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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엘비스클럽 마가복음 4장 1절 20절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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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 건 조회 244 회
작성일 22-05-14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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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클럽 마가복음 4장 1절 20절 요약 220513

누가 들을 귀 있는 자인가?

 

주일학교 때부터 많이 듣던 본문말씀이라 오히려 신선함이 없지 않을까 걱정할 만큼 익숙한 내용이지만 공동체가 함께 질문하고 대답을 찾으면서 말씀에 대한 새로운 기대가 생기고 격려를 받으며 다시 한 번 결단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자칫 이 본문을 평이하게 개인적으로 어떻게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정도로 생각하기 쉬운 데 이 비유와 비유의 해석의 말씀이 위치한 맥락을 고려하면 평면적 적용으로 끝날 대목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흐름과 맥락의 대강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1:14-15)는 메시지로 사역을 시작하신 예수는 줄곳 그 하나님의 통치의 증거로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십니다. 특히 축사 때 귀신들의 증언(“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을 강력하게 막으시면서(1:34, 3:11,12 cf.병자의 경우 1:40-45의 나병환자에게도 증언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도 유사한 이유) 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의 도래가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하셨습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들은 몰려오고 (1:28,33, 2:2, 3:7-10, 4:1) 당대의 기존 종교 지도자들은 반복적으로 그리고 점점 강도를 높여서 흠을 찾아 내어 대적하려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1:22, 2:6-7, 16,18,24, 3:6).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는 4명의 제자를 부르시고(1:16-20) 레위를 부르시며(2:13-14), 마침내 열두 제자를 뽑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내 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진 사도로 삼으십니다. 특히 3장은 유대 전역에서 모인 무리와 열두사도의 대조, 그리고 예수를 프레임을 씌워 미쳐서 악한 귀신의 편이라고 왜곡하던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를 오히려 성령을 거스리는 사탄(대적자, 참소자)로 규정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새로운 가족 구성원인 예수 주위에 둘러 앉아 있는 사람들의 대조가 분명합니다. 3장의 후반부는 엄청난 대결과 긴장이 보이는 데 하나의 (영적)전쟁을 치르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본문의 비유를 포함하여 4장 1절에서 34절까지는 한 전투를 마치고 다음 전투를 내다보면서 집결한 아군 전사들에게 결의를 새롭게 하고 격려하려는 장군의 웅변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앞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비유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이라는 점은 바닷가에서 매우 큰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부분(4:1-9)과 이것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홀로 계실 때 “열두 제자들과 함께” “예수의 주위에 둘러 있는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시는 부분 (4:14-20) 중간에 놓여 있는 4:11-12의 말씀을 볼 때 더 명료해 집니다. 12절은 이사야 6장 9절과 10절의 인용인데 특히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앞 문맥에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사탄(대적자)이 되어 거짓뉴스, 거짓 프레임을 짜는 기득권 율법사들을 겨냥하여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히 죄에 매인다(3:29)”라고 하신 말씀과 명확히 연결됩니다. 결국 이것은 묵시적 전투의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 나라의 편에 설 것인가 그 반대편에 설 것인가 하는 정치적인 선택과 관련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한쪽 프레임, 세계관을 선택하게 되면 확증편향이 생기면서 명확한 것을 봐도 보지 못하고 같은 사실을 들어도 달리 해석하고 남이 들을 수 있는 것을 듣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통상적으로 비유란 추상적이고 어려운 원관념을 현실감있고 일상화된 보조관념을 통해 사람들에게 와 닿을 수 있도록 쉽게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집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접근을 통해 사람들에게 의사소통하시려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쉽게 설명하고 이해를 시키려고 해도 듣는 이의 프레임, 말하는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편견이나 입장 때문에 쉬운 것이 쉽지 않다는 이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본문에서 “듣다”라는 단어가 10회 이상 반복되고 있다는 점은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11절 너희)”이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로 들을 수 있지 그렇지 못한 사람(저 바깥사람)은 “모든 것이 수수께끼(비유)로 들”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정치적인 선택을 하고 어떤 편에 서서 말씀을 듣느냐 입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4장 1절의 공간적 배치와 10절의 공간적 느낌의 대조가 이것을 느낌으로 증폭시켜줍니다. 3장 9절에서 이미 밀려오는 사람들 때문에 배를 빌려 놓도록 하셨는 데 지금 매우 큰 무리(아마도 여기에는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 다수와 함께 흠을 잡으려는 자들도 포함)가 몰려와 마침내 배를 띄어 바다쪽에 앉으시고 무리는 바닷가에 있는 그림입니다. 그 배에는 10절에 언급된 사람들이 아마도 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10절과 13절을 보면 열두제자와 “예수의 주위에 둘러 있는 사람”들도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이 부분을 분명히 언급하시면서도 뿌려진 말씀이 놀라우리 만큼 삼십배, 육십배, 백배 열매를 맺는 편에 너희들이 있다고 격려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계속 유지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상세하게 비유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길가의 씨를 새가 쪼아 먹듯이 15절의 “사탄”은 바로 앞 문맥인 3장 마지막 부분의 사탄 즉 대적자 비방자를 생각하게 하는 단어입니다(이 단어가 나중 8장에 가면 베드로에게 부쳐진 이름이기도 합니다.33절). 돌짝밭에 핀 싹을 태우는 해는 17절의 “환난과 박해”이며 이것은 외부적인 도전입니다. 식물의 기운을 막은 가시덤불은 19절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다른 일의 욕심”과 같은 내면적인 문제입니다. 한편으로 이미 그 편에 선 소수의 공동체인 제자들은 여전히 이것들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다른 편으로 하나님 나라 하나님 통치의 경이로운 확산(30배 60배 100배)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 서야 할까요?

 

삶,일,구원 (3191) 지성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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