하는 분임을 의미한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성육신과 성령의 권능에 찬 임재는 가장 사소한 상거래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뜻한다. 셋째, 삶을 통한 하나님 체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융합이 아니라 상호침투와 같은 것이다. 그리스어로는 페리코레시스라 부른다. 우리는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찾아간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이지 바다에 있는 물 한방울처럼 하나님께로 삼켜지는 것과 다르다.
  넷째, 우리를 몰입시키는 그 삼위 하나님의 관심사와 목적은 구속과 치유뿐 만 아니라, 하나됨과 창조(사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물과 사람을 하나로 묶어 주는 일)를 이룩하는 데 있다. 그리고 끝으로, 삼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돕는다. 기도는 쉬운게 아니다. 최근에 밴쿠버 근처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에 이틀간 기도하러 간 적이 있다. 거기서 내가 30년 동안 알고 지내던 방문객 담당 수도사가 이런 말을 했다.
“ 나도 어떤 수도원에 가서 이틀 동안 조용한 시간을 가질 수 있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전화는 계속 울리지요, 끝없는 이메일에다가 편지들 그리고 계속 돌아가는 업무에 정신이 다 없네요!”

이런 문제 해결책은 먼저 하나님이 장테에서도 함계하시는 분임을 인식하는 것부터 필요하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이런 메시지가 대체로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온다는 데 있다.

종교 없는 영성
  최근에 ‘새로운 사업계 영성’에 관한 책과 글 중에서 존 리네쉬가 편집한 책 “사업계의 새로운 전통들 : 21세기를 위한 영성과 리더십”이라는 책에는 장래의 사업 모습에 관한 12명의 사상가들의 생각을 담은 이 책은 새로운 사업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회사는 하나의 집합체가 아니고 공동체이고, 생산과 이윤을 위한 시스템에 불과한 게 아니라 인간 존재를 위한 시스템이다. 경영인의 새 이미지는 영적인 장로의 그것이다. 고용인들은 공동선을 위해 상호 의존적으로 일하는 몸의 지체들이다. 사명 선언문, 비전, 목표, 가치와 같은 것들이 계속 회사를 뒤에서 밀어 주겠지만, 더 높은 목적이 회사를 앞에서 끌어당겨 줄 것이다.

회사는 사람들을 구비시키는 조직으로서, 각 구성원들에게 봉사(사역)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줌으로써 각 사람이 더욱 인간다워지고, 더욱 창조적이 되고, 더 높은 목적과 더욱 통합되도록 해 준다.

내가 논문을 지도한 제프 셀러즈는 뉴에이지 영성과 전통 종교 영성의 혼합이 낳은 세 가지 측면을 잘 요약했다.
집합적 측면 : 더 높은 수익보다 더 높은 목적을 우선시함, 생태학적 민감성.
개인적 측면 : 자아실현, 자율성, 창의성, 영적인 동기.
우주적 측면 : 협력, 조화, 영적 진화, 세계적 시너지.

보살핌, 사랑, 영성, 인간의 영, 각성, 뒷걸음질, 신흥 이단, 내적인 권위, 내적인 지혜, 영혼, 더 깊은 목적의식의 추구, 공동 창조, 무조건적 사랑의 추구, 메타노이아, 영적인 장로로서의 기업가, 초월성의 필요, 하나님과의 관계, 경이로움, 영적 각성, 경축, 회사-성당, 더 높은 목적, 교통, 영적 가치관, 훈련, 전통, 등. 여기에 전통이란 말도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하라. 리네쉬가 편집한 책에 기고한 한 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분석한다.

“과학적 유물론의 실증주의적이고 환원주의적 전제들이 일련의 새로운 신념들로 대치되고 있으며, 후자에는 깊은 직관의 지도를 받는 이성에 대한 더 강한 믿음도 포함되어 있다. 달리 말해서, 오늘날 사회의 ‘재영성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는 역사상 즐비했던 틀에 잡힌 종교들보다 더 체험 중심적이고 덜 근본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런 면에서 금세기의 패러다임의 전환은 종교로의 복귀가 아니라, 종교 없는 영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건대, 회사는 영혼과 소명을 갖고 있다. 회사의 존재 이유가 이윤에서 비젼으로 바뀌고 있다. 회사는 사회에, 아니 세계에 장기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존재한다. 오래된 사회문화, 도시, 이웃, 교회 등이 원자화되었으므로 회사 문화가 새로운 종족, 새로운 이웃이 될 것이다. 회사 자체가 바로 새로운 공동체라는 말이다. 이같은 기업의 재영성화 작업에 필수적 역할을 하는 것은 직관, 더 높은 목적의 추구를 통한 창의성과 소명감의 고취, 그로 인한 의지, 기쁨, 힘, 연민의 발동 등이다. 따라서 우리는 봉급이나 경력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을 쏟아 일하도록 도전 받는다. 이런 사업계의 영성은 금세기 초반을 지배했던 과학적 유물론에 도전하면서 내적인 지혜, 권위, 그리고 자원들을 주목한다. 이 사상가들은 사기업이야말로 젊은 세대에 영적 지도력을 제공하고 지리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를 가로질러 새로운 상품을 확장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새로운 사업적 영성의 많은 개념은 역사적 기독교 및 유대교와 완전히 조화를 이루는 것들이다. 새로운 영성은 인간을 초월하는 어떤 존재, 진정한 공동체, 뜻 깊은 봉사를 향한 인간의 채울 수 없는 갈증을 반영한다. 오늘날 현대인의 영혼은 좁은 종교생활에만 신경 쓰는 교회에 의해 채워지지 않고 있으며 서구의 세속적 휴머니즘으로 인해 더욱 굶주려 있는데, 바로 이 영적 공허감의 문제를 새로운 사업적 영성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다른 또 하나의 길이 있다. 그것은 긴 전통을 가진 기독교 신앙에 뿌리내린 길이다.

혼합된 삶

  기독교 영성의 역사는 혼합된 삶이라 불러왔다. 이는 곧 적극적인 참여와 하나님 및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뒤로 물러나는 것이 서로 뒤섞인 삶이다. 후자를 일컬어 장 칼뱅은 이중적 지식이라고 했고, 그것이 참 종교의 핵심이라했다. 이런 삶에 대해 탁월하게 설명한 책은 14세기 아우구스티누파의 정전이었던, 월터 힐튼의 “한 평신도에게 보내는 편지들”이다.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해 사업을 그만두려는 한 사업에게 힐튼은 이렇게 썼다.
 
  활동적인 삶과 관조적인 삶을 서로 뒤섞으면 아주 잘 살게 될 것입니다. 때로 당신은 마르다와 같이 집안을 정돈하고 자녀들, 고용인들, 소작인들 혹은 이웃과의 관계를 돌보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잘 하고 있으면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들이 잘못하고 있으면, 그들을 가르챠ㅕ 바로 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재산과 세상 재물이 어떻게 관리되고 보존되는지 혹은 고용인들이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투자 하는지를 눈여겨보고, 현명하게 파악해서, 늘어난 재산을 나누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에 더욱 풍성하게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또 때로는 마리와 같이 세상의 일에서 떠나 주님 발 앞에 겸손히 앉아서, 그분이 은혜를 주시는 대로 기도와 거룩한 생각과 그분에 대한 묵상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러고는 이 활동에서 저 활동으로 옮겨 청지기 직분을 다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 측면을 모두 수행하는 게 필요합니다. 이랗게 함으로써 자선을 베풀라는 사랑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삶이었다. 그분 삶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개입과 철수가 아니라 리듬처럼 순환되는 모습이라 생각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혼합된 삶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삶의 중요한 요건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사실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얻기 위해 무엇인가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계, 사업계, 정치계를 막론하고 내면이 불안한 지도자가 상당히 많다. 또 그런 불안감 때문에 그들은 지도력의 기반을 권력이나 친밀감 혹은 지위를 찾는 데 둔다. 이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은 하나님의 기쁨을 안고 사는 것이다(사42:1). 우리가 내면 깊숙이 그 기쁨을 경험하려면 묵상과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러면 일을 하는 가운데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주의 집중을 요하는 것이다. 이런 일상 가운데 우리의 기도는 느헤미야가 고도의 압박감을 느끼는 왕궁생활 가운데 드렸던 ‘화살기도’같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어려운 업무는 기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로렌스 형제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주님을 향하여 “당신이 저를 돕지 않으면 이 일을 해낼 수 없습니다”하고 기도하곤 했다. 그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에도 그것을 기도의 계기로 삼았다. “주님, 당신이 저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 주시지 않으면 저는 그 실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더 긴 시간을 따로 떼어 놓고 기도하고 기뻐하고 우선순위를 정돈하는 일도 필요하다. 하루를 시작할 때나 끝날 때 일정시간을 떼 놓고 하거나 때로 하루 종일 조용한 곳에 가서 할 수 있는 훈련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다.

1. 하루를 시작할 때나 끝낼 때 기원과 의탁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 
2. 성경 읽기를 습관화 할 수 있다. 성경은 장터에서 정의와 믿음에 입각하여 그리고 지혜롭게 사는 법을 보여준다. 우리의 비전과 안목에 새로워지기도 한다. 내가 개인적으로 실행하는 성경 읽기 계획은 매일 신구약을 두장씩 읽어서 일년에 구약 1독, 신약과 시편을 2번씩 동톡하는 것이다.
영적인 독서를 연습할 수 있다. 특정한 본문에 대한 묵상과 몇몇 구절을 암송하는 것도 포함된다.
일기를 씀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자아비판 없이 우리의 느낌, 정서, 갈망, 기도를 문자로 기록할 수 있다.
금식을 통해 하나님 앞에 잠잠해질 수 있다. 음식과 사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통제권을 드릴 수 있고, 사람들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앞에 홀로 설 수 있다.
6. 죄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에게 정직하고 솔직하게 우리의 부적절한 행동과 생각 그리고 하나님의 껄끄러운 관계에 대해 깨어진 심령으로 아릴 수 있다(요일1:9). 
7. 안식을 연습할 수 있다. 안식이란 말은 일과 노고를 그만두는 것을 의미한다. 매주 하루 온종일 쉬는 것이 좋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 준다. 우리가 궁극적인 실재이신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우선순위를 바르게 세우도록, 우리 행위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게 아님을 유념하도록 우리를 지켜준다는 말이다.


긴장과 더불어 사는 삶

‘깊은 데로’간다고 긴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크엘룰은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안에 존재하며 또한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일러 준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죄 많은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아니, 적어도 그리 크게 바꿀 수 없다. 동시에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다. 

  그분은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셨고, 우리가 죄와 은혜 사이의 긴장 가운데 존재하는 것처럼 이 두가지 아주 상반된 요구들 사이의 긴장 가운데 머물고 있다. 이는 아주 고통스럽고 거북한 상황이지만,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입지이고, 세상에서 우리는 - 회개하는 심령으로 - 이 땅에서의 삶이 반드시 ‘스캔들’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긴장 혹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긴장을 하나의 추상적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능한 한 가장 구체적인 삶의 모습으로서, 실제로 살아내야하고, 실현되어야 할 그 무엇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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